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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 대(對) 현실,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서

윤진섭


관념 대(對) 현실,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서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인간이 살아있음을 의식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과거를 회상할 때이다. 육체적 아픔이나 쾌락을 느끼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지만, 지나간 일을 회상하는 것 또한 현재의 정신작용인 것이다. 더구나 까맣게 잊고 있던 어떤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질 때, 그것은 때로 일종의 초현실적 풍경처럼 다가온다.  

 갤러리 바톤이 기획한 [더 높은 곳 대신에(In Lieu of Higher Ground)]전을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번 전시에 초대받은 박장년(1937-2009), 박석원(1941-  ), 송번수(1943-  ) 등 세 작가들을 70년대 중반에 만났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화단생활을 시작한 나는 나보다 한 세대나 위인 이 작가들을 그 당시에 접할 수 있었다.1)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 역시 그런 의미에서 익숙한, 말하자면 내 기억 속의 원초적 풍경과도 같은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을 보며 나는 벌써 오래 전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나의 옛 자화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어찌 초현실적 풍경처럼 다가오지 않겠는가. 

 이번 기획전이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주로 70년대의 작품들을 소환함으로써 비단 작품뿐만 아니라 이 작가들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전시장 사정상 많은 인원이 아니고 박장년, 박석원, 송번수 등 세 작가에 국한되었지만, 이 전시가 불러일으킨 의미의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우선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이번 전시가 이들이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70년대의 화단 풍경을 오늘의 시점에서 반추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70년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양상은 과연 어땠는지 하는 궁금증에 대해 비록 단면에 불과할지라도 답변이 가능한 것이다. 그만큼 이 세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으며 이루어 놓은 업적이 크다.   


Ⅱ.
 우선 출품작들을 거론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도록 하자. 박장년의 <마포 77-28>(1977, 마포에 유채, 116.5x130cm), <74 반응 B>(1974,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재료, 72x53cm), 박석원의 <적(積) 7726>(1977, 나무, 28x233x13cm), <적-대(積-對) 7918>(1978, 나무, 190x52x49cm), 송번수의 <가시>(1981, 종이부조, 73x53cm) 등등은 이 작가들이 70년대에 제작한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40년 전에 만든 작품들이 겹겹이 쌓인 시간의 켜를 허물고 지금 나의 눈앞에 ‘나타난(現前)’ 것이다. 이 ‘현전(現前)’이란 단어 자체가 70년대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작품 제목이고 보면, 그것이 지닌 ‘관념성’은 이념적으로 나뉘어 불편했던 8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미해결의 장(章)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2) 이 전시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미해결로 남은 장을 다시 공론화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는 물을 것이다. 예술에 미해결이 있을 수 있는가? 예술이란 강물처럼 그저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 즉 어떤 사건이 던진 파장과 그 파장의 의미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새겨 보는 일, 그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최근 미술계의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70-80년대를 겨냥한 아카이브 중심의 여러 기획전들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의미 찾기’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2천년대에 이르는 긴 시간의 폭을 지닌 이번 전시는 그런 견지에서 볼 때 일개 상업화랑의 전시라기보다는, 규모는 작지만 미술관 전시에 버금가는, 목적이 분명한 기획전이었다. 타피스트리와 목판화(송번수), 회화(박장년), 목조각(박석원) 등 각 시기를 대변할 수 있는 정선된 작품들을 통해 각 작가들의 작품의 시간적 흐름은 물론,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성(物性)과 허상, 이미지와 실제, 존재와 비존재, 개념과 사물, 환원과 확산(이일) 등등 70년대를 관류한 어사(語辭)들은 과연 오늘의 이 시대에 음미될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세대를 초월하여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가능태로서의 답을 이 전시는 충분히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질문에 대한 응답은 물론 미술현장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세대를 초월하여 단색화와 같은 미니멀한 경향의 회화가 20-30대 작가들 사이에서 만만치 않은 비중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 등등이 그것이다. 대체적으로 오늘날 20-30대 작가들은 개인적 서사, 즉 이야기의 서술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많은 섬세한 서사의 층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고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이른바 일반화의 오류이다. 예컨대, 풍경은 대체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어어, 저건 노란색이네. 저건 빨간색 일색이고. 그럴 때 시들어가는 무수한 흐릿한 색들.  비평이 바라봐야 할 지점이 분명 이것일진대, 광풍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미처 보지 못 했다. 70년대의 모더니즘 바람 속에서 민중미술의 씨앗을 보지 못한 것이나, 80년대의 민중미술 바람이 휘몰아칠 때 화단에 형성되던 미약한 어떤 흐름을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Ⅲ.
 갤러리 바톤이 기획한 이번 전시에 초대된 박장년, 박석원, 송번수는 동세대 작가들이다. 전공만 다를 뿐 3) 다 같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녔으며, 졸업 후에는 화단에서 함께 미술활동을 했다. 박석원과 송번수는 70년대 초반에 <AG> 그룹의 회원으로 활동을 한 적이 있으며, 박장년은 <AG> 회원은 아니었지만 같은 시기에 단색화 작가로 화단 활동을 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아는 사이다.     

 이들이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한 60년대 중반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전위미술( 운동의 첫 출발인 비정형 회화(Informel)가 쇠잔해 질 무렵이었다. 6.25전쟁 세대인 일단의 청년작가들이 현대미술가협회 4) 를 창립하고 격정적인 추상화를 그리며 집단적인 활동을 한 이후 십여 년이 경과하자, 과격했던 앵포르멜의 열기도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앵포르멜’이란 집단적 미학이 극한에 이르면서 포화상태가 되자 화단에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박장년, 박석원, 송번수는 다 함께 ‘4.19세대’에 속한다. 박장년이 약간 위 연배이긴 하지만, 이들이 속한 대학생 집단은 1960년에 일어난 범국민적인 민주화운동을 이끈 주체세력이었다. 10여년에 걸친 자유당의 장기독재에 저항한 학생운동이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로 번지자 독재자 이승만 대통령은 드디어 하야를 선언하고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이 혁명의 주체세력인 ‘4.19 세대’는 한글을 본격적으로 배운 한글세대라는 점에서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일본어를 배운 앵포르멜 세대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6.25전쟁세대와 4.19세대를 가르는 또 다른 차이점은 전자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대변되는 유교적 덕목과 교육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반면, 후자는 8.15해방 이후 주로 미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근대식 교육제도의 수혜자들이라는 점이다. 신구세대의 단절과 갈등은 언어와 교육제도가 빚은 산물이거니와, 이것이 서로 다른 화단의 풍경을 형성시킨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도 있었다. 이들이 대학을 졸업한 60년대 중반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세대의 산물인 앵포르멜이 끝물에 이른 시기였다. 따라서 이들은 구세대의 미학적 세례를 피해갈 수 없었다. 박장년과 박석원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들의 초기작에서 앵포르멜의 영향이 엿보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다. 5)

 그러나 60년대 중반 비슷한 시기에 미술대학을 졸업한 세 작가는 각자 예술의 길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훗날 그 세 길이 합류하는 시공간은 과연 어디였던가. 여기서 우리는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화단풍경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박석원과 송번수는 ‘AG’에서 다시 만나고, 박장년은 1970년대 중반 하이퍼리얼리즘과 단색화가 부상되면서 화단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우선 박석원과 송번수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971년에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AG>가 주최한 [현실과 실현]전에서 였다. 송번수는 이 전시를 위한 대형 포스터를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다. 박석원은 1969년 <AG>의 창립 멤버로 초창기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전위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을 모토로 창립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는 전위를 표방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6) 약관 20대 후반의 나이에 70년대 초반 당시 <ST>와 함께 최고의 전위단체로 주목을 받았던 <AG>의 회원으로 영입된 두 사람은 실험적인 작업을 펼쳐나갔다. 송번수는 비록 공예를 전공하였지만 <ST> 그룹의 회장인 이건용과 친교를 맺는 등 공예 보다는 오히려 판화 매체를 통한 회화적 표현과 함께 설치, 퍼포먼스와 같은 실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박석원은 60년대 초반의 <무제(Untitled)>와 <작품(Work)> 연작을 통해 추상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초토(焦土)> 연작을 통해 본격적인 앵포르멜 스타일의 추상작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한편, 박장년은 미술대학에 재학 중인 1963년부터 공모전에 출품하는 등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공모전]을 비롯하여 신상회 공모전, 신인예술상전 7) 등등이 그것이다. 당시의 화단 사정을 감안할 때 작가로서 입신(立身)하는 가장 빠른 길은 국전에서 수상하는 것인데, 8) 박장년의 이러한 시도 역시 당시 대다수의 작가들이 보인 일반적인 추세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앵포르멜적 경향을 띠었던 60년대 초반의 작품 경향에서 벗어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예의 마포를 재료로 한 단색조 회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Ⅳ.
 박장년, 박석원, 송번수가 작가로서 한창 입지를 다져나가던 60-70년대는 국전의 권위가 점차 약화되면서 국제전으로 작가들의 시선이 옮겨가던 때였다. 물론 70년대에도 대중의 관심은 여전히 국전에 머물렀지만, 언론은 국제전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파리비엔날레]와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은 참가작가 선정을 미협 국제분과에서 했기 때문에 미협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9)

 당시 화단의 일각에서는 국전에의 거부와 함께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경향의 움직임이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했다. ‘무’, ‘신전’, ‘오리진’ 동인들이 모여 결성한 [청년작가연립전](1987.12.11-17, 중앙공보관 전시실)은 앵포르멜 풍의 회화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면서 오브제, 설치, 구체음악, 해프닝과 같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위적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훗날 <AG> 그룹을 낳는 촉매가 되었다.10)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작가로서의 입지 구축을 위해 활동 초기에는 세 사람 모두가 국전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그 자장에서 벗어나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경향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들이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형성과 전개에 기여한 공로이다. 11)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점차 국제전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70년대 이후에 시작되는 이러한 추세는 당시 박서보를 중심으로 한 미협의 국제화 전략의 결과이기도 했다. 

 국제전 참가와 관련해 볼 때, 박석원은 이미 약관 20대 때인 60년대 중반에 파리비엔날레(Biennale de Paris, 1966, 제5회)와 상파울루비엔날레(Biennale de Sao Paulo, 1969, 제10회)에 참가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송번수는 제7회 파리비엔날레(1971)와 1973년의 제12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하여 <공습경보>를 발표하였다. 박장년은 일본 동경의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1977)을 비롯하여 1978년 제4회 인도트리엔날레에 참가하는 등 약간 뒤늦게 국제화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Ⅴ.
 이들이 왕성하게 할동하던 70년대는 한국 모더니즘의 확산기였다. 단색화(Dansaekhwa) 경향이 1972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앙데팡당]전 12) 에서 공식적으로 나타난 이래, 70년대 중반에 이르면 1974년에 창립된 [대구현대미술제]와 함께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드서울]전 등등 70년대 모더니즘 미술운동의 구심점이 된 대규모 미술제를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복궁에서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면서부터 [앙데팡당]전, [서울현대미술제], [에꼴드서울] 등 대규모 현대미술 전시를 통해 형성, 심화된 모더니즘 미술은 한국미술이 국전 중심에서 국제전 중심으로 방향을 트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경제개발 중심의 근대화 정책이 국정과제의 1순위로 부각되고 있었다. 이 같은 추세는 작가들의 작업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회화에서 평면성의 발현을 제1의 원리로 두는 단색화는 한국 모더니즘의 요체였다. 미술평론가 이일은 이를 가리켜 ‘범자연주의’, 오광수는 ‘비물질화’라는 용어로 요약했다. 이일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비평이론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한국 모더니즘의 토착화에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박장년의 <마포(麻布)> 연작이 70년대 공간에서 한국 모더니즘의 한 전형으로 자리잡게 된 이면에는 ‘미적 근대성(aesthetic modernity)'의 개념을 둘러싸고 이론과 예술적 실천 사이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길항관계들이 개재돼 있다. 이른바 비평이론과 그에 따른 예술적 실천 사이에서 파생되는 이러한 문제들은 창조적으로 승화되면 플러스 요인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훗날 엄청난 손실로 평가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70년대 단색화 운동을 회상할 때, 그것의 어두운 이면인 ‘획일화 현상’은 이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박석원과 박장년은 한국 모더니즘 미학의 정수(精髓)를 보여준 대표작가군(群) 13) 에 속한다. 박장년은 회화, 박석원은 조각에 주력한 작가들이지만 각자 한국의 미를 작품 속에 현대적인 미감으로 녹여 발효시켰다는 사실이 평생의 업적에 해당한다. 박장년의 <마포> 연작, 박석원의 <적(績)> 연작에는 70년대부터 구체화된 한국 모더니즘 미학이 스며들어 있다. 비록 박장년의 작품은 마포 위에 마포로 된 커튼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70년대에 유행한 하이퍼리얼리즘의 입장과, 실제의 마포와 이미지로서의 마포가 중복되는데서 오는 동어반복적 측면을 들어 개념미술의 관점에서도 해석될 가능성이 열려 있으나, 요체는 마포라는 소재의 질감과 촉감, 그리고 누런  빛의 색채가 주는 푸근한 정서에 들어 있다. 박장년 작품세계의 재조명과 관련하여 나는 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다소 길지만 여기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박장년처럼 경계에 위치해 있는 작가들에 대한 미술사적 조명이 활발히 이루어질 때 한국 현대미술의 내용이 보다 풍부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단색화, 개념미술, 극사실주의 회화 등등 미술의 범주를 지나치게 선명하게 구분하여 전시를 기획할 때, 다원적인 성격을 지닌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비켜지나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세상을 떠난 박장년의 작업에 대한 조명이 아직까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비평과 전시기획, 미술사 분야에서 그의 작업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14) 

 박석원은 90년대 초반에 접어들어 제작한 <積意> 연작을 통해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이 작품은 각기 다른 크기로 자른 돌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mass)를 산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성 쌓는 기술이 반영돼 있다. 이는 비슷한 모양의 돌을 여러 개 결합시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 80년대의 <적> 연작이 발전한 것이다. 정사각형의 철편이나 동일한 모양의 돌의 단위들이 합쳐져 기하학적인 형태를 이룬 80년대의 <적> 연작은 재료의 자연스런 속성을 억제하고 반복의 미를 강조한 인위적인 스타일의 작업이었다. 그러던 박석원이 90년대 들어와 재료의 속성에 주목하여 돌의 자연스런 모습을 살리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에서 박석원이 취하는 기본적인 조형어법은 한국의 전통적인 조형방식을 연상시킨다. 그의 석조나 목조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 방식은 우리의 전통 축성술이나 건축술, 혹은 조각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하나의 전체적인 사각틀을 설정하고 그 속에 서로 다른 길이의 단위들을 채워 넣어 결과적으로는 양변이 같은 길이의 입방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박석원은 매끈하게 다듬은 돌의 표면을 정으로 무수히 쪼아 흠집을 낸 <적의(積意)> 연작을 발표한 바 있다. 돌의 표면을 정으로 쪼는 이러한 기법이 보다 적극적인 양태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90년대 후반의 일이다. <적의 9765>, <적의 99-09>에 잘 드러난 이러한 기법은 기하학적 혹은 엄격한 대칭을 이루는 형태와 결합하고 있다. 특히 후자는 엄정한 균제미에 모든 조형요소를 통합시킴으로써 절제되고 환원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한편, 공예를 전공한 송번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공예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현대미술의 장(場) 안으로 깊숙이 진입해 들어갔다. 그는 일찍이 1960년대에 유강렬(1920-1976)과 정규(1923-1971)에게서 판화를 사사한 이래, 목판화와 세리그라피, 석판화를 통해 방독면, 가시, 불, 폭탄 등 자극적이며 도발적인 이미지들을 화면에 담았다. 그에게는 세상에 존재하는 부조리한 사태와 사건에 대한 분노가 내장돼 있었으며, 예술은 이를 표출하여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가령 70년대의 <공습경보>에 담긴 굶주린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참혹한 이미지를 비롯하여 한국 팝아트의 원조가 된 방독면을 쓴 얼굴 이미지(<공습경보> 연작, 1974), 남북간 통 일원칙 합의’라는 표제가 실린 조선일보 호외 신문(<남북간 통일원칙 합의>, 세리그라피, 1972) 등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아주 오랜 기간동안 송번수의 목판화와 타피스트리 작업의 소재가 되는 가시와 함께 예술의 근간이 되었다. 예수의 가시면류관에서 보듯이, 고난과 대속(代贖)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 이 가시에 대한 꾸준한 선호는 그에게 훗날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헝가리 개국 1000주년 기념 국제타피스트리 전시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판화에서 출발하여 점차 섬유예술로 이행해 가는 송번수의 50년에 걸친 작업의 도정은 도전과 저항의 정신을 요체로 삼는 아방가르드의 정신에 충실한 과정이며 그가 얻은 성과는 그 결실이었다. 


Ⅵ.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장년, 박석원, 송번수 등 세 작가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다. 그 중에서 박장년은 아쉽게도 일찍 작고하였지만, 어느덧 팔십대에 도달한 박석원과 송번수는 지금도 왕성하게 작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개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의 작업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의미의 보고(寶庫)이다. 

 갤러리 바톤의 이번 전시는 70년대 한국 모더니즘의 정수(精髓)를 담은 작품들의 전시를 통해 세 원로작가들의 존재감을 화단에 새롭게 각인시켜주었음은 물론, 70년대 모더니즘 미술이 단지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체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내가 이 글의 서두에 쓴 것처럼 “인간이 살아있음을 의식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과거를 회상할 때”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주었다.




1)  내가 전위단체로 이름이 높았던 <ST> 그룹에 들어간 것은 1977년 이었다. 당시 <ST> 그룹에는 이건용, 성능경, 김용민, 장석원, 김용익, 김장섭 등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작품을 하는 작가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  70년대의 모더니즘과 80년대에 대두된 민중미술과의 대립을 가리킨다. 

3)  박장년은 회화(서양화), 박석원은 조각, 송번수는 공예 전공이다. 대학 졸업연도는 박석원이 1964년이며, 박장년과 송번수는 1965년이다.  

4)  국전의 권위와 구태의연한 화풍, 틀에 박힌 아카데미시즘에 반발하여 결성된 재야단체로서 1957년에 창립되었다. 참여작가는 당시 20대에 해당하는 김서봉, 김영환, 김창열, 김청관, 김충선,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이수헌, 박서보, 안재후, 장성순, 전상수, 정건모, 조동훈, 하인두 등이다.   

5) 공예를 전공한 송번수에게서 앵포르멜의 형향을 찾아보기 어려운 사실도 특이하다.

6)  작고 작가들을 빼면 지금도 회원 전원이 화단 원로로 활동하고 있다. 1975년에 해체전을 치룬 이 단체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2013년에 실시한 미술전문가 앙케트에서 근현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체 1위에 선정되었다. 1971년 당시 회원은 다음과 같다. 김구림, 김동규, 김청정,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송번수, 신학철, 심문섭, 이강소, 이건용, 이승조, 이승택, 조성묵, 최명영, 하종현(이상 작가), 김인환, 오광수, 이일(이상 평론가). 이 단체는 선언문과 전위(Avant-garde)를 뜻하는 ‘AG’라는 기관지를 갖춘 한국미술사상 최초의 전위집단이었다. 

7) 박장년은 이 공모전에서 서양화부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8)  박석원은 60년대 초반 이후 국전에서 입, 특선을 거듭하다 1968년과 9년 두 해에 걸쳐 연거푸 국회의장상을 수상하여 화단에서 확고히 입지를 굳혔다. 그의 이처럼 화려한 경력은 훗날 화단의 엘리트로서 <AG> 그룹의 창립멤버가 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9)  당시 미협의 국제전 참가와 관련된 이러한 움직임에는 1970년부터 77년까지 미협 부이사장을, 77년부터 80년까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박서보의 영향이 미쳤다. 박서보는 1972년에 [앙데팡당]전을, 1975년에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드서울] 창립하면서 현대미술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10)  이 상황을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고자 한다. 이 과정      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다음의 글들을 참고할 것. 윤진섭, <한국모더니즘 미술 연구>(재원, 2000), 윤진섭,‘70년대 한국단색화의 태동과 전개’,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마로니에북스, 2015

11) 2017년의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 <송번수_50년의 무언극>] 초대전과 1018년의 성곡미술관 주최 [박장년 : 1963-2009 실재와 환영의 경계에서]전, 그리고 2011년 창원시립문신미술관 주최 [문신미술상 수상작가 박석원 초대전] 등등은 이 세 작가가 한국 미술계에 기여한 공로와 업적을 기린 대표적인 전시들이다. 

12)  공식적으로는 이동엽과 허황의 단색화가 파리비엔날레 참여작가 선발을 겸한 [앙데팡당]전에서 나타났으나 그 이전부터 이러한 경향은 서서히 싹트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글 ‘마음의 풍경’이 실린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의 단색화]전 도록을 참고할 것. 

13)  이 범주에 속하는 작가들로는 김환기, 곽인식, 김창열, 박서보, 정창섭, 하종현, 정상화, 권영우, 윤형근, 윤명로, 김기린, 이우환, 최명영, 서승원, 최병소, 이강소, 이동엽, 허황 등 단색화와 관련된 작가들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른바 ‘한국 모더니즘’이라고 했을 때 비단 단색화 뿐만 아니라 오방색을 비롯한 채색화의 현대화 작업을 둘러싼 미학적 성과도 포함될 수 있으나 글의 논지상 복잡한 논의는 생략하고자 한다.    

14) 윤진섭, ‘마포(麻布)-실재와 환영의 간극에서’, 성곡미술관 발행, 박장년회고전 도록,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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