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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의 미술계와 방근택의 활동

윤진섭



1970-80년대의 미술계와 방근택의 활동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내가 미술평론가 방근택(1929-1992) 선생 1) 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1972년 당시 나는 수원에 있는 수성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당시 수원시의 중심인 팔달문 뒤편에 있던 영동시장에는 개천을 끼고 고서점들이 즐비했다. 미술부 활동을 하는 한편, 일찍부터 문학에 뜻이 있던 나는 서점가를 돌며 관심이 가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사상계를 비롯하여 신동아2), 한국단편문학전집, 각종 철학, 역사서 등등 묵은 잡지와 책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독파해 나갔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러던 차에, 방근택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현대미술과 엥포르멜 회화>는 1965년에 동양출판사가 펴낸 현대사상강좌 5권에 수록돼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게 방근택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 1975년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에 진학한 나는 대학 3학년 때인 1977년에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5회 앙데팡당]전에 <어법>이란 제목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에 대한 방근택의 짤막한 평이 <현대예술>지에 나온 걸 보고 매우 기뻤던 기억이 난다. 3) 그는 당시 이 잡지의 주간이었는데, [앙데팡당], [에꼴드서울], [서울70]을 통틀어 특집으로 다뤘다.   

 내가 방근택을 직접 만난 것은 같은 해에 견지화랑에서 열린 [제6회 ST]전(1977. 10. 25-31)에서 였다. 그보다 약 4개월 앞서 열린 [제6회 앙데팡당]전(1977. 6. 25-24)에서 12쪽 패널로 된 퍼포먼스 사진 시리즈 작품으로 주목을 받은 나는 석 달 뒤인 9월 17일 오후 3시에 당시 명성이 하늘을 찌르던 <ST> 그룹의 회장 이건용(1942-  )과 함께 <조용한 미소>라는 타이틀로 안국동 사거리 부근에 있는 서울화랑에서 2인 이벤트(Event) 쇼를 벌였다. 이 두 전시를 계기로 나는 이건용의 추천에 의해 ST그룹에 가입을 했는데, 그것은 학생 신분의 내게는 매우 과분한 파격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해서 당시만 해도 명성이 높은 전위미술 단체인 ST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조계사 맞은 편에 있던 견지화랑에서 [제6회 ST] 그룹전이 열렸다. 견지화랑은 1970년에 명동화랑을 열고 초대 화랑협회장을 역임한 고(故) 김문호(1930-1982)가 1977년 재기를 다짐하며 연 화랑이었다. 자수공예가 한상수(여/1935-2016)와 동업이어서 화랑 입구에 자수연구소를 겸한 상점이 있었다. 나는 이 전시의 개막식에서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이란 이벤트를 선보였는데, 관객참여적이며 유목적인 성격의 작품이었다. 

 전시 중인 어느 날 방근택이 예고 없이 전시장에 들렀다. 나는 카리스마를 강하게 풍기는 인상이 범상치 않게 생각돼 마침 옆에 있는 선배 작가 강창열에게 누군가고 물었다. ‘미술평론가 방근택 선생’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검정색 정장 차림에 머리가 약간 장발인 방근택은 작품들을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마침 전시장 안에는 친분이 있는 회원이 없었던 탓인지 그는 전시장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쉽게도 이 전시에 대한 그의 리뷰는 없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근택과 대면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것은 1990년 이었다. 세월은 견지화랑에서의 첫 만남 이후 무려 13년이 흘러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작가에서 미술평론가로 변해 있었다. 방근택은 1990년 자하문미술관(관장 박신의)의 개관전인 [’90 메시지]전이 열리고 있던 어느 날 전시와는 무관하게 일반 관객을 상대로 한 강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현대미술에 관한 강연을 하러 미술관에 들렀다. 4) 그날 나는 조덕현, 이길래, 박기원 등등 각종 민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가들을 초청한 이 전시의 도록에 서문을 쓴 관계로 저녁식사 자리에 함께 초대를 받았다. 자하문미술관은 자하문 호텔을 운영하고 있던 조 회장(성명 미상, 건축가/설치미술가 조계형의 부친, 작고)이 같은 건물 지하에 문을 연 것이다. 조회장은 미술관에서 가까운 게요리 전문점 북해도에 방선생과 나를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을 했다. 방선생과 조회장 사이에 술이 몇 순배 돌자 둘은 영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영화라니! 대화는 끝이 없었고 내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를 더해갔다. 


Ⅱ. 
 원래 방근택은 영화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1956년 육군 대위로 제대한 그는 “1957년 초여름 부산에서 서울로 이주, 범한 영화사에서 대본 번역과 필름 수입 통관 업무 5) ”를 맡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이 59년도까지 3년간 이어졌다. 그러니까 조회장과 나눈 영화에 관한 대화는 이때 얻은 체험과 산지식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1949년 부산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 철학을 전공한 방근택이 1950년 9월 육군종합학교 사관후보생 7기로 군에 입대, 광주육군보병학교 통신학 교관(1952-6)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훗날 한국현대미술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는 ‘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 전시명은 [현대]전)’ 회원들과의 만남을 잉태하고 있었음을 아마 당시만 해도 방근택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1955년, ROTC 간부후보생 교육을 위해 입교한 홍익대 미대 출신의 박서보와 이수헌을 만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박서보와의 인연은 군 제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애증의 관계가 이 두 사람을 피해 가지는 못한 사실을 70년대와 80년대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1950년대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는 현대미협과 악뛰엘을 둘러싼 이야기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닌 까닭에 이 점에 대해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시간은 훌쩍 뛰어넘어 이 글의 주제인 70-80년대로 넘어간다. 
 

Ⅲ. 
 한국 현대미술사상, 본격적인 전위미술의 출발을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의 발족으로 보는 미술사학계의 시각은 보편적이다. 이 협회가 전시회를 열고 안국동에 있는 이봉상미술연구소를 중심으로 교류를 하던 시점(1957)에 방근택은 문학평론가인 이어령과의 만남에 이어 화가인 박서보와 이수헌 등을 다시 만났다. 이 만남은 방근택의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 인연으로 인하여 방근택은 미술평론가로 데뷔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박서보의 도움이 컸다. 박서보는 1958년 2월에 방근택이 쓴 <조르쥬 루오의 생애와 예술>이란 글을 연합신문에 싣도록 주선했다. 6)

 이어서 쓴 첫 평론 <회화의 현대화 문제>(1958, 날짜미상, 연합신문)를 필두로 1957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전개된 한국 앵포르멜 운동에 있어서 열렬한 이론적 지지자의 역할을 해 나갔다. 이 시기가 방근택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생산성이 큰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굴과 전체적인 인상에서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는 복수의 증언은 당시 방근택의 비평이 갖는 높은 위상을 말해준다. 방근택은 서양의 각종 서적을 비롯하여 ‘미술수첩’과 ‘미즈에’ 등등 일본 서적을 입수, 최신의 정보를 얻어 이를 미술 현장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7) 본격적으로 앵포르멜의 화풍이 나타나기 시작한 제4회 [현대]전의 전평으로 쓴 ‘화단의 새로운 세력-’현대‘전의 작가, 작품 단평’(1958)에 이어 방근택은 의욕적으로 김창열, 나병재, 박서보, 이양노, 장성순, 하인두 등등 현대전 멤버들의 화단활동을 지지해 나갔다. 당시 60년미협전을 비롯하여 제6회 현대전, 기타 여러 행사에서 찍은 단체사진을 보면 방근택은 늘 중앙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존재의 위상학은 매우 암시적인 것으로 흔히 연령이나 서클 내의 위상에 따라 암묵적으로 위치가 정해짐을 말해준다. 박서보 또한 이 점에 있어서 마찬가지다. 내가 본 어떤 사진에서 박서보는 기라성같은 스승 세대의 작가들 사이에서 중심에 서 있었다.  


Ⅳ. 
 1950-60년대에 벌어진 화단과 평단 활동에서 주목받는 위치에 있던 방근택에게 있어서 7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저한 위상의 하락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8년 9월, 한국미술평론인협회의 간사를 필두로 이듬해 11월 현대미협 5회전의 선언문 작성, 1961년 4월 제2회 파리비엔날레 참가작가 선정 심사위원, 1965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출범에 참여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벌이던 방근택이 70년대에 접어들자 급격히 위축되게 된 것이다.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가 연루된 두 개의 큰 사건 때문이다. 하나는 민족기록화전 필화사건1967년 8월)9)이며, 다른 하나는 반공법 위반 사건(1969)10) 이다. 특히 후자는 본업인 평론활동을 법적으로 제지당함으로써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본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꼼꼼한 자료통인데다 강직한 성품에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비평가인 방근택은 바로 그런 성향 때문에 특정한 미술인들로부터 질시를 받았다. 5, 60년대의 비정형 회화(Informel) 운동시기에도 피차 강한 개성들이 부딪치며 내는 강렬한 스파크가 조직에 균열을 이루면서 친교 관계에 수많은 알력과 갈등이 나타났다. 가령, 방근택은 훗날 쓴 회고록에서 자신이 작가들에게 비정형 회화 이론을 ‘어드바이스’ 내지는 ‘격려’ 운운 했는데11), 이런 그의 입장은 작가들의 진술과 상충되면서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하는 사실을 둘러싼 의문을 낳았다. 한국미술의 자생성과 해외미술 사조의 수용을 둘러싼 엇갈린 견해는 박서보, 윤명로, 서승원, 오광수 등 4인이 나눈 좌담 <체험적 한국 현대미술상(像)-한국 현대미술 태동기의 표면과 이면(특집/한국 현대미술 40년, 그 궤적과 전망), <한국미술> 창간호(1997년 4월)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사건은 60년대 후반에 발생했지만 정작 그 여파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였다. 내가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70년대의 방근택은 미술인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방근택은 전후 명동시대에 이어령을 비롯하여 송기동 등 문학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인맥은 훗날 문학사상을 비롯하여 현대문학, 시문학, 동서문학, 일요신문 등 문예지나 저널에 미술평론에 관한 글을 연재하는 바탕이 되었다. 보안법 위반으로 3년간이나 집필이 금지당한 상황에서 더 이상 미술계의 활동은 어려웠다. 결국 방근택이 찾은 길은 자연히 연구와 독서, 세계미술사연표 정리 등 미래의 웅비를 위한 나름의 준비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70년대의 비평공간은 방근택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를 김인환, 오광수, 이일이 1970년대 초반에 ‘AG’와 동지적 끈끈함을 유지하며 선언문 작성을 비롯하여 기관지 <AG>에 글을 기고한 것이라든지, 당시 전위그룹의 선두에 섰던 <ST> 그룹의 이론적 선도자로서 김복영이 갖는 위상에 비교하면 실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게 한다. 방근택은 화려한 견장이 뜯겨나간 힘없는 장수에 불과했다12). 자택의 서재에 장기간 칩거하며 애써 번역해 남의 이름으로 책을 내는 수모도 감내해야만 했다. 아마도 매문에서 오는 수치심이 자존심 강한 방근택의 가슴 밑바닥에 치유될 수 없는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을 지도 모른다. 90년대 초반, 그러니까 작고하기 이태 전에 내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나는 그의 얼굴에서 만사를 초월한 듯한 허허로운 인상을 받았다. 병색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운 얼굴에서 예전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한 평생 학문과 비평을 갈고 닦은 경륜에서 오는 자존심과 결기는 여전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칼칼한 성격도 그러했으리라.
 70년대의 비평적 상황에 대해서는 내가 쓴 기왕의 글이 있기에 여기에 전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70년대의 비평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미학 내지는 미술사를 전공하고 귀국한 이일, 유준상, 임영방, 정병관, 박래경, 유근준 등 유학파 비평가들과 국내에서 미술을 비롯하여 미학,미술사, 문학, 철학 등 인문학을 전공한 이구열, 오광수, 김인환, 김복영, 김윤순, 원동석, 박용숙, 김해성 등 국내파 비평가들이 주도하였다. 70년대의 비평은 겉으로는 모더니즘 비평이 강세를 이루며 화단을 주도해 나갔지만, 그 이면에는 80년대를 점유한 민중미술 비평이 잠재해 있었다. 김윤수의 <한국회화사>(한국일보사, 1975)를 비롯하여 원동석의 <수화 김환기론>(1977, 계간미술 여름호),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1975, 원광문화 제2집) 등은 민중적 시각에서 미술을 해석, 비평한 이 시기의 대표적 문헌들이다.” 13)

 그러나 비록 현장비평가로서의 위상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방근택은 이른바 모더니즘과 민중민족미술이 대립을 이루는 80년대 공간에서 집필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80년 8월 2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984년까지 지속했다. 반공법 위반이 가져다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때로는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흘려 쓴 글씨로 당대의 미술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지식의 흡수를 통해 시대를 관류하는 정신을 살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0년 9월에 ‘종말로서의 예술’을 하나의 화두로 일기에 기록한 이후, 그 징후와 실체를 폭넓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말년에 이를수록 방근택은 저술에 점점 더 집착했다. 그 결과물이 1985년에 미술연감사(대표 : 이재운)에서 나온 <세계미술사전> 권1이다. 이 지난한 작업은 1987년에 <세계미술대사전> 1, 2, 3권 완본으로 한국미술연감사에서 출판되었다. 제목만 세계미술사였지 실제로는 서양미술사였다. 

 이러한 저술 작업은 1950년대부터 수십년 간에 걸쳐 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사회 등 각 분야별 사건을 연표로 정리해 둔 저본을 바탕으로 삼은 한 비평가의 지적 고뇌가 담긴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방근택은 그 외에도 루이스 A. 코저의 저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태창문화사, 1980)를 비롯하여 케네스 클라크의 <예술과 문명>(문예출판사, 1983) 등등 번역서를 필두로 자신의 저서인 <미술가가 되려면>(태광문화사, 1986)을 상재했다. 

 또한 비정형 회화를 둘러싼 초창기 한국 전위미술을 증언하는 일련의 회고록을 발표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 일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공간, 미술평단, 미술세계 등 미술잡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991년 3월부터 회고록 ‘한국현대미술의 출발-그 비판적 회고>(1991-2)를 총 6회에 걸쳐 미술세계에 연재하고 같은 해 하반기에 간암으로 별세하였다. 14)


<제주문화재단 주최, 방근택 작고 30주년 기념세미나 발제문>  
  
      
    ㅡㅡㅡㅡㅡ
1)  이하 이 글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 대한 존칭을 생략함. 

2) 내가 하인두의 작품 <태극기송(頌>을 둘러싼 미술평론가 오광수와 하인두의 표절 논쟁을 접한 것도 ‘신동아’(1972년 5, 6, 8월 호)를 통해서 였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복기의 논문 <한국미술의 ‘영향-모방-표절’ 논쟁사>를 참고할 것. 
https://blog.naver.com/boggi04/220082845766 (2022.04.29)

3) 불과 5줄 정도에 불과한 짧은 글에서 방근택은 언어의 문제를 다룬 나의 작품에 대해 비평을 했다. 그의 글은 현학적이며 읽기에 난삽한 것이 특징이다. 방근택의 글은 나의 작품에 대한 첫 비평이었다.  
  “윤진섭(尹晋燮)의 어법(語法)이 의미론적인 시화(詩畵)와 같은 단어의 뜻의 음성학적인 부차적인 희화(戱化)도 아니오, 원소모음(原素母音)의 중응성(重凝性)을 발음(發音)하는 구순(口脣)의 겉모양과 그 문자(文字)의 표시(表示)를 사뭇 대지(大地) 위에다 커다랗게 그리고 있는 것들은-”, 방근택, 현대예술 1977년 7월호 특집/현대미술의 현장-불붙는 냉엄한 투명과 차가운 열기, <앙데팡당>, <에꼴드 서울>, <서울70>을 중심으로- 이 열기에 찬 미술의 7월을 말한다. 37쪽. 

4)  “1991년 3월 자하문미술관의 교양강좌 ‘인상파론’ 특강, 양은희, <방근택 평전>, HEXAGON, 2021 409쪽. 연표 참조. 

5) 이 글 속에 나오는 연대와 관련된 내용의 출처는 양은희, <방근택 평전>, HEXAGON, 2021임을 밝혀둠. 이하 출처 생략. 

6)  양은희, 앞의 책, 96-7쪽. 

7)  방근택, 체험으로 본 한국현대미술사1. <50년대를 살아남은 ‘격정의 대결’장, 공간, 1984년 6월호, 42-8쪽. 

8)  회원은 이경성, 최순우, 이구열, 천승복, 석도륜, 임영방, 이일, 유준상, 오광수 등.

9) 주간한국 7월 23일 자에 [민족기록화전]에 전시된 작품을 비판한 인터뷰가 실리자 거론된 작가 2명이 방근택을 사무실로 유인, 폭행한 사건을 이른다. 이 사건이 나자 한국미술평론가협회는 방근택이 화가들에게 “계획적인 폭행을 당하고 입력에 의해 해명서까지 쓴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양은희 앞의 책, 408쪽. 

10)  동 8월-11월 경, 용산구 하숙집 거주 당시 하숙생들과 주인이 반공법으로 방근택을 사직당국에 고발한 사건이다. 방근택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104일 동안 구금된 후 2심에서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3년에 집행유예 4년으로 풀려났다(사건번호 69고 15151). 양은희, 앞의 책, 408쪽.  

11) 방근택, 앞의 글 참조.

12)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정열적인 현장비평을 통해 비정형 회화운동을 독려한 방근택에게 박서보를 비롯한 작가들은 더 이상의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특히 1965년 파리에서 귀국한 미술평론가 이일(1932-1997)은 1966년에 교수로 부임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출신의 첫 제자들인 ‘무’, ‘신’전, ‘오리진’ 동인의 연합체인 [청년작가연립]전(1967.12.11.-6/중앙공보관 전시실)과 <AG>, <ST> 등 전위미술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비평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커미셔너를 맡은 제1회 [서울비엔날레](1974)를 전후하여 이일은 박서보가 주도한 단색화 운동에서 발군(拔群)의 비평적 기수 역할을 한다. 1975년 동경화랑 주최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에 서문을 쓰는 등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비평이론을 바탕으로 ‘범(凡)자연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의 단색화를 해석한 이 일의 비평론은 단색화의 기초를 놓았다. 이 무렵 방근택은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사건으로 인해 무장해제된 상태였다. 특히 반공법 위반사건은 치명적이었다. 법적으로 집필이 금지된 상태는 비평가에게 곧 죽음을 의미한다. 60년대의 방근택에서 70년대 이일에게로 비평적 헤게머니의 이동은 비정형 회화에서 단색화로의 이동을 의미하며, 전후 세대에서 4.19 세대로의 화단 주류세력의 이동에서 다시 단색화 세대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군의 정치력과 화단 평정력을 발휘한 사람이 바로 박서보였다. 1970년 한국미술협회 국제담당 부이사장에 취임한 박서보는 1977년에 화단 권력의 정점인 이사장에 당선된다. 무려 6년에 걸쳐 국제담당 부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앙데팡당](1972), [서울현대미술제(1975), [에꼴드서울](1975)의 산파역을 했다. 이 공간에 방근택의 자리는 없었다. 방근택은 <시문학>(1976년 12월호>에 박서보의 ‘묘법’을 비판하는 등 특유의 비평적 결기를 보였지만, 박서보와의 관계는 이미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13) 윤진섭, 1970년대 한국 미술평단의 풍경 : 이념과 현실, 한국 미술평론의 역사,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18. 22쪽. 

14)  양은희, 같은 책, 4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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