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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현 / 단색에서 다색으로, <이후 접합>의 세계

윤진섭



단색에서 다색으로, <이후 접합>의 세계   


윤진섭 | 미술평론가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초대전에서 하종현은 중요한 작품 한 점을 발표했다. 2008년에 제작한 그 작품(접합 08-101, 마포에 유채, 244x366cm)은 화포에 여러 개의 철조망을 부착한 뒤, 그 안에 과거의 단색화 작품들을 해체한 상태로 뒷면이 보이게 붙이고 한 점은 캔버스를 뒤집어서 제시한 것이다. 뒤집은 상태로 제시한 그림의 제목은 <접합 74-11>이었다. 

 전시의 개막식에서 하종현은 그 자리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그 작품이 지난 74년 이래 지속돼 온 자신의 단색화 <접합> 시기를 마감하고, 그 무렵 실험하고 있던 다색의 시기를 여는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밝혔다. 실제 하종현은 그 작품을 기점으로 다색의 작품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으며, 이 새로운 경향의 제작방식으로 그린 다수의 대작들이 당시 국현의 전시장에 걸렸다. 

 요 몇 년간에 걸친 시기에 하종현은 다색의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그것은 쪽그림이었는데, 그 기원은 1974년도에 제작한 기념비적인 작품 <접합>(종이에 유채, 120x175cm)으로 올라간다. 이 작품이 지닌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 나는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하종현의 이 작품은 그 이전의 오브제 작업과 그 이후의 캔버스 작업을 나누는 분기점이다.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70년대 초반에 그가 시도했던 일련의 오브제 작업을 마감하는 것인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암시한다. 이때 이르러 비로소 그는 석고, 종이, 스프링, 철망 등을 사용한, 소위 물성(物性)에 대한 실험을 그치고 그 이후 30여 년간 지속된, 캔버스에 의한 ‘접합’ 연작의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졸고, 자연의 원소적 상태로의 회귀 : 하종현의 근작에 대하여>, 미술평단, 2008년 봄호
 
 그렇다면 이 작품은 과연 어떻게 생긴 것일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위에 인용한 글에서 한 부분을 더 따오면 다음과 같다.
 
 “<접합(Conjunction)>은 지난 30여 년간 하종현의 작품에 붙여진 일관된 명제이다. 캔버스의 뒷면으로부터 걸쭉하게 갠 물감을 페인팅 나이프로 밀어붙여 올이 성긴 마대의 틈새로 물감이 새 나오게 만드는 기법은 그가 창안해 낸 독자적인 것이다. 이 독창적인 기법은 문헌에 의하면, 70년대 초반에 제작된 같은 명제의 작품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접합> 연작의 원형이 된 이 작품은, 단일한 캔버스가 아니라 똑같은 크기의 여러 판목에 한지를 씌운 뒤 이를 걸쭉하게 갠 흰색 물감 위에 누름으로써, 판목의 틈새로 흰색 물감이 배어 나오도록 고안했다는 점이다. 마치 블록 담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모르타르처럼 판목의 사이에 형성된 흰색 물감의 덩어리는 파상의 모양을 이루며 한지가 머금은 누런 색 기름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위에 인용한 서술을 참고로 할 때 하종현의 ‘단색화 종언’ 선언 이후에 등장한 <이후 접합> 연작의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즉, 초기의 <이후 접합>에 나타난 제작방식은 바로 모르타르 공법처럼 판목과 판목 사이에 물감을 넣고 누른 것이다. 그리고 그 맹아가 바로 앞에서 묘사한 74년도의 첫 <접합>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하종현은 첫 <접합>의 단색화 작업 이후 근 40여 년 만에 형식적으로는 쪽그림으로 회귀한 것이며, 내용적으로는 단색에서 다색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나는 이 무렵 하종현의 작업실을 방문할 때마다 다색화에 대한 그의 왕성한 창작열에 놀라곤 했다. 캔버스의 뒤에서 물감을 밀어넣는 단색화 작품과는 달리, 다색의 <이후 접합> 연작을 제작하는 일은 손이 많이 가고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똑같은 사이즈의 수많은 나무판자에 일일이 헝겊을 씌우고 가로로 켜켜이 판자를 쌓거나 세로로 누이는데, 그 사이사이에 서로 다른 형형색색의 물감을 모르타르처럼 넣고 누른다.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이후 접합> 연작의 특징은 판자의 사이마다 비져나온 물감의 풍부한 표정이었다. 

 하종현은 70년대부터 다양한 물질의 오브제 작업을 실험한 작가답게, 또한 74년 이후에는 <접합> 연작을 통해 물감의 풍부한 표정을 연출한 경험을 살려, 과연 어떻게 하면 물감을 자연상태 그대로 해방시킬까 하는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 의도를 잘 드러낸 것이 하종현이 말한 것처럼 “내가 바라는 것은 가능한 한 물질 자체가 물질 그 자체인 상태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말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되도록 말하지 않는 쪽에 있고 싶다.”는 발언이다(하종현 화집, (주) 미술사랑, 2001). 

 실제로 <이후 접합> 연작에는 유성물감에서 나온 기름이 천에 번진 흔적이 역력하다. 기름기를 머금은 천과 빨강, 파랑, 노랑, 녹색, 흰색, 검정 등등 다양한 유채색의 조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물성을 드러내면서 독특한 아우라를 자아냈다. 이 시기에 단색화에서 벗어난 하종현은 마음껏 실험을 했는데, 가령 거울을 이용한다든가 다양한 크기의 천조각을 캔버스에 붙이는 콜라주 작업 등등이 그것이다. 

 이 <이후 접합>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967년부터 시작한 <탄생>과 <도시계획백서> 연작과 만나게 된다. 하종현은 단색화 작가이기 이전에 원래 화려한 원색을 구사하는 다색의 작가였던 것이다. 그는 화려한 원색이 주조색인 이 일련의 작품을 통해 단청이라든지 오방색과 같은 민속적인 색채들을 현대적으로 표현하는데 골몰했다. 하종현은 유성물감으로 칠한 캔버스천을 잘라 사방연속의 기하학적 문양을 직조하거나, 캔버스 천의 주름을 잡아 입체적인 캔버스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탄생> 연작은 마치 카펫을 짜듯이 아주 정교한 패턴으로 돼 있어 꼼꼼한 솜씨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하종현은 이 일련의 기하학적 작품들을 거친 뒤 1969년부터 1973년에 이르는 시기에 오브제와 설치작업을 병행했는데, 1974년의 <접합> 이후에는 오로지 단색의 캔버스 작업에만 전념했다. 그 기간이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단색의 종언을 선언하기까지 무려 40년에 가깝다. 

 최근에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하종현초대전은 상당한 기간동안 단색화로 회귀한 이후 다시 다색화로 돌아온 하종현의 근작으로 구성돼 있다. 아니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단색화와 다색화가 혼합된 전시다. 그런데 단색화 계열의 작품은 배압법에 의한 기존 작품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 하였으며, 크게 볼 때 다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의 눈길을 끈 것은 푸른 색조로 된 일련의 작품들이었다. 

 이 일련의 푸른색 계열의 작품들은 거친 붓질을 통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흩트러트리는 가운데 유성물감이 지닌 날것의 물질감을 드러내고자 한 작의(作意)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물감이 묻은 넓은 평붓으로 캔버스 위에 묻은 찐득한 점액질과도 같은 물감을 짓이기거나, 덧칠하거나, 밀어낼 때, 작가의 몸에 실리는 에너지와 기는 화면에 다양한 색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변화는 청색물감에 흰색물감이 섞이면서 내는 계조에 의하거나, 흰색의 첨가율이 각기 달라 청색의 다양한 편차가 나타나는 물감의 터치들이 광포(狂暴)하게 작렬하는 듯한 화면효과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어느 것이든 물감과 터치의 야생성을 보여주는 이 계열의 작품들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2014년에 열린 국제갤러리 주최의 <단색화의 예술>전 이후, 이번 전시를 포함하여 세 번의 하종현초대전이 열렸다. 그 중에서 하종현의 다색화가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번의 단색화 전시는 공교롭게도 국제갤러리가 한국의 단색화를 세계화하기 위해 여러 국제전을 추진한 2014년 이후와 시기적으로 겹친다. 

 그런데 사실 하종현에게 있어서 천이나 거울 등 이질적인 재료를 활용하여 격렬한 실험을 시도한 시기는 2011년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하종현은 상당히 오랫동안 <이후 접합> 연작을 통해 다색화에 대한 실험을 지속해 나갔던 것이다. 이 시기의 회화 실험에 대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국제갤러리의 1,2,3관 전체에서 열린 이번 하종현초대전은 어느덧 80대 후반에 이른원로작가의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막대한 작품이 소요되는 대작 중심의 전시를 준비한 작가의 입장에서는 작품 제작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열정과 에너지를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종현은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단색화의 대표작가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단색의 대척점에 있는 다색을 통해 회화의 새로운 지점을 탐색하는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1차 출처: 아트인컬처, 20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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