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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 그 유장한 인생의 노래

윤진섭




김영자, 그 유장한 인생의 노래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1967년 12월 11일, 한국현대미술사의 중요한 전시로 기록된 [청년작가연립전]의 오프닝 날 벌어진 해프닝 [가두시위]와, 사흘 뒤에 열린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에 ‘무’동인 멤버로 참여한 김영자가 이제 화단의 원로작가가 돼 뜻깊은 초대전을 갖는다. 이보다 앞서 수많은 개인전을 가졌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번 전시는 그 어느 때 보다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전시가 삶을 되돌아보는 일종의 ‘회고’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출품작들은 근작이 중심이 되고 있으나, 이 작품들 속에는 그동안 60여 년에 걸쳐 실험해 온 다양한 내용과 방법론들이 집약돼 있어 눈길을 끈다.  

 김영자는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주목을 끄는 입체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대중이 즐겨 사용한 UN 팔각성냥을 크게 확대한 후, “담배 피우실 분은 이 성냥을 이용하십시오”라는 문구를 부착한 <성냥111>(1967)을 국립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발표한 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정강자, 심선희의 입체작품과 함께 팝아트의 선구적 사례로 인정받아 미술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Ⅱ.
 지난 60 여 년에 걸쳐 김영자가 캔버스에 표현한 세계는 꿈과 현실을 둘러싼 길항(拮抗)의 문제였다. 현실이 고달프고 어려울수록 캔버스 위에 펼쳐진 세계는 그 반대급부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들로 가득 찼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흔히 그의 그림을 샤갈과 연결시키는 지점이다. 물론 작가 자신도 인정하는 것처럼 작업 초기에 샤갈에 이끌린 것은 사실이나,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독자적인 언어들이 구축되면서 점차 샤갈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김영자의 작품세계가 샤갈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영자는 샤갈이 흔히 구사하는 허공에 뜬 인물들을 그리지 않는다. 즉, 샤갈의 유목적이며 유랑적인 삶에서 비롯된 탈현실 내지는 초현실과는 달리, 김영자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두 발을 땅에 굳건히 딛고 있는 현실적 존재로 묘사된다. 두 번째,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는 샤갈 특유의 푸른 색조를 김영자의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작가 자신의 말을 빌리면 80년대에 푸른 색조로 그린 적이 있다고 하나, 수재(水災)로 인해 작품이 멸실된 까닭에 현재로서는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1980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이르는 일부 작품들을 통해 유추할 때, 푸른색조에서 녹색조로 이어지는 색의 연계는 샤갈 영향의 흔적을 암시한다. 

 김영자의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황색과 연한 녹색조의 색채감과 주대종속의 관계를 지닌 등장인물들의 묘사이다. 옛날의 중국이나 한국의 고대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이 기법은 중요한 인물은 크게 그리고 부수적인 인물들은 작게 그리는 방식인데, 이러한 복고적 화풍이 김영자의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매우 특이하고 흥미를 자아내는 부분이다. 또한 집이나 기물들이 직선적이지 않고 대부분 곡선적으로 처리돼 있는데, 이는 40대 후반의 안과적 외상과 관련이 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형성된 김영자 특유의 화풍은 80년대 이후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소재에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김영자의 그림은 유럽이나 중남미, 혹은 터어키 풍의 몽환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데, 이는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작가의 열망을 담고 있다. 인생은 희뿌연 황사 바람을 거슬러 가는 것처럼 고달프니, 낯선 이국(異國)의 여행을 통해 한 사람의 에뜨랑제(이방인)로서 집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 것 아닌가. 이때 집 밖을 나가니 오히려 집이 보이나, 그것을 그리고 싶지는 않다는 역설이 나타나는 심리적 배경도 흥미롭다. 


Ⅲ.
 꽃길이다. 흰 벽에 빨간 지붕의 유럽풍 집들이 빼곡한 거리에 꽃들이 좌악 깔렸다. 이 무슨 난데없는 축복인가. 사람들은 집 모퉁이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다. 또 하나의 대작은 거리에 서 사람이 사라진,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풍경을 담고 있다. 이 무슨 변화인가? 김영자가 인생 팔십이 넘어 맞이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다음에 보여줄 세계는? 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가뜩이나 3D 입체작업을 비롯하여 철사로 된 옷걸이를 구부려 일상적 풍경을 제시해온 작가가 아닌가? 이 대목에서는 60년대 후반의 팝아트와 다시 연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상의 만물은 순환한다. 딱딱한 것은 부드러워 지고, 그것은 다시 딱딱해지면서 사라진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김영자는 무려 60년대 이르는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변화가 없는 듯 하면서 있는 변화, 김영자는 그 유장한 인생의 노래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2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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