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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 /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미학,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어디 있으랴?

윤진섭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미학,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어디 있으랴? 
-사물공화국의 맹주, 작가 이상용의 이야기-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이상용은 누구인가? 한없이 천진난만해 보이는 그는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마음의 상태에서 작업을 하며, 마치 누에가 명주실을 자아내듯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실은 삼십여 년간에 걸쳐 축적된 다양한 작품들로 빼곡하다. 작품 경향별로 잘 정리된 이상용의 작업실을 둘러보면 마치 별천지에 온 것 같다. 뭔지 설명을 듣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들을 비롯하여 벼루, 돌, 나무둥치 등등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은 온갖 사물들(found objet)과 철사나 철판으로 만든 조각품으로 꽉 차 있는 작업실은 오십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생을 불태우고 있는 작가 이상용의 제련소와도 같은 창작의 산실이다. 

 무질서 속의 질서, 실로 이상용은 예술 창조의 이 중요한 고전적 원리를 몸소 실천하는 작가다. 일견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질서가 있다”는 이 원리를 그는 자연에서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자연을 접하며, 자연에서 사물을 취하고 그 사물을 이용하여 작업을 한다. 오래된 고목, 둥글넓적한 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판자 등등이 친숙한 소재들이다. 또한 이상용은 다양한 산업재나 문명의 폐기물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의 기민한 상상력은 사물과 사물을 잇는 접착제의 기능을 한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물들인데 이상용의 손을 거치면 하찮은 것도 멋진 예술품으로 변신을 한다.  


Ⅱ. 
 이처럼 평범한 사물을 이용하여 훌륭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는 이상용 예술의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그 비밀의 요체는 바로 ‘놀이정신’에 있다. 네덜란드 출신의 저명한 문화사가인 요한 호이징하(Johan Huizinga)가 문화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간파한 이 ‘놀이정신’이 바로 이상용의 작업 전반에 면면히 흐르는 것이다. 그는 아이들이 싫증이 날 때까지 흠뻑 놀 듯이 매일 작업에 파묻혀 작업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작업인 생활을 이어간다. 나는 그의 이러한 작품세계를 가리켜 ‘유장한 서서의 강(江)’이란 말로 압축한 바 있다. 다음은 그의 작업에 대해 쓴 글의 한 대목이다.  

 “이상용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세헤라자데 왕비처럼 매일 밤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운명에 처한 작가인지도 모른다. 만일 잠시라도 이야기가 끊긴다면 무서운 형벌에 처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쩌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작가인 그에게 내려진 천형인지도 모른다. 그런 운명을 타고난 그가 어떻게 결혼을 하여 아까운 시간을 나눌 수 있겠는가.”
졸고, <한 비범한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유장한 서사의 강(江)>, Public Art, 2022년 2월호

         
 고정관념에 눈이 먼 자들은 더 이상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없다. 따라서 새로운 예술의 경지를 개척하는 예술가들은 어린아이처럼 맑고 천진한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상용이 바로 이러한 예술가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Ⅲ.
 나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두툼한 화집 한 권을 받은 적이 있다. 바로 이상용 작가가 보낸 것이었다. 그와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나는 화집을 받자마자 바로 그의 작품세계에 빠져들었다. 당시만 해도 약간 설익어 보이는 그의 작품들은 크게 회화와 오브제로 분류되는 것들이었다. 여기서 ‘설익다’고 한 이유는 어린아이 풍 특유의 치기(稚氣)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 그것이 나쁜 건가? 치기란 실로 ‘날 것’을 뜻하니, 이야말로 새로운 예술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폴 클레(Paul Klee)의 작품에서 보듯이 항상 근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려 하는 ‘예술의지(Kunstwollen)’가 아니겠는가? 한국에서는 장욱진의 그림이 이 부류의 작품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인간으로 치면 어린아이의 상태를 동경하는 이러한 스타일의 특징은 단순하며 정곡을 찌르고, 인간의 가장 맑은 심성에 호소한다는 점이다. 나는 얼마 전에 이상용의 작업실에 들른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한 점의 흥미있는 작품을 발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러진 책상다리였다. 이상용은 활처럼 부드럽게 휜 책상다리의 둥근 머리 부분에 눈과 입을 상징하는 작은 세 개의 홈을 파서 벽에 걸어놓았는데, 그 장면은 마치 한 마리의 코브라 뱀이 머리를 쳐들고 쳐다보는 형국이었다. 

 이처럼 순간적인 순발력을 발휘하여 고정관념에 빠진 대중의 의표를 찌르는 작가가 바로 이상용이다. 당시만 해도-지금도 그때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지만-이상용은 일종의 정크 아트에 빠져 있었다. 그는 깡통, 책, 폐전선, 안경, 골판지 등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로봇 형상의 조각품을 만들거나 폐활자, 못 쓰는 도마, 벼루 등등을 이용하여 숱한 형상의 오브제 작품을 제작했다. 이때도 역시 이상용은 드로잉 작품에 몰두했다. 이상용에게 있어서 드로잉이야말로 작업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는 운동선수가 아침에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 듯이, 매일 습관처럼 드로잉을 하고 시를 쓴다. 그의 작업실 선반 위에는 시를 적은 수백 권의 노트들과 드로잉북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것들은 이상용이 예술을 마치 밥 먹는 것처럼 일상으로 대하고 있으며, 예술이 더 이상 특별한 어떤 의식(儀式)이 아님을 증거한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은 이상용에게 있어서 어떤 거창한 의식이 아니라, 마치 공기처럼 가벼운 일용할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삼십 년을 헤아리는 창작의 과정에서 서양의 여러 예술가들이 이상용의 의식(意識)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장 미셀 바스키아, 요셉 보이스, 마르셀 뒤샹,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등 거장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이상용은 그 특유의 순발력과 예술적 재능,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예술적 광기(mania)를 통해 그들을 극복하여 어느덧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그의 예술적 독자성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영향받은 작가들로부터 벗어나 그 자신 예술의 지평에 우뚝 서게 하는가? 나는 이상용이 기울이는 다양한 사물에 대한 관심을 들고 싶다. 그의 예술의 요체는 평범한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다. 이른바 죽은 것, 즉 한때 사용가치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 효용을 다해 버려진 것에 대한 관심이 바로 ‘평범한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힘’인 것이며, 그 숨결이 다름 아닌 그 특유의 상상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의 진원지가 바로 이상용의 예술을 추동시키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천진난만한 시선이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앞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작품세계의 맹아가 되는 이상용의 유년시절에 대해 누나는 그가 어렸을 적부터 틈만 나면 만들고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작가 이상용의 의식은 그림에 몰두하던 어린 시절의 단계에 머문 상태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에 의심이 가는 독자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해 보면 의문이 풀린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작업량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작업량만 많으면 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작업량이 많다 해도 그것이 창의적이지 않으면 말 그대로 무용지물에 가깝다. 따라서 남과는 다른 자기만의 독자적인 예술적 특장(特長)을 갖추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이상용의 작품에 흐르는 창작의 기조(基調)는 반복과 단순, 그리고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놀이성이다. 여기서 반복은 쓰거나 긋고, 칠하는 행위의 반복을 말함이고, 단순은 조형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점, 선, 면으로 돌아가려는 예술의지, 그리고 이들의 바탕에 깔려 있는 지칠 줄 모르는 놀이적 행위를 말한다. 예컨대 다양한 크기의 드로잉 작품에서 캔버스 전체에 미세하게 깔려있는 작은 숫자들이나 사람을 연상시키는 형상, 화살표나 삼각형 등등 각종 기호나 상징들은 반복의 원리에 의해 제작되고 있다. 반면에 수많은 벼루를 깎거나 파내서 선, 기호, 기하학적 문양 등등을 새겨넣는 행위는 단순성과 관련된다. 이상용은 이처럼 성질이 서로 다른 작업을 해나가면서 지칠 줄을 모르는데, 그것은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누에가 명주실을 자아내듯이 혹은 세헤라자데 왕비가 밤새도록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듯,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중력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의 작품은 결코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다. 물론 암수표처럼 알 수 없는 기호와 상징들로 채워진 그의 그림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 풍경을 다 이해할 수도, 또 반드시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빈 액자를 벽에 걸어놓은 작품의 한 가운데에 작은 나뭇가지를 옆으로 놓았는데,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나는 언제나 비어있는 액자의 밖을 본다.” 

 비어있는 액자는 재현 거부의 상징일 터, ‘재현(representation)’이 의미하는 고전적 의미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투명한 세계를 직시할 것이라는 언표로도 읽힐 만 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상용에게 있어서 그것은 오브제, 즉 사물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리고 그의 예술행위는 과연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이상용이 구축하고 있는, 나의 용어를 빌리면 ‘사물공화국’에 잠시 눈길을 주려 한다. 수많은 사물들이 모여 밤낮으로 자기들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상용의 작업실 풍경은 민주적인 언어를 잃어버린 인간세계에 대한 탁월한 비유이다. 즉, 기호의 독재, 언어의 독재를 통해 남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감시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의 인간들에게 사물의 언어를 들려줌으써, 주체적 삶의 태도를 회복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용은 아이들이 인형과 대화를 나누듯이 사물들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예술이 지닌 서사의 힘을 이끌어낸다. 이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나아갈 길은 세상에 쓸모없이 버려진 것들을 주워다 고물상에 산처럼 쌓여있는 고물처럼 쌓아두는 것이라네/쓸모없이 버려진 것들을 다듬고 다듬어 광택을 내고 아름다운 색으로 마술을 부려/아름다움으로 우리 곁에 영원히 다시 놓이게 하는 것이라네”
이상용, <탄생>, 1994

 비록 대화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다듬고 광택을 냄으로써, 그것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이상용의 예술의지는 이제 그만의 독자적인 세계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여기서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순수한 예술세계를 설명해주는 키워드이다. 순수한 예술은 본래 실용적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임마누엘 칸트의 이른바 ‘무관심성’ 이론은 이를 대변해주는 학설이거니와, 이를테면 떡을 보고 군침을 삼키지 말라는 뜻과도 같다.  

 반면에 오브제는 그 자체 자족적인 대상이 됨으로써 쓸모없는 자격을 획득한다. 즉 그가 사용하는 다양한 인공적 사물들은 폐기됨으로써 ‘유용(有用)’에서 ‘무용(無用), 즉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 무용이 다시 유용의 지경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상용의 손길을 통해서이다. 그렇게 해서 이상용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작업은 이제 대중의 공감을 얻어가며 맹렬히 그 지평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광기의 의욕을 불사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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