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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의 동화(同化)를 통한 동화(同和) 의지

윤진섭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통한 동화(同和) 의지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2000년 초에 지구촌을 덮친 ‘코로나19’가 쉽게 소멸되지 않을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델타변이가 기승을 부리는가 하면, ‘오미크론’이란 보다 강력한 전염병이 번지면서 이제 팬데믹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방역 당국은 오미크론과 델타변이가 동시에 유행을 할지, 오미크론이 우세종이 될지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인류의 대재앙인 이번 사태를 접하며 자연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 인류가 창안하고 가꾼 문명의 대척점에 있는 자연과 그 크기가 가늠조차 안 되는 우주에 대해 생각하면서, 인간 스스로가 자연과 우주에 대해 발길질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는 자연과 우주의 운행 이법(理法)에 몸을 맡기는 순응주의가 아니라, 거슬리고 역행하는 저항주의적 태도의 발로인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저항의 발길질은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는 인류의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서양에서는 근대성(modernity)의 개념이 발생한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시대와 산업혁명의 시기를 겪으면서 자연 정복과 자연 경시의 풍조가 점차 자리를 잡아 나갔다. 반면에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연 존중과 동화(同化)의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러한 자연관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동양의 전통 산수화이다. 하나의 우주를 상징하는 동양의 산수화에는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이 작게 표현돼 있는데, 이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겸손한 태도가 잘 드러난 사례이다. 이른바 ‘안빈낙도(安貧樂道)’니 ‘안분지족(安分知足)’과 같은 도교적 삶의 태도들은 다 같이 청빈을 삶의 실천윤리로 삼으면서 자연과의 동화(同和)를 꾀한 사례들이다. 


Ⅱ. 
 80년대 초반에 한국의 충남 공주에서 발원한 ‘야투(野投/Yatoo)’의 근본정신이 바로 이러한 자연 동화(同化)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억하건대, 80년대 초반이면 ‘생수’라는 말조차 없었던 시기였다. 산이나 숲에서 흐르는 물을 그냥 마셔도 아무런 탈이 없던 시대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과 인간이 한 몸인 시대, 즉 자연과 인간이 동화(同和)된 시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양의 자연관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 정복이 나은 인간과 자연과의 불화가 아니라, 화합을 이루고 친연(親緣)을 유지하는 동화(同和)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야투’의 정신이 옳았음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4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은 점점 더 황폐해져 갔다. 중금속을 비롯한 환경오염이라든지 오존층의 파괴, 생태계의 위기와 같은 단어들이 점차 신문지상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코로나 19’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대재앙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야투’의 정신은 자연 존중의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해석하자면 자연은 인류의 삶의 근본이므로 자연을 존중하는 사고는 곧 인류의 모태인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야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들(野)’에 몸을 ‘던지는 것(投)’이다. 자연에 몸을 던지되, 오염된 ‘문명의 옷’을 입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그대로의 벌거벗은 몸으로 투신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상징적인 의미지만, 거기에는 자연 동화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Ⅲ. 
 자연미술 그룹 야투(Yatoo)가 2014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Global Nomadic Art Project)는 현장 미술의 성격이 강한 행사다. 올해도 어김없이 열려 자연미술(Jayeonmisul/Nature Art)에 관심이 많은 작가들이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사유한 결과물을 한 자리에 모아 발표한다. 아울러 이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잡은 이 행사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몽골, 중국에서도 자연미술인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 아래 진행되고 있다. 

 멀리 프랑스에서 온 올리비에 위에(Olivier Huet)와 마그릿 노이엔도르프(Margrit Neuendorf)를 포함, 고승현, 고요한, 김가빈, 문수빈, 박주영, 오더, 임혜옥, 정지연, 최용선, 허강, 허진권, 홍지희 등 14명의 참여작가들은 3박 4일간에 걸친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일행은 공주의 금강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신안군에 위치한 증도, 김제의 새만금 등지를 순회하며 자연의 품에 안겨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에 몸을 던지고(野投) 자연과 함께 하는 이 자연동화의 순간이야말로 세계 구원의 첫 발자국임을 몸소 깨닫게 된 것이다. 참으로 코로나 19로 대변되는 이 절체절명의 팬데믹 위기에 대응하는 참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순수한 행위에서는 오늘날 위기의 주범인 문명을 찬양하는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문명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류 발생의 시원인 자연의 소중함을 인류에게 일깨우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자연의 품에 안기려는 이유이다. 


Ⅳ.
 지난 40년 간 야투가 벌여온 이 지난한 작업이 팬데믹 시대를 맞이하여 활짝 개화하고 있다. 생태계의 위기가 운위되는 지금 미술계에서 야투의 활동만큼 그 의미가 부각되는 행사도 드물다. 생수라는 단어도 없었던 80년대 초반에 시작하여 이제 생수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에 인류는 살아가고 있다. '야투'는 그 시기를 고스란히 겪어왔다. 그리고 이제 시대의 증언자로서 자연 위기의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미술사에서 이런 흐름은 이제까지 없었다. 1960-70년대에 미국에서 대지미술(Land Art)이 나타났지만, 부분적으로는 작품의 제작을 위해 자연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반면에 야투의 회원들이 즐겨 하는 것은 맨손으로 자연의 품에 안겨 작은 규모의 작품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들은 큰 범주에서 볼 때 자연의 모방에 가깝다. 새가 티끌을 모아 작은 집을 짓듯이, 어떤 작가는 나뭇가지를 모아 작은 집을 만들었다. 파도가 모래밭에 커다란 자취를 남기는 것처럼, 어떤 작가는 해변에 굴러다니는 통나무를 주워 백사장에 긴 선을 그었다. 나뭇가지를 모아 만든 작은 집이건, 백사장에 남긴 선이건, 언젠가는 파도에 씻겨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연 속에서 작품을 만든 후 현장에 남긴다는  점이다. 작품의 제작 과정은 하나의 퍼포먼스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기록되며, 후에 전시가 되는 것은 대개 물질, 즉 작품보다는 시각적 자료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금전적 가치보다는 아카이브 형태의 자료적 가치를 보다 중시하는 개념미술이나 일시적 행위에 의존하는 퍼포먼스적 산물에 가깝다. 

      
Ⅴ.
 아마도 ‘야투’의 자연존중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사계절연구회’가 벌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일년에 네 번 갖는 자연미술 워크샵일 것이다.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리지도 않고 회원들만 조용히 자연의 품에 안겨 작은 규모의 작업을 행한다. 이들의 태도에서 공통적으로 읽히는 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나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위한 시도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야투의 회원이기도 한 사계절연구회의 작가들은 가급적 자연의 본 모습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돌, 풀, 물, 나뭇가지, 흙 등을 작품 제작에 이용하고 이를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촬영한 후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이들은 마치 70년대의 개념미술가들이 미술의 지나친 상업화에 저항하며 팔 수 없는 개념을 작품화한 것처럼, 자연물을 가지고 잠시 논 후에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냄으로써 ‘물질(objet)’로서의 작품이 판매의 대상이 되는 것에 저항한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반(反)자본주의적 태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나중에 명성이 올라감에 따라 작품이 상업자본화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을지라도 그러한 태도만은 높이 사야 할 줄 믿는다. 사실 한때의 전위가 나중의 후위가 되는 것은 전위미술이 지닌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본에 대한 유일한 견제장치인 전위가 그 비판적 소임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Ⅵ.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공주의 연미산 자락에 위치한 자연미술센터에서 [2021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한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독일, 몽골, 중국에서 제각기 열린 프로젝트의 성과들이 본부인 자연미술센터로 모아져 수합한 결과이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프랑스가 12개국 22인, 독일이 8개국 27인, 몽골이 8개국 24인, 중국이 2개국 4인, 한국이 3개국 14인 등 모두 91인(중복 포함)이다. 전시장의 2개 층을 가득 메운 작품과 사진 및 영상자료들은 이 프로젝트의 참여작가들이 자연이라는 공통된 주제 아래 얼마나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을 했는지 그 열기를 짐작케 한다. 거기에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도 있고 반면에 평범한 듯 하지만 허를 치는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들도 많다. 그 어느 것이든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작품들이란 점에서 주목되는 전시였다. 작품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이를 일일이 기술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작년의 전시에서 보였던 공통점은 보다 확대된 이번 전시에서도 거의 유사하게 느껴져 작년의 도록 서문에 쓴 다음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자연미술가들은 자연을 매개로 자연에 동화되는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는 가운데(자연존중사상) 각자 개성이 있는 예술적 행위를 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공통적 특징을 보인다. 첫째, 서사(narrative)와 스토리의 배제(반(反) 연극성(anti-theatricality), 둘째, 자연물을 통한 간단한 상징과 기호의 제시 및 이를 통한 소통의 의지 표출, 셋째, 문명적 물질의 거부(반(反) 문명), 넷째, 몸을 통한 행위의 원초성 표출, 다섯째, 주거지에로의 회귀 의지, 여섯째, 자연물을 이용한 최소한의 행위 지향, 일곱째, 가공되지 않은 생짜의 자연물을 주재료로 사용 등등이다.”

 40년 전 공주에서 일단의 젊은 작가들에 의해 출범한 ‘야투’가 이제 장년의 연륜을 맞이하면서 세계화를 위한 본격적인 포석을 놓기 시작했다. 글로벌 노마딕 아트 프로젝트(Global Nomadic Art Project/GNAP)는 그 일환이다. 이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연’과 ‘소통’이다.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원리는 바로 자연과의 ‘접촉’과 ‘놀이’이다. 전자는 서구의 모더니즘이 간과한 촉각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후자는 이성보다는 감성과 감각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보다 유연하며 정신적이기보다는 ‘몸’적이다. 그리고 이 원리 속에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고난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가 숨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21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 성과보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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