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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각과 안영일, 빛이 되어 스러지다

윤진섭

안승각과 안영일, 빛이 되어 스러지다 
                      
윤 진 섭(미술평론가)                 
       

Ⅰ.
 한국의 단색화는 1960년대 초반에 발아(發芽)하여 70년대 중반에 숙성된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화풍이다. 그 주역이 바로 1950년대 후반에 결성된 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 1) 의 회원들이다. 김창열, 박서보, 하인두 등등 1930년을 전후하여 출생한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소위 말하는 ‘비정형(앵포르멜/Informel) 회화운동’을 추동(推動)해 나갔다. 이들은 6.25 전쟁이 야기한 혼란과 무자비한 인명의 살상을 직접 체험한 이른바 전쟁세대였다. 

 한국 전위미술(avant-garde)의 시발(始發)로 일컬어지는 비정형 회화는 그런 환경에서 탄생했다. 1953년 이루어진 휴전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무렵은 전쟁 피해의 복구가 채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의 명동거리는 스산하기만 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황폐했지만, 내부에는 예술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욕구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그 시기를 가리켜 우리는 ‘명동시대’라고 부른다.

 안영일(1934-2020)은 ‘현대미협’ 세대보다는 서너 해 늦은 ‘60년미협’ 세대에 속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안영일은 김대우, 유영렬, 김봉태, 윤명로, 손찬성, 최관도, 이주영, 김응찬, 박재곤, 김기동, 김종학, 송대현 등등, 같은 서울미대 출신들이 1960년에 결성한 ‘60년미협’에 가담하지 않았다. 서울미대 동기생인 화가 조용익의 증언에 의하면, 워낙 조용한 성품인 안영일은 집단을 이루고 선언문을 내는 그처럼 요란한 미술운동에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안영일이 시대의 흐름에 둔감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비정형 회화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다. 특히 나이프를 잘 다루었다. 안영일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은 이미 중학교 시절에 아버지인 안승각(1908-1995)이 그림을 그릴 때 나이프를 사용하는 모습을 자주 접했다고 한다. 안영일의 이 독특한 나이프 사용은 훗날 미국에서 제작한 일련의 단색화 작품들에서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안영일의 작품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Ⅱ. 
 그렇다면 안영일의 아버지인 안승각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1908년 황해도 연백 출신인 안승각은 구한말에 출생한 미술인으로서 아들인 안영일과는 판이한 세계에서 산 인물이다. 우선 그는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사람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부자지간이긴 하지만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동경에 있는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요, 한 사람은 8.15해방 이후에 서울미대에서 수학한 화가인데, 이 이대(二代)에 걸친 가족사에는 소위 근대와 현대라고 하는 숙명의 역사가 아롱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한 국전이라는 근대적 제도에 기반을 둔 화가로서의 입지(안승각)와, 비록 이른 나이에 국전에 입선을 하기도 했지만 2) 훗날 비정형 회화에 관심을 가져 기존의 화풍에 어긋난 몸짓(안영일)의 교차적 시선이 개입돼 있기도 하다. 

 193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 60여년에 걸친 안승각의 활동이 황해도 연백에서 동경을 거쳐 청주, 서울, 미국(L.A)으로의 이동경로를 보여주는 반면, 안영일의 그것은 청주에서 서울, 미국(뉴욕, L.A)으로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승각은 청주에 기반을 둔 청주의 초창기 문화예술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자신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청주와의 인연은 뜻밖의 추천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3)

 최근에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거장, 중원을 거닐다]전 4) 을 통해 엿볼 수 있었던 것처럼 청주와 충북권에서 안승각의 존재는 매우 뚜렷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청주의 1세대 서양화가이자 교육자로서 청주사범학교 시절에 정창섭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공로는 특기할만 하다. 5) 또한 동경 제국미술학교 출신이며 청주상고 교사인 김종현과 함께 초기 충북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미술 실기대회를 개최한 바 있으며, 1976년에 예총충북지부장을 맡아 일하는 등 많은 행정적 업적을 쌓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승각은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 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점이 그를 미술사적으로 조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안승각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피난민>(1942년 작, 72x9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의 구상풍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17회 선전에서 입선한 <청음(聽音>에서 보이는 것처럼 약간 굵고 거친 터치가 인상적이다. 6)

 안승각은 풍경화를 비롯하여 인물화와 정물화에 이르기까지 소재에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그렸다. 구도는 소재에 상관없이 주로 삼각형 구도를 취해 심리적으로 안정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제한된 도상 자료로 인해 자세한 분석은 어려우나 설경과 가을의 정취를 화폭에 담은 작품들이 다수 현존한다.  


Ⅲ. 
 안영일은 그림을 그리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림에 일찍 눈을 떴다. 그런 연유로 고등학생인 약관의 나이에 국전에 입선, 특출한 기량을 보였다. 특히 나이프를 사용한 기법에 능했다. 다음은 이 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안영일의 단색화가 한국의 다른 단색화들과 다른 점은 페인팅 나이프의 사용에 있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손에 잡은 나이프를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는데, 오랜 숙련을 통해 그 테크닉이 높은 경지에 도달해 있다. 음악으로 이야기하면 스타카토식의 똑똑 끊어서 화면에 정착시키는 이 기법은 실로 그 만의 독특한 방법론이다. 일정한 크기를 지닌 작은 사각 형태의 나이프에 의한 스트로크(stroke)는 안영일 단색화의 기본적인 원소이다. 그것은 마치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처럼 하나의 기본적인 단위로써 안영일 회화의 근간을 이룬다. 그런 까닭에 안영일의 그림은 ‘색과 빛의 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회화가 궁극적으로 색과 빛의 예술이라고 할 때, 안영일만큼 이러한 회화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가도 드물다. 색에 대한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빛을 일종의 예지미로 의식하게 된 특수한 경험이 오늘날 그를 독자적인 단색화의 양식을 창안한 작가로 만든 것이다.”
-졸고, <색과 빛으로 가득 찬 조화의 세계>, 안영일 화집, 8쪽, 갤러리 세솜, 발행, 2019-
 
 이처럼 ‘색과 빛의 결합’으로 요약되는 안영일의 회화는 그가 피아노와 첼로, 클라리넷과 같은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연주가이며, 클래식 음악에 심취한 음악애호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더욱 접근이 쉬워진다. 


Ⅳ.
 1966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L.A에 정착한 이후, 갖가지 삶의 신산을 겪은 안영일은 울적한 마음을 달랠 겸, 작은 보트를 타고 산타모니카의 해변을 떠나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짙은 안개를 만나 생사의 기로에 서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순간, 표류가 몰고온 고독감과 공포, 좌절이 온몸을 엄습했다. 그때 거기서 안영일은 “극지에서 만난다는, 천지가 온통 하얗게 덮여 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상태(whiteout)를 체험”7) 하게 된다. 

 이 시각을 통한 강렬한 정신적 체험이 색을 통해 캔버스 위에 육화(肉化)돼 나타난 것, 그것이 바로 ‘빛’이다. 그 빛은 작은 사각형으로 된 면과 면 사이의 좁은 틈에서 방출되는데, 그것은 안영일이 나이프로 일일이 질서정연하게 그은 작은 사각형들과 상대적으로 밝은 바탕색과의 대비가 연출하는 시각적 오케스트라에 다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안영일의 단색화는 색의 예술인 동시에 빛의 예술이기도 하며, 또한 한편으로는 음악의 예술이기도 하다. 그의 회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는 리듬이며, 그것이 생성되는 근원은 나이프를 쥔 손의 강약, 곧 힘의 세기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있는가? 다음의 글은 이에 대한 생각을 적은 것이다. 

 “안영일은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과거에 체험한 바다에서의 경이를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 유사한 몸짓을 되풀이한다. 자연에 대한 경이와 우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극심한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겪고 난 후에 깨달은 ‘무(nothingness)’에 대한 통찰은 자신이 설정한 미적 이데아를 추구하는 반복의 몸짓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플로티누스(Plotinus)의 미론에 기대면 이데아의 분유, 즉 나누어 깃듦으로써 현존하기에 이른다. 유성물감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을 통해 분유된 미적 이상을 현존케 하는 작가의 예술행위에는 고도의 수준 높은 정신이 깃든다. 안영일은 순화되고 정제된 물감과 어쩌면 거룩에 가까운 빛을 통해 자신이 생각한 미적 이데아를 대중과 함께 나누길 원한다. 그것은 어느날 망망대해에서 죽음의 문턱에 까지 다가간 놀라운 미적 체험이 야기한 것이다.”   
-졸고, <색과 빛으로 가득 찬 조화의 세계>, 안영일 화집, 11쪽, 갤러리 세솜, 발행, 2019-

 이제 안영일은 자신의 어버지 안승각처럼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가 위에 인용한 글을 쓸 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한한 생명을 타고난 그 역시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가란 무엇인가? 유한한 인생을 통해 무한한 정신적 유산을 남기는 자가 아니던가? 예로부터 스러지지 않는 빛은 예지의 상징으로 많은 화가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안영일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안영일이 남기고 간 적잖은 양의 단색화 작품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중 앞에 소환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높은 미적 이상을 향해 싸우고 노력한 결과물, 즉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발언을 그치지 않고 지속해 나갈 것이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언덕 위로 밀어올리는 운명을 타고난 시지프스처럼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충북문화관 주최 거장의 귀환전 서문, 2021>


   
ㅡㅡㅡㅡㅡ

1)  국전의 제도적 권위와 아카데미시즘에 반발하여 결성된 재야단체로 1957년에 창립하였다. 참여작가는 김서봉, 김영환, 김청관, 김충선, 나병재, 이명의, 이양로, 이수헌, 박서보, 안재후, 장성순, 전상수, 정건모, 조동훈, 하인두(무순) 등이다. 

2)  안승각의 회고에 의하면 아들인 안영일이 맨 처음 국전에 입선한 것은 청주사범학교 졸업반 때였다. 안승각, <나의 인생 나의 그림>, 1978년 4월 충청일보 연재 회고록(날짜 미상). 

3)  안승각은 이 회고의 글에서 1943년 초엽의 어느 날, 모교인 태평양미술학교를 방문하니 서무과 직원으로부터 청주상업학교의 메구로(目黑) 교장이 미술교사를 한 명 추천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마침내 그는 조건이 좋아 귀국을 결심했고 이렇게 해서 청주와 안승각과의 긴 인연이 시작된다.   

4)  2021년 3월 11일부터 6월 6일까지 3개월에 걸친 이 기획전을 통해 조명된 작가들은 김복진을 비롯하여 김주경, 정창섭, 윤형근, 이동훈, 안승각, 윤영자, 이상범, 이응노, 김두환, 장욱진 등등이다. 

5)  충북음성 소재 삼성초등학교 교사인 변영섭은 2002년 6월 3일자에 기고한 한국교육신문의 글에서 스승 안승각의 “심안(心眼)으로 보라”는 가르침을 추억했다. 그는 삼십 여 년 전인 청주교육대학 학생 시절에 장차 화가가 되고자 홀로 미술실에 남아 매일 그림을 열심히 그렸는데, 어느 날 보니 이 문장이 칠판에 써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안승각 선생님이 자기를 격려하기 위해 쓰신 것임을 알고 감동했다는 이야기.  

6)  안승각은 화가보다는 교육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오랜 기간 청주사범과 청주교대에서 교수로 봉직한 그에게는 근현대 한국미술사를 수놓은 많은 작가들을 배출했다. “주로 청주사범학교 시절에 배출한 제자로는 정창섭, 안영일, 엄재원, 이건옥(작고) 등등이 있으며, 다시 이들에게 배운 제자들로는 김재관(엄재원의 제자, 청주고 출신), 김경화, 김홍주(청주사범) 등등이 있다.” 김재관과의 인터뷰, 2021. 9. 9. 

7)  정숙희, 안영일과의 인터뷰. 졸고, “무를 향한 의지-명상과 침묵의 공간/안영일의 작품세계” 중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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