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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날줄과 씨줄의 교직에서 파상의 반복적 곡선으로

윤진섭



날줄과 씨줄의 교직에서 파상의 반복적 곡선으로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얼마 전 이 글을 쓰기 위해 강릉에 있는 법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뜻밖에도 초기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레코드판에 그린 것부터 시작해서 작은 크기의 캔버스 작품에 이르기까지, 초기의 습작들은 소품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선해 보였다. 
 신선해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법관의 경우에 이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단면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그동안 내가 법관의 단색화에 대해 여러 차례 글을 썼는데, 그 글들은 대개 2010년대 중후반 이후에 제작된 그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글들을 쓸 당시 내가 참고할 수 있었던 작품들은 거슬러 올라가 봐야 90년대 후반을 넘지 않았다. 그 이전, 그러니까 법관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후반의 작업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번에 내가 법관의 초기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초기 작업을 살펴본다는 것은 곧 법관 회화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는 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뿌리를 찾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그러나 법관 작업의 뿌리에 대한 연구는 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생각보다 작품의 양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우선 손에 닿는 대로 약간의 작품을 살펴보았을 뿐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더욱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이번에 살펴본 약간의 초기 작품들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Ⅱ. 
 법관의 초기 작품들은 대개가 4호 미만의 소품들이다. 그보다 큰 작품들도 있지만 이번에는 우선 손에 닿는 대로 작은 크기의 캔버스 작품과 레코드판에 그린 그림들을 살펴봤다. 그 그림들은 주로 법관이 선묘와 색, 그리고 회화에 있어서 구성의 문제를 고심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법관이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화가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림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과 표현 욕구를 풀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론을 탐색했을 당시의 정신적 고뇌를 대변해주는 것이다. 

 나는 한 점의 그림을 본다. 청색 바탕에 검정색 선들이 이리저리 뻗어있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법관의 청색 단색화의 맹아(萌芽)가 되는 작품으로 추정된다. 내가 이 작품을 그렇게 보는 이유는 첫째, 법관이 청색이라고 하는 단색에 관심을 맨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이며, 둘째, 선묘를 통해 자신의 작의(作意)를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마치 고구마 넝쿨이 허공을 향해 생장 욕구를 키워가듯이, 법관이 청색의 캔버스 공간에서 검정 선묘를 그어가면서 공간에 대한 탐색을 해 나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이후에 연속해서 그린 작품들을 통해 법관은 가늘고 예리한 선묘로 마치 아메바처럼 원형질적이며 유기적인 형태를 지닌, 의식 내면에서 이는 환상적 풍경을 화면에 옮기는 작업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류의 그림들은 아직 온전한 성체(成體)로 성장하지 못한 아득한 옛날 인류의 초기 형태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 바다 속에서 살아가던 미물일 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시간이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저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영역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법관은 캔버스 화면에서 색과 선, 면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많이 그렸음을 이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자세한 분석을 통해 살펴보겠지만, 우선 이번에 잠시 둘러본 초기 작업들은 법관의 그림에 대한 내공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단단한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내게는 적지 않은 수확이었다. 


Ⅲ. 
 법관이 그림을 그리던 초기에서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한국 단색화의 중요한 대표적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이 위치에 오를 때까지 십 수년간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작품세계에 관해 글을 썼다. 법관 단색화의 특징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 쓴 나의 글 중에서 이 점에 대해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지는 문장을 여기에 잠시 인용하고자 한다. 

 “법관의 단색화는 색을 통해 지고한 정신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의 매체다. 그것은 내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논평했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물상들을 단순한 도형으로 상징화하는 작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것이 지난 15년간에 걸쳐 이룩한 법관의 회화 작업의 대강이다. 처음에는 산, 물, 풀, 바위와 같은 사물들을 단순화하여 마치 탱화를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장엄한 색채로 형상화했으나, 점차 이를 분절하고 파편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수년에 걸친 해체의 시기를 거친 후 마침내 단색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단색화는 어느 날 갑자기 비롯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그러니까 청과 적, 황(黃)이 주를 이루던 다색 반추상화의 시기에 그 징후가 이미 내장돼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다.” 

 여기서 나는 이 글을 쓸 당시만 해도 아직 앞에서 언급한 청색조의 선묘 작품을 접하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법관은 왜 십 수년간이나 이 초기 작품들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일까? 법관은 내게 ‘부끄러워서’ 그리했다고 말했다. 순간 나는 그렇게 말하는 법관의 표정에서 겸손을 읽을 수 있었다. 

 화가에게 있어서 겸손이란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 탐구하는 자에게서 보이는 이 겸손의 정신은 아직도 개척해야 할 경지가 많이 남았다는, 자기 예술의 확장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법관에게 있어서 이 겸손한 태도는 그의 예술을 늘 새롭고 신선하며, 갱신해야 할 그 무엇으로 만든다. 따라서 법관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한눈에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아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다른, 즉 같음과 다름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변주와도 같은 것이다. 반복적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씨줄과 날줄에 의한 교직(交織)은 마치 이 세계가 다양한 종(種)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거기에는 같으나 서로 다른 차이들을 지닌 수많은 개체들의 상징처럼 보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저 숱한 반복적 행위들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상징인가? 수화 김환기는 뉴욕시절에 청색 점화를 제작하면서 서울에 두고 온 친구들을 생각하며 점을 찍는다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우주를 사념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법관은 밤하늘의 별들을 생각하며 수평과 수직의 교점을 반복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선(禪)의 세계를 추구하는 법관은 수행의 방편으로 그림을 택했고 그림은 이제 그의 삶 자체가 되었다. 

 시간과 장소는 법관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시간이란 계기를 통해 캔버스에 선을 긋고, 반복되는 행위의 흔적인 가로 세로의 교차점은 장소가 된다. 그 선들은 어디에 있는가. 다름 아닌 법관의 캔버스 위이다. 그것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가. 법관이 투여한 시간에 의해서다. 투여한 시간에 비례하여 화면에는 밀도가 생기고 밀도는 그만큼 화면에 생기를 부여한다. 공력은 그리하여 법관의 그림에서 중요한 창작의 요소로 떠오른다. 어쩌면 진리의 구경(究竟)은 행위의 반복의 수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내가 법관의 전시 서문에 쓴 다음의 글을 읽어보자. 

 “인과론적 독재의 논리에서 벗어나 상대론적 관계성에 입각해 정신의 여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 법관이 지향하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그의 그림에는 무수한 빗금들이 존재한다. 가로와 세로로 겹쳐진(+) 무수한 선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화면 위에 공존한다. 그렇게 해서 기왕에 그려진 선들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선들이 자리 잡는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들은 다시 화면 바닥으로 가라앉고 다시 새로운 선들이 나타난다. 이 선들의 공존은 융화(融和)의 세계를 이루며, 세계는 다시 반복되기를 그치지 않는다. 법관의 그림은 따라서 완성이 아니라 오로지 완성을 지향할 뿐이다.”


Ⅳ. 
 법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로운 표현방법을 시도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즉, 이제까지 지속해온 수직과 수평적 선의 교직에 다시 또 다른 방법을 그 위에 얹은 것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법관은 넓은 평붓에 물감을 묻혀 가지런히 캔버스 표면에 칠하는 특유의 기법을 개발했다. 이제 법관의 단색화 그림은 전혀 새로운 느낌을 준다. 날줄과 씨줄이 무수히 겹쳐 검거나 푸르게 보이는 화면 위에 찍힌 선들은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곡선들은 무수히 반복되면서 지문이나 혹은 고목의 나이테를 연상시킨다.

 파도가 해안에 도달해 무수히 반복되는 파상(波狀)의 그림을 그리듯, 자연현상은 반복을 요체로 삼는다. 아침에 해가 뜨면 저녁에 해가 진다. 꽃이 피면 질 때가 있고,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는다. 이 단순한 진리를 긴 인류사에 대입하면 그 또한 반복이 아닌가. 그렇다면 명상과 참선을 통해 진리를 찾고자 하는 법관이 그 방편으로 반복을 요체로 삼는 단색화를 그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번 전시에 법관이 선보이는 검정에 가까운 진회색 작품들은 청색으로 대변되는 법관의 작품세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그 이전에도 회색작품들이 있었지만, 이번 작품들은 이른바 파상(波狀)의 지문이나 나이테를 연상시키는 화면 구성을 통해 새로운 미감을 보여준다. 이 청색과 검정색이 보여주는 법관의 단색화에 대해 일찍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법관의 단색화 작업이 나날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청색과 검정 사이에서 벌어지는 색의 담백한 향연. 기존의 어떤 형태도 거부하는 그는 오로지 선을 긋고 점을 찍는 필획(筆劃)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정신 수행의 올곧은 길을 가고자 한다. 그것은 속세의 번뇌와 잡사(雜事)를 털어버리고 해맑은 정신의 세계로 잠입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곧 수행의 방편이지만, 불가(佛家)의 울타리를 벗어나 그림이 화랑 벽에 걸리면 세속적인 의미에서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 변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것은 곧 비평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법관의 작품 세계는 미술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법관은 20여 년에 걸친 미술계의 활동을 통해 이제 후기 단색화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법관은 지칠 줄 모르고 작업을 하는, 철학자 고(故) 조윤제의 표현을 빌면 ‘은근과 끈기’의 작가이다. 이번에 나는 법관의 작업실을 둘러보면서 초기작업을 볼 수 있었고 이는 향후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단초가 되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 그래서 때로는 스스로 의심해서 귀중한 작품들을 파기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법관도 그랬다. 어떤 사람이 초기 선묘 그림을 보고 “후안 미로를 연상시킨다”고 한 말이 상처가 돼 더 이상 진척시키지 못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초기 그림에서 많은 가능성을 보았으며, 작가로서 법관의 재능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재능이 있었기에 오늘의 법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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