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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재 / 달빛에 물들다-‘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미학

윤진섭



달빛에 물들다-‘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미학




윤진섭 미술평론가


Ⅰ.
 <장날>, <강산적요-스며들다>전으로 잘 알려진 이흥재는 사진 촬영을 전업으로 삼는 전업작가는 아니다. 그는 미술행정에도 밝아 일찍이 전북도립미술관의 관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는 정읍시립미술관의 명예관장으로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십 수년째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전북지역의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전령사의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사진에 관한 한 그는 실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오랜 교사 생활의 중간에 사진을 찍기 시작하여 이제는 취미가 직업이 되고 말았다. 사진을 찍다 보니 예술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의 필요성을 느껴 대학에서 미술을, 대학원에서 불교미술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런데 그의 경우 사진과 학문을 순차적으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다 보니 불상을 찍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학문적 호기심이 생겨 불교미술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불교미술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불상이나 미륵불,사찰에 대한 이해의 도를 높여 보다 깊이감이 있는 대상의 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인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로 인한 대상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해석력의 증대는 결국 이흥재의 사진을 가일층 깊이 있는 세계로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 가령 미륵불이나 불상, 석탑, 왕릉을 소재로 한 사진의 경우, 단순히 밤풍경을 찍은 풍경 사진의 경계를 넘어 그 의미가 문화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장터의 풍경을 찍은 사진으로 시작한 이흥재는 점차 소재의 범위를 넓혀 자신의 관심을 끄는 밤풍경으로 시선이 옮아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인간적 내음을 완전히 탈각시킨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자연, 즉 인간과 대립을 이루는 자연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품고 있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자연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추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인간세에서 점차 자연으로 옮겨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관심이 완전히 인간세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인간세를 원경에 둔 자연의 풍경을 찍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관심은 인간세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분란을 거쳐 성숙하듯이 그의 사진 세계가 더욱 원숙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미술평론가 윤범모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물론 이흥재는 장날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삶이 있는 장터 사진 작업은 그의 특기였다. 장터에 비하여 이번 적요는 정반대의 소재이다. 하지만 극과 극은 통하는가. 장터를 지나 적요의 세계에 이른 이번 발언은 작가의 원숙함과 연결되는 성과일 것이다.” 
-윤범모, <강산적요-스며들다>에 스며들다. 2016년 개인전 서문 중에서


Ⅱ. 
 이흥재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이 장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년시절의 추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라북도 정읍 태생인 그는 어렸을 적 칠보장 부근에서 살았는데, 늘 장터의 풍경을 보고 자란 탓에 장이 추억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훗날 사진을 찍으면서 시골의 장터를 주소재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연유한다. 그의 사진집인 <장날-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시공아트, 2019)은 바로 그가 유년시절에 겪은 전통적인 시골장을 회상하면서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들의 모음집이다. 그 속에 담긴 시골 장터의 평범한 아낙들과 노인들, 팔러 나온 닭과 염소 등 가축들, 노점의 채소와 과일들, 국밥집에서 소주 한 잔에 시름을 달래는 남정네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는 점에서 지대한 관심을 끈다. 이처럼 이흥재의 사진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단순히 사라져 가는 풍속을 담아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날로 세속화, 상업화, 자본화돼 가는 사회에서 이웃의 끈끈한 정을 환기시킨다는 사실에 있다. 말하자면 물질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다움을 지키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를 사진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이흥재는 중요한 경험을 들려준다.  

“순창 동계장의 한 할아버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 이선생, 담배 한 대도 마음이 없으면 안 권하는 것이여!”
그 마음을 렌즈에 붙잡아 두려고 나는 오늘도 장터로 간다.”  
-이흥재, <장날-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시공아트, 2019, 권두언

그렇다. 이흥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마음’인 것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볼 수는 없으나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는 것이 마음이 아니던가? 비록 모르는 사이라도 담배 한 개비, 술 한 잔을 권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던가? 장터는 바로 그러한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며, 그런 연유로 수십 년간 이흥재가 부지런히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댄 곳인 것이다. 말하자면 장터는 한국인의 보편적 심성이 특유의 넉넉한 인심으로 소박하게 발현되는, 아직도 전근대적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의 장터 풍경을 기록하는 사진작가들은 그 말고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흥재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사라져가는 풍물에 대한 기록을 남김과 동시에 이웃들의 ‘마음’을 인문학적인 지평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진이 단순히 다큐멘타리적 시선에서의 기록이 아니라, 인문학적 도야를 거친 해석의 깊이가 더해질 때, 그 의미의 지층이 깊어질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불교미술사를 천착한 이흥재의 교양과 인문학적 수련의 온축이 그의 사진을 마음의 반영물로서의 훈훈한 일화들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Ⅲ. 
 블루(Blue). 우리말로 청색이라고 번역되는 영어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감이 재미있다. 뭔가 깊이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어떤 현상과 관련되거나 자연, 혹은 사물의 표면이 자아내는 느낌에 있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가령, 바다, 하늘, 혹은 분청사기의 색감과 같은 것들이다.

 이를 좀 더 실감나게 비유하자면 예컨대 빨강을 들 수 있다. 빨강에서 깊이감이 느껴질까? 가령 장미나 피, 저녁노을 등등, 빨갛거나 붉은 색감을 지닌 사물이나 현상에서 깊이감을 느끼기는 좀처럼 어렵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조차 수직적 깊이감보다는 수평적 계조(階調/gradation)의 느낌이 더 강하다. 이브 클랭(Yve Kline : 1928-62)이 짙푸른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모노크롬 회화로 규정한 행위는 또 어떤가? 그 말할 수 없이 신비스러운 느낌,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것은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고 하는, 무라카미 류라는 일본작가가 쓴 소설 제목이다. 마치 영도에 가까워지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처럼, 끝없이 투명에 가까워지려는 블루가 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색깔일까?

 사진작가 이흥재가 다루는 것도 바로 이 청색이다. 그의 사진은 결국 자신이 설정한 청색이라는 이상적인 색의 구현을 위하여 끝없이 영도에 가까워지려는 몸부림의 흔적들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오랜 세월 발품을 팔아가며 산야를 헤매는 고난의 발걸음을 지속하지는 못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열정과 호기심, 그리고 이 둘을 추동할 수 있는 에너지의 혼합물인 것이다.  

 그는 마음속에 품은 이상적인 푸른 색을 얻기 위해 초저녁과 동이 틀 무렵인 인시(寅時: 새벽 3-5시)를 기다려 밤하늘의 사진을 찍는다. 그 시각의 밤하늘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여명(黎明)이 오기 직전이다. 가장 진한 어둠에서 서서히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간의 밤 풍경에 매료된 그는 그 투명하도록 푸른색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흥재는 지리산 일대를 다니며 오랜 기간 이 밤하늘 풍경을 소재로 사진을 찍어왔다. 남원을 비롯하여 지리산 일대, 신라시대의 고분들, 그리고 최근에 찍은 가야시대의 고분이 있는 유곡리와 두락리 등등, 밤하늘의 풍경을 담을 수 있는 곳이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이처럼 푸른 색에 대한 탐구는 다양한 구도를 낳았다. 가령 지리산 정령치에서 바라본 남원의 풍경은 동양화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평원법에 해당하는 구도이다. 화면의 하단부에 남원시의 전경이 펼쳐져 있는데, 저 멀리 반짝이는 시내의 불빛과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에서 방출되는 빛이 뒤엉켜 여러 무리의 빛더미를 이룬 가운데, 그 위로 드넓은 밤하늘의 푸른 빛 사이사이에 반짝이는 별들이 정겹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이흥재의 사진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역동적인 동세를 느끼게 하는 구도들이다. 이러한 류의 작품들에는 푸른 빛을 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배경으로 커다랗게 클로즈업된 소나무를 앵글에 담은 <지리산/남원-천년송> 연작들이 있다. 화면을 온통 다 차지할 만큼 크게 부각된 소나무는 신령한 영기(靈氣)가 느껴질 정도로 생명감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지리산/남원-정령치> 연작은 평원법의 구도를 취하되, 산의 능선들이 겹쳐지면서 푸른색의 계조(gradation)가 잘 나타난 작품들이다.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들은 투명한 푸른 색을 어떻게 카메라로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작가의 고뇌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런저런 시도를 한 흔적들이 작품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우선 무엇보다 지리산 정령치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하더라도 뷰파인더 속에서 대상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 결과, 구도 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화면에서 하늘이 차지하는 면적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가장 극심한 경우에는 하늘 전체를 화면 속에 다 집어넣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하단부의 삼분지 일 이하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이흥재의 의도는 어떻게 하면 푸른 색을 화면에서 강조하느냐 하는 문제에 집약돼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소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흥재의 관심사는 ‘인간’에서 ‘풍경’으로 옮겨갔다. 풍경을 자연의 일부로 해석할 때, 이는 다름 아닌 ‘서사’에서 점차 그 서사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에로 그의 관심이 옮겨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밤풍경 사진의 출발을 신라시대의 왕릉을 촬영하는 일로부터 시작했다. 그때가 2018년, <강산적요-스며들다>전이 끝난 후였다. 이때 찍은 사진들은 별들이 빛나는 푸른 밤하늘을 배경으로 둥두렷이 솟아있는 왕릉의 검은 실루엣을 강조하고 있다. 둥근 봉분은 그 안에 누워있을 왕의 긴 서사를 함축하고 있다. 교교할 정도로 푸른 밤하늘에 외롭게 떠 있는 초승달은 온통 검게 표현된 둥근 봉분 너머에서 고독하게 긴 시간을 견딘 왕의 슬픈 영혼의 거소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한 장의 사진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명분을 잃게 된다. 예술이 예술인 이유는 그것이 관객에게 상상할 수 있는 자유, 나아가서는 대상을 보다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흥재는 왕릉의 주인공인 망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해질무렵 현장에 도착하니 이제 막 블루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는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밤에 가야 한다는 굳은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블루 왕릉 연작은 그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Ⅴ.
 2020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월광산수>전에 앞서 2016년에서 18년에 이르는 기간에 이흥재는 <강산적요(江山寂寥)-스며들다>전을 두 차례 열었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그 가운데서도 특히 맑고 투명한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그의 사진들은 흑백이건 칼라건 간에 정중동의 미학을 잘 담아내고 있다. 부분이 전체를 말하고, 순간이 영원을 말하는 중의법이 그의 이 시기 사진의 요체다. 문제는 그 순간을 카메라의 셔터로 어떻게 포착하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흥재의 노련한 테크닉이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이 <월광산수>전 출품작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작품은 그것이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이건, 햇살에 반짝이는 연못의 윤슬이건 간에 움직이는 사물을 포착하여 ‘적요의 미’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미세한 모래를 떠나보냄(動)과 동시에 멈추게 하는(靜) 고난도의 기교를 통해 ‘적요’의 순간을 포착, 하나의 이미지로 남겨야 하는 것이다.  그럴진대, 이흥재가 자신의 작품에 붙인 ‘고요하다’,‘사라지다’, ‘멈추어보다’, ‘솟아나다’와 같은 동사들은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스며듦’을 비유한 말이다. 즉,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시선의 개입을 이름이다. 

 이흥재는 장날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은 물론, 이번의 <남원, 달빛에 물들다>전의 출품작들을 특수 제작한 전주 한지에 인화했다. 전주 한지는 프린트 잉크를 머금는 특유의 성질로 인해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흥재는 화려하거나 강렬한 맛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은은한 느낌을 제대로 내기 때문에 이 종이를 보다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고향인 정읍을 비롯하여 전주 등지를 두루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남원에서 지리산 쪽 경상남도 함양에 가까운 인월과 운봉 지역에 산재한 가야시대 고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불상들과 조선시대의 장승이 주소재이다. 그는 부분을 통해 전체를 말하는 방법을 일찍이 장날 풍경 사진을 찍으며 익혔는데, 예컨대 갈라진 노파의 손을 통해 인생의 신산(辛酸)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이흥재는 시리도록 푸른 밤 풍경을 통해 자연이 열어 보이는 신비를 카메라의 렌즈로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흥재의 이번 초대전은 그에게 하나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3여 년에 달하는 사진작가로서의 연륜에 걸맞는 제2의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소재로 한 작업에서 자연으로 소재의 폭을 넓혀 온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로운 소재의 개발은 물론, 그동안 심취해 온 세계에 대해 차분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만큼 그의 ‘블루의 미학’은 어감이 갖는 깊이만큼이나 스펙트럼이 넓고 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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