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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 기하학적 구조에서 리좀적 구조로의 이행

윤진섭




기하학적 구조에서 리좀적 구조로의 이행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심상(心象)은 마음속에서 이는 마음의 이미지다. 그것은 마치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수초처럼 고정돼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부단히 움직인다. 

 김영미는 지난 30여 년간의 화단 활동을 통해 이 심상의 세계를 추구해 왔다.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김영미는 재현, 즉 외부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그리는 사실적 묘사의 세계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기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에게는 흔히 말하는 체질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무리 어떤 사조가 유행을 한다 해도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으면 설혹 호기심을 느껴 잠깐 시도하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가령, 어떤 시기에 극사실주의가 유행한다고 해서 자신의 체질을 잊고 거기에 빠지는 작가는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김영미가 작업 초기인 90년대 초반부터 심상의 세계에 빠져 작업을 해 온 것은 바로 이 체질과 관계가 있다. 작가는 마음에 이는 감흥을 어떤 사물의 이미지나 색채, 선, 면 등등 회화의 조형 요소를 통해 표현하게 되는데, 심상은 바로 이런 마음의 작용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다. 

 김영미는 첫 개인전을 가진 1995년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 심상의 세계에 빠져 자신의 독자적인 스타일의 작업을 모색해 왔다. <퇴적된 형상> 연작은 고인돌을 비롯하여 토기, 사람, 새, 동물, 봉분 등등 오래된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황토색 퇴적층을 연상시키는 화면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김영미가 일관되게 구사하고 있는 ‘긁기(스크래치)’의 기법이다. 사실 이 긁기는 쌓임 즉, 퇴적을 전제로 한 행위인데, 바로 이 행위가 첫 개인전 이후 현재까지 양상을 달리하면서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김영미의 작업에 있어서 이 ‘긁기’의 행위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무엇이 그토록 오랜 기간 ‘긁는’ 행위를 지속시켜 온 것일까? 김영미의 <노스탤지어> 연작은 2017-8년 무렵까지 견지해 온 제목인데, 이 연작에서도 서정적인 느낌의 반구상적 화풍이 화면을 주도했지만, 그 바탕에는 바로 이 ‘긁기’의 행위가 특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Ⅱ.
 김영미가 화면에서 일체의 구상성을 배제한 것은 2020년에 이르러서 였다. 김영미는 돌가루가 포함된 안료를 화면에 되풀이 바르는 행위를 통해 오로지 재료의 물성을 드러내는 추상의 세계로 나아갔다. 수없이 덧칠돼 굳은 화면을 조각도로 긁어내는 이 반복의 행위는 그렇게 함으로써 화면의 내적 질서를 낳게 되는 것이다. 김영미는 이 긁기의 기법을 통해 검정과 빨강, 검정과 연두, 검정과 핑크 등 서로 대비를 이루는 색채의 세계를 점진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화면의 모습은 어떤 작품은 눈의 동공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풀잎의 다발이나 쏟아지는 빗줄기와도 같은 이미지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들은 우리가 일상의 경험에서 얻는 상(象)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엄밀히 이야기하면 그것들은 오로지 조형요소들끼리의 결합을 통해 나타난 자율적인 형태인 것이다. 따라서 화면에 나타난 형상이 무엇을 연상시키는 것은 단시 마음의 심상적 작용에 지나지 않을 뿐, 그것들은 그저 원이며 점, 선, 사각형 그 자체인 것이다. 

 김영미가 화면에서 이 내적 논리를 더욱 깊게 추구한 작품들이 바로 <심상> 연작이다. 2021년 나우리 아트센터 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에 출품한 이 연작들은 마치 육상선수가 트랙을 따라 달리듯이 조각도를 쥔 손이 화면 위에 표시된 일정한 경로를 파나간 고단한 노동의 산물이다. 김영미는 이 연작을 통해 그전까지 해 온 불규칙적인 ‘긋기’의 행위에서 질서정연하며 논리적인 화면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 세계는 운동장의 트랙을 연상시키는 것부터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한 구조를 보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던한 언술의 행위를 보여준다. 
 구구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 김영미는 비선형적인 구조를 보이는 작품들을 대거 출품한다. 이제까지 보여 온 기하학적인 구조가 아니라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비선형적이며 리좀적인, 즉 감자뿌리처럼 얽히고 설킨 모습을 보이는 작품들이다. 특히 빨강에서 주홍 내지는 주황에 이르는 바탕색을 지닌 작품들이 더욱 눈길을 끄는데,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작품들이 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들은 그 나름대로 고유의 회화적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우리는 김영미의 작품을 보며 다음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물감층을 파내는, 즉 조각도의 행로에 따라 작품의 상(象)이 서로 달라지는데 김영미 작품의 요체는 바로 이처럼 물감의 적층을 파내는 손맛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상자들은 서로 다른 색의 지층이 조각도에 의해 파내지거나 잘려나갈 때 드러내는 미묘한 색의 단층을 맛보게 될 것이다. 김영미의 작품은 천천히 음미할수록 본연의 매력을 발산하는 그런 류의 작품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영미는 한가지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 왔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상> 연작은 질서정연한 원 내지는 사각형 중심의 기존의 기하학적 구조를 해체하고 리좀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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