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K-팝아트의 오늘

윤진섭



K-팝아트의 오늘 

윤진섭 | 큐레이터/미술평론가


 Ⅰ. 토착적인 한국팝의 가능성
 이른바 '한국 팝(Korean Pop/Hankook Pop)'이란 게 있다. 중국에 ‘정치 팝(Political Pop)’이 있고 베트남에 ‘베트남 팝(V-P)’이 있듯이, 이제 팝이란 용어는 일종의 보통명사로서 그것의 원산지인 영국이나 미국의 우산 아래 있을 수만은 없는 세계화 내지는 국지화(局地化) 현상을 낳고 있다. 팝아트가 그 본산인 영국이나 미국을 떠나 국제적인 양상을 띠게 된 이면에는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되고 있는 대중문화가 버티고 있다.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은 한 스타의 죽음이 이데올로기와 인종을 초월하여 지구촌 전체를 일거에 공황 상태로 몰아갈 수 있음을 입증했다. 또한 지구촌 전체를 일일생활권으로 만든 교통의 발달과 인터넷의 등장은 문화나 예술이 더 이상 고립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보고 싶은 영화나 듣고 싶은 음악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언제라도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상황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옹색하게 만든다. 이제 팝 아트는 더 이상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니다. 대중이란 용액에 넣어서 파랗게 변하면 민족적인 것이고, 빨갛게 변하면 세계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파랗게 변하는 동시에 빨갛게 변할 수도 있는 청록색과도 같은 어떤 것, 즉 중성적인 색채를 띤다. 전 지구적 차원의 무대에서는 인종은 없고 오직 대중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거추장스런 옷에 지나지 않는다. 그 세계에는 또한 강대국과 약소국의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즐김의 대상만 있을 뿐이다. 팝은 태생적으로 그렇다. 


 Ⅱ. 한국 팝의 변천과 경제/사회/정치적 배경
 1970년대는 60년대의 열악하기만 했던 사회적 환경과는 달리 60년대의 근검절약을 바탕으로 형성된 경제적 풍요의 과실을 따는 시기였다.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형성된 국내기업의 해외건설 참여와 중동특수로 인한 오일 달러의 유입은 ‘저축이 미덕’이던 시대에서 점차 ‘소비가 미덕’인 시대로의 이행을 촉진시켰다. 저축을 위해 허리끈을 졸라매야 했던 국민들이 외식을 즐기고 ‘마이카’의 꿈을 실현하게 되는 것은 80년대에 들어서지만 70년대 중반의 국산 브랜드 1호인 ‘포니’차 출시가 대변하듯이, 대중적 소비가 서서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소위 말하는 ‘가든’ 스타일이 외식의 대명사로 통하며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이러한 가든식 음식점들이 있는 도시의 근교로 가족이 외식을 하러 가기 위해서는 내 차가 필수인 환경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양귀자의 소설 <천마총 가는 길>은 가든식 불고기집이 대변하는 경제적 현실과 정치적 탄압, 즉 풍요와 인권이라는 두 개의 프리즘을 통해 80년대 당시 한국사회가 처했던 모순을 명쾌하게 해부한 작품이다.  

 이처럼 외식산업의 발달은 일정 부분 해외근로자의 몸을 담보로 국내에 유입된 오일달러에 기대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이면 뚜렷한 팝의 등장은 아니더라도 이른바 대도시를 소재로 한 극사실 풍의 그림을 통해서 팝의 대리적 체험이 가능했다. 이 무렵은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소요를 겪고 있었지만, 경제적 번영과 풍요를 알리는 가시적 지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앞에서 1970년대 한국의 팝은 극사실 회화를 통한 대리적 체험이라고 말했거니와, 이는 보다 엄밀히 말해서 팝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릴만큼 한국의 경제적 여건이 대량소비를 바탕으로 무르익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1976년에 커피 자판기가 등장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나라가 대량소비사회에 접어들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에는 본격적인 팝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통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팝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30내지는 40여 년의 시차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예술과 사회적 조건의 관계를 묻는 예술사회학적 접근을 정당화한다. 한국의 팝은 1960년대 미국의 팝이 그랬던 것처럼, 2000년대라고 하는 대중소비사회의 단계에 접어든 시기에 만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첫 징후가 보였던 이래 근 40여년이 걸린 셈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일상성의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는 작가는 한만영이다. 그는 1972년에 <무제>(193.9x130.3cm, 캔버스에 유채)를 제작한 이래 모나리자를 비롯한 서양의 고전 명화들을 작품에 인용, 각색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무제>는 극사실 풍으로 그린 서양 여인의 얼굴이다. 잡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진을 이용하여 당시 무분별할 정도로 서양문화에 빠져있던 사회를 풍자할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작가인 한만영은 당시의 심정을 술회하고 있다. 그는 그 이후 1977년 무렵부터 서양의 고전 명화를 인용하는 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대중의 눈에 익숙한 이미지들을 소재로 삼았다. 

 조각에서 팝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작가는 김정명이다. 부산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이미 1975년에 사진을 콜라주하는 오브제 작품을 제작한 바 있으며, 1976년에는 <액자속의 정물>에 코카콜라 병을 오브제로 제시하였고, 1981년에는 숫자가 중앙에 큰 글자로 인쇄된 달력을 주물로 뜬 <카렌다> 연작을 제작하여 팝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1970년대 후반에 김용철은 <이것은 종이일 뿐입니다>(94.5x112cm, 혼합재료, 1979-81) 연작을 제작했는데, 이는 한 남자의 얼굴이 비치고 있는 T.V 수상기를 찍은 사진 위에 흰색의 페인트 칠을 한 뒤, 그 위에 “THIS IS A PIECE OF PAPER”란 문장을 인쇄한 사진이나 말 풍선을 그려 넣은 것 등 팝적인 느낌을 주는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0년대의 경제적 상황은 60-70년대에 비해 많이 호전돼 있었다. 한국은 60년대에 비롯된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자조 자립 운동, 중동특수로 대변되는 오일달러의 유입, 중공업 진흥정책이 낳은 경제적 토대의 구축 등으로 인해 ‘저축이 미덕’이던 시대에서 ‘소비가 미덕’이 되는 소비사회로의 전환을 이루었다. 


Ⅲ. 신세대 미술의 등장과 팝의 정착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서자 드디어 한국사회는 대중소비사회로 진입을 하게 된다. 백화점에는 질 좋은 상품이 넘쳐났고, 쇼윈도우를 장식하는 디스플레이 기술도 선진국 수준을 능가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브생로랑, 루이뷔통, 베르사체, 샤넬과 같은 외제 상표는 이제 부의 상징이자 사회적 신분을 재는 척도가 되었다. 당시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세칭 ‘신세대’, 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X세대' 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대의 부상은 더 이상 분석의 고삐를 늦출 수 없을 만큼 영향력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급신장되어가는 이들의 막강한 파워는 각종 제품생산의 내용과 질을 결정하는가 하면, TV 및 신문, 잡지 광고의 흐름을 선도하고 때에 따라서는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내가 이 글을 쓸 1994년 당시는 지금과 같은 인터넷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모뎀을 이용한 P.C 통신이 소수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퍼져가던 때였다. 휴대폰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오렌지족’ 혹은 일본식 명칭을 따라 ‘신인류’라고 불리던 신세대의 등장은 훗날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아고라’로 상징되는 인터넷 미디어와 휴대폰의 문자서비스 기능은 여론을 형성하고 그에 따른 신속한 결집을 가능케 하여 순식간에 돌풍을 일으키는 새로운 선거전의 양상을 낳았다.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상징되는 신매체의 승리 그 자체였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대목이 증명되기에 이른 것이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0년대 중반 무렵이면 강남에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서서히 강남의 마천루가 형성될 조짐을 보이던 시기다. 강남은 197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됐지만, 이 지역의 개발은 한동안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하철 강남역에서 삼성역에 이르는 테헤란로 일대가 개발붐을 탄 시기는 서울올림픽이 벌어졌던 1988년 무렵이었다. 1980년대 말,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인터콘티넨탈 호텔, 잠실 롯데백화점, 무역센터빌딩, 무역센터 종합전시관 등이 세워져 국제행사를 위한 기반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 경기가 호황국면에 접어들자 포스코, 현대그룹 등 대기업 사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테헤란로에는 서서히 고층빌딩군(群) 특유의 스카이라인이 형성돼 갔다.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을 계기로 건설이 더욱 활성화되기에 이른 이 지역은 최근에는 스타타워, GS강남타워, 동부금융센터, 강남교보빌딩, 한솔빌딩, 현대산업개발 본사사옥, 메리츠타워 등 대규모 업무용 빌딩과 도곡동 타워팰리스를 비롯한 초고층 주상복합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벤춰기업을 중심으로 하여 강남의 요충으로 자리를 잡았다. 

 테헤란로의 마천루 형성은 서울이 한낱 세계의 변방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제도시로 편입하였음을 알리는 서곡과도 같은 것이다. 어느덧 인구 1천만을 상회하는 서울은 거대도시(megaropolis)가 되면서 뉴욕, 북경, 상파울루, 동경, 파리, 런던, 상하이, 모스크바 등 인구가 비슷한 세계의 다른 도시들처럼 교통 문제, 대기오염 문제, 환경 문제, 슬럼화 문제, 인구밀집 문제, 도시빈민 문제, 빈부격차 문제 등등 산적한 문제들 때문에 숱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한 도시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나는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도시는 그 그늘에 가려진 익명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빌딩의 숲은 수많은 사람들을 쉼 없이 빨아들이고 동시에 뱉어낸다. 거기에 ‘다름(異化)’이 있고 ‘같음(同化)’이 있다. ‘다름’이란 뒤섞이되 엄연한 차이가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며, ‘같음’은 차이를 지닌 각 개체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룰 때 나타나는 몰개성을 의미한다. 도시가 지닌 이 두 얼굴의 속성은, 서울에 빗대어 말하자면, 강남과 강북만큼이나 확연하지만, 그것이 지닌 특유의 익명성에 의해 ‘같음’ 혹은 ‘다름’으로 포장되기 일쑤다. 성냥갑을 닮은 아파트, 기성복, 비슷한 화장술과 유행, 수퍼마켓, 스타벅스, 현란한 쇼핑 몰, 붉은 악마 등등이 ‘같음’의 표지라고 한다면, 서로 다른 입맛과 취향, 색다른 주거형태, 취미의 다변화 등등은 ‘다름’의 표지다. 도시는 대중에게 균질한 기회를 제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취미를 발산할 수 있는 장소를 부여한다. 도시가 그 맥 빠진 듯한 허장성세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매력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처럼 다양한 메뉴를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K-팝아트의 오늘전 도록 서문, 2022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