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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 유정천리(有情千里-세월은 가고 예술은 남는 것

윤진섭



유정천리(有情千里-세월은 가고 예술은 남는 것


윤진섭 미술평론가

 며칠 전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70년대 이벤트의 트리오인 이건용, 김용민, 성능경 중에서 김용민이 타계한 것이다. 이건용이 1942년생, 김용민이 1943년생, 성능경이 1944년생으로 다같이 홍대 회화과 동기생들이다. 이건용과 성능경이 서양화를 전공한 반면, 김용민 혼자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나 전공을 불문하고 전위를 신봉하며, 행위예술의 일종인 이벤트(Event)에 투신했다는 점에서 의식이 서로 통했다.

 이들보다 대략 한 띠(12살)가 어린 나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1975년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이건용 선생을 만났다. 홍대 서양화과에 윤재명이란 경주 출신의 동기생이 있었는데, 그와 나는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모래네 시장 근처에 있는 윤약국 건물 2층에 화실을 차렸다. 등록금이라도 벌어볼 양으로 차렸는데, 학생은 커녕 주인집 코흘리개 딸의 미술선생으로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고 있던 차에, 하루는 윤재명이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윤재명 왈, 이건용 선생님이 이벤트 발표를 하는데 보조자 역할을 부탁하더라. 윤재명은 이건용이 운영하는 동양미술학원의 제자였다. 그래라 하고 나 혼자 주인집 딸을 가르쳤는데, 저녁 때 윤재명이 돌아왔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궁금한 내가 물으니, “내사 마 따귀만 신나게 맞고 안 왔나?” 그러면서 아직도 얼얼한지 볼을 문지르며 실실 웃었다. 사연은 다름과 같다. <ST> 그룹전 개막식 날, 이건용 선생이 이벤트를 대여섯 개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상대방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있었던 것. <이리 오너라>라는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해에 이건용 선생이 모래네 화실로 작품을 하러 방문한 적이 있어서 처음 뵈었다. 그 이듬해인 1976년에는 마침 북아현동에 사는 넷째 누님댁에 기식하게 된 관계로 이대 입구의 동양미술학원에서 굴레방다리 육교 옆 건물로 이사한 ‘이건용화실’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상수동에 있는 학교에 오다가다 들러 현대미술에 대한 귀동냥도 하고 사람도 소개받고 그랬다.
 
 그 당시 이건용 선생은 미술계의 스타였다. 1974년에 열린 파리비엔날레에서 큰 나무둥치를 두부모처럼 생긴 흙더미 위에 올려놓은 작품 <신체항>이 현지 언론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자 덩달아 국내 언론들이 대서특필한 것이다. 1975년 백록화랑에서 이벤트(Event)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며 행위작업을 펼친 그다. 그 여세를 몰아 수 차례의 이벤트를 행하며 ‘Event Logical’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당시는 개념미술이 대세였는데, 전위미술을 추구한 <ST> 그룹의 회원들은 대부분 이를 추구했다. 성능경은 개념미술의 선구적 혜안을 가지고 <신문읽기>(1974-  ) 작업에 몰두했다. 당시 전위미술과 실험미술, 현대미술은 서로 동의어로 통했다. ‘만남의 현상학’으로 잘 알려진 이우환 신드롬과 더불어 조셉 코주스(Joseph Kosuth : 1945-  )의 ‘철학이후의 미술’이 번역돼 <ST> 그룹의 스터디 교재로 사용되었다. 개념미술 이후 현대미술은 대략 ‘논리’로 통했다. 그 작품의 논리가 뭐죠? 누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그렇게 물었다. 그 또한 어느 정도 이건용의 ‘논리적 이벤트(Event Logical)’가 영향을 미친 탓이리라. 

 그 당시 나는 학교 실기실보다는 도서관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타워건물의 4층에 자유열람실이 있어서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골라 수북이 쌓아놓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학교가 파하면 귀가길에 거의 예외 없이 이건용화실에 들렀다. 2층으로 올라가는 목조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왕으로 짠 유리문을 열면, 왼쪽에 짙은 청색의 의자 네 개가 보이고 그 뒤에 ‘3인 이벤트’, ‘4인 이벤트’를 알리는 커다란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3인은 이건용, 김용민, 성능경이고, 4인은 거기에 장석원이 포함된다. 이건용과는 죽마고우와도 같은 사이인 김용민과 성능경은 하루가 멀다 하고 화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면 화실 출입구 반대편의 창문 앞 전용석에 앉은 이건용은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가늘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에 눈을 지긋이 감고 대화에 몰두했다. 이선생이 주로 말하고 두 분은 듣는 편이었다. 1977년 무렵에 이건용과 성능경 선생이 파이프 담배를 핀 적이 있는데, 나도 덩달아 피웠다. 겨울방학이 돼서 시골집에 내려간 어느 날 목에서 싯누런 가래가 올라오며 쓰리듯 아팠다. 상경해서 이건용 선생을 뵙고 사연을 말하니, 파이프를 어떻게 피웠냐고 물었다. 연기를 삼켰다 하니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러면 그렇지. 파이프 담배 연기는 입안에서 굴려야 해. 처칠을 보라고. 이 선생은 내게 13년 연상이지만 마치 친구처럼 격의 없이 대해주었다.  나는 이건용 선생과 함께 1977년 9월 17일 서울화랑에서 <이건용 윤진섭 이벤트, 조용한 미소>전을 열고 이벤트 발표를 했다. 나의 발표는 신체와 사물의 관계를 묻는 <돌과 반죽>, <종이와 물>, <노란 구두> 등 세 개의 간단한 이벤트였다. 이 선생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울타리 작업을 했는데, 화랑 바닥과 천장 사이에 여러 개의 나무를 엮어 세워 주거지를 만드는 내용의 퍼포먼스였다. 그 후 나는 당시 <ST> 그룹의 회장인 이건용 선생의 추천으로 이 그룹의 회원이 되었는데,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경력에 비해 약관 스물 세 살의 학생 신분으로는 매우 과분한 일이었다. 당시 미술계는 미협 회원이 2천 명에, 인사동에 상업화랑이 10여 개에 지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읍 단위 문예회관보다 못한, 2층짜리 목조건물인 미술회관이 조계사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1977년의 어느 날, 겨울방학을 맞아 시골집에 내려가 있던 나는 상경하여 불쑥 이건용 화실에 들렀다. 전화도 귀한 시절이라 연락조차 못 했다. 그랬더니 이건용 선생은 나를 보자 반색을 하며 대뜸 김구림 선생님 댁을 방문하려 하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그 유명한 김구림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니 하며 따라나섰다. 검정색 오버를 입은 이 선생은 선물로 큼지막한 백설탕 한 부대를 샀다.    

 동부이촌동으로 택시를 타고 상가건물에 들어서자 자수학원 안에 김구림 선생의 작업실이 있었다. 나는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곁에서 듣고만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검정색 안경테 너머로 유난히 눈이 반짝거리는 김구림 선생은 한눈에 봐도 매우 예리해 보였다. 담배를 연신 피워대며 다양한 화제로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팔장을 끼고 말할 때 가끔씩 어깨를 으쓱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작업실을 나와서 내가 이건용 선생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젊을 때 스피드광이었는데,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나서 그 후유증으로 그러신다는 거였다. 세월이 흘러 그랬던 선생이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최고의 전위작가가 되었는데, 요즘은 건강이 예전만 같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선생이시여. 부디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나시길. 

 이건용 선생은 불굴의 노력으로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특히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전 이후 갤러리현대를 비롯하여 리안갤러리, 페이스갤러리 북경, 페이스갤러리 서울 등등 유명 화랑에서의 잇단 초대전은 그의 성가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국제미술계의 새로운 평가를 기대하고 있다.  

 성능경 선생의 작품에 대한 진면목이 알려지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공사립미술관의 기획전시 초대가 이어지는 현상도 특기할만 하다. 그러나 이건용과 성능경 두 선생의 성공에 비해 김용민 선생의 불우했던 인생은 그 삶의 도정을 아는 나로선 실로 참담한 심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2014년, 아시아전당 주최의 원로 행위예술가 구술채록 사업의 책임연구원이었던 나는 이승택, 김구림, 이건용, 정강자, 성능경, 장석원, 김복영 등 일곱 작가의 삶과 예술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김용민 선생을 수소문했고, 마침내 서천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를 찾아냈다. 70년대를 통해 독자적인 개념미술 작업이 인정을 받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하여 꽃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발표했던 그다. 그런 그도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과연 사람은 가고 예술만 남는 것인가.



아트인컬처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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