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희경 / 초월과 환희의 미학

윤진섭




초월과 환희의 미학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조각가 김희경이 관심을 갖는 소재는 자연이다. 자연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이며 근원적인 생명의 본향이자 모태인 자연에 대해 김희경이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일은 따라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김희경 한지작업의 소재가 된 꽃이나 나뭇잎의 형태, 잔잔한 호수의 물결 등등은 바로 자연에서 온 것들이다. 자연에 대한 예민한 촉수를 지닌 김희경은 일상 속에서 본 사물들에서 받은 영감을 자신의 고유한 예술적 양식(樣式)으로 풀어나간다. 

 20009년부터 시작한 한지작업은 그러한 소재들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자신의 독자적인 언어로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기실 김희경에게 있어서 이 한지작업은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를 수 있을 만큼 매우 중요한 전기(轉機)였다. 그 이후 약 10여 년에 걸친 한지작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국제경쟁력을 갖춘 작가 내지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예술적 보편성을 지닌 작가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김희경은 다수의 해외 아트페어를 비롯하여 유럽, 일본, 미국, 이태리, 독일 등 연이은 해외전시를 통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작가는 꿈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욕망의 화신과도 같은 작가들은 따라서 오늘의 모습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자신을 마음속에 그리며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이겨나간다. 만일 미래에 대한 미전이 없다면 그토록 극심한 창조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김희경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삶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좌절보다는 오히려 극복하고 승화시키는 쪽을 택했다. 


 “어느 날 작업에 몰입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제어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 순간부터 감정을 절제하면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김희경, 작업노트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고자 하는 몸짓이 아니겠는가? 소위 말하는 낭만주의적 감정이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리하여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보고 이를 명징한 조형언어로 떠낼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태도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김희경의 이러한 이성적 각성은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그녀가 사용하는 재료나 주제를 특정한 것들에 국한시키는 단순화의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2009년에 비롯된 한지와의 만남은 그 이전, 그러니까 1983년부터 사용한 돌, 브론즈, 철, 구리 등등 잡다한 조각의 재료들에서 벗어나 오직 한지 하나로 국한시키는 단일화 현상을 가져왔다. 한지의 물성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와 함께 꽃, 물결, 나뭇잎 등등 자연적 소재의 도입이 이 시기에 이루어지면서 김희경의 조각은 일대 도약의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된다. 사실 오늘날 조각가로서 김희경의 존재가 화단에 두드러지게 된 계기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한지작업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을 일러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른바 ‘미적 모더니티(aesthetic modernity)’의 발현이 김희경의 조각에서 서서히 이루어지면서 어떤 근본적인 질적 내지는 내용적 변화가 찾아왔다고 하는 편이 보다 온당한 지적일 것이다. 이는 그 이전, 그러니까 <영혼의 나무(Soul-Tree)>(1991-2008)에서 그녀가 추구해 온 조각의 태도가 다소 자연주의적 시각을 보이고 있었다면, 그 반대급부로 터져나온 한지작업에서는 자연을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형태소들이 점차 사라지면서 원과 같은 추상적 원소로의 환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것이 바로 김희경 조각에서 나타난 미적 모더니티의 개념인 것이며, 동시에 김희경의 조각을 모더니즘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 있는 비평적 판단기준(critical criterion)이 된다. 


Ⅱ.
 그렇다면 2008년 이후 김희경이 제작한 <Bloom> 연작은 과연 어떻게 전개돼왔으며 그 핵심은 과연 무엇인가? 이 점을 살펴보는 것은 향후 전개될 그녀의 작업과 관련시켜볼 때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미래적 비전 때문이다. 내가 앞에서 김희경을 가리켜 “국제경쟁력을 갖춘 작가 내지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예술적 보편성을 지닌 작가”로 지칭했을 때 이 말이 공허한 수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피나는 각고의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술은 아름다우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예술계는 정글처럼 살벌하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냉철한 현실인식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며, 예술에 대한 강인한 도전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이 일궈놓은 땅에 더부살이하는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김희경의 작업에서 많은 가능성을 본다. 우선 그녀가 만드는 작품이 과연 전통적인 조각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김희경의 작업을 회화와 조각의 접경, 즉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제3의 영역’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이를 보다 섬세하게 말하자면 ‘확장된 오브제’로서의 예술적 사물에 속하는 어떤 것으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속한 예술적 가계(家系)를 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이루어진, 즉 단색화를 포함하는 한지작업의 맥락에서 파악할 때, 그의 작업이 한국 현대미술의 고질적인 콤플렉스인 서구종속적 투망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미적 독자성을 갖게 될 줄 믿는다. 그러할 때, 김희경의 작품세계는 그간 서구와 비서구, 혹은 서양과 동양이라고 하는 기존의 이분법적 문화지형이 일궈놓은 불균형한 관계를 평평한 땅으로 바꾸는 정지작업(整地作業)의 일환으로써 새롭게 재해석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것은 결국 한국미술의 비전과 관계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Ⅲ. 
 궁극적으로 김희경의 작업은 생명이 가져다주는 ‘환희’에 대한 노래이다. 이것이 그녀가 자신의 작품에 ‘(꽃이) 피어나다’는 의미에서 <Bloom>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희경은 아주 중요한 내면의 통찰을 보여주는 작업노트를 남기고 있어 다소 길지만 여기에 인용하고자 한다. 

 “생명이 피어나는 기운, 그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각인되어/그 에너지의 파장 안에 나 자신의 모든 회한과 아픔을 맡긴다//그 파장은 많은 사람들과 사물로 이어지고 나아가서는 광활한 대지와 깊은 바다로 번지며/일출의 찬란한 파장과도 맞닿게 된다//대자연의 숨결과 나 자신이 합일되는 순간/나의 몸과 영혼은 그 파장과 어우러져 움직이기 시작하면서/아름다운 춤이 된다/그 순간, 너와 내가 아무런 구분이 없다/모두가 하나다/완전한 평화다//그 안에서의 자유로운 나의 춤은/‘Bloom’이라는 흔적으로 남아 그 파장을 전파한다”
 -2011년 8월 김희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맨 마지막에 쓴 “그 파장을 전파한다”는 대목이다. 이 긴 문장을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즉, 작가는 어느 날 한 송이 꽃에서 생명력을 느꼈는데, 그 기운의 에너지가 뿜어내는 파장이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들로 이어지고 넓은 대지와 깊은 바다, 즉 자연으로 이어지며, 그것은 돌고 돌아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과 합일이 된다. 대자연과 나 자신이 합일을 이루는 순간, 비로소 춤이 터져 나오게 되는데 그 순간 너와 나를 가르던 울타리가 허물어지면서 아무런 구분이 없는 대동(大同)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자연, 사람, 사물이 모여 모두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다.   

 이 대동과 평화의 세계가 지닌 가치가 바로 미적 보편성이다. 그것은 좁은 지역성(locality)을 초월한 가치이며, 세계의 인종과 종교, 그리고 지역을 초월하여 만인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 감응시키고 작품을 통해 ‘환희’를 제공하는 지고의 높은 가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김희경이 미적 보편성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작업실 근처에 있는 호숫가를 산책하면서 흔들리는 수면의 잔물결에 시선이 머물렀고 문득 내면의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위태롭고 불안한 현실의 너머 영혼의 세계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Meditation’ 연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자연을 멀리서 바라보는 과정에서 나의 시야가 확장되고 현실 너머의 초월적인 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김희경, 작업노트, 2015

 그렇다. 김희경의 <Bloom> 연작과 <Meditation> 연작은 ‘초월’의 미학인 것이다. 그것들은 복잡하고 ‘위태롭고 불안한 현실’을 초월하여 영혼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들은 자연을 관찰하는 과정을 거쳐 언제부턴가 자연을 넘어서기(초월) 시작했다. 꽃과 나뭇잎, 그리고 물결의 형태는 보다 단순화되고, 그럼으로써 자연적 요소를 함축한 형태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9년경 김희경의 한지작업은 그렇게 탄생했다. 

 <Bloom> 연작은 궁극적으로 원형과 방형(方形)이 벌이는 다양한 시각적 변주다. 입체인 이것들은 부조적 속성이 강하지만, 그보다는 원이나 사각형과 같은 형태가 먼저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관객들은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점차 이 작품들이 한지로 돼 있으며, 그 위에 단색조의 색을 칠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진주색(pearl)이 섞인 적, 청, 황, 흑, 백 등 오방색을 기조로 한 색들은 전체적으로 균질하게 칠해진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색의 계조(gradation)를 보이고 있다. 색은 중심에서 밖으로 벗어날수록 처음에는 진했다가 점차 연해진다.   

 김희경은 초월과 빛의 파장에 대한 상징으로써 이 색의 계조를 사용하고 있다. 색은 진하게 표현된 중심에서 벗어날수록 점차 연해지며, 궁극적으로는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짜 사라진 것일까? 우주를 상징하는 원과 바다나 빛 에너지의 파장을 상징하는 물결의 형태는 과연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일점소실에 의한 원근법의 소산인 서구의 모더니티는 빛의 파동처럼 하나의 방향으로 퍼져나가지만, 동양의 주역사상은 다시 돌아오는 순환의 체계를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의 독자적인 우주관이며 자연관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희경의 노트를 다시 들여다보자. 

 “대자연의 숨결과 나 자신이 합일되는 순간/나의 몸과 영혼은 그 파장과 어우러져 움직이기 시작하면서/아름다운 춤이 된다/그 순간, 너와 내가 아무런 구분이 없다/모두가 하나다/완전한 평화다//그 안에서의 자유로운 나의 춤은/‘Bloom’이라는 흔적으로 남아 그 파장을 전파한다”

 어떤가? 다시 만나고 있지 아니한가? 자연과 내가 만나고, 너와 내가 만나고, 그렇게 함으로써 너와 내가 아무런 구분이 없는 대동의 세계를 낳고 있지 아니한가? 완전한 평화가 이루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할 때 우리에게 환희가 찾아오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소위 말하는 미적 보편성이 아니겠는가?   


1차 출처 : 미술평단 2021년 가을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