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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세르 / 예술가와 신체

윤진섭



예술가와 신체

지구와 인간이 다 함께 총체적인 위기상태에 처해 있다.
 -미셸 세르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인류의 대재앙인 ‘코로나 19(Covid 19)’가 야기한 불안과 공포가 무려 이년 간이나 지속되면서 지구촌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점차 바뀌고 있다. 대인 관계에서 직접적 접촉의 금지를 뜻하는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가 생활화한 지는 이미 오래됐고, 전시의 관람이 웹(web)상에서 이루어지는 ‘뷰잉 룸(viewing room)’ 시스템이 점차 정착되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의 증세가 감기 정도로 인식되면서 질병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안이해지고 있지만, 언제 다시 악화될 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다. 

 이처럼 ‘코로나 19’가 낳은 비접촉, 비대면의 ‘언택트 문화’는 향후 전개될 문화예술에도 영향을 미쳐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예술의 향수 형태를 낳을 전망이다. 이를테면 미술의 경우 기존의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미디어아트로 그 세력이 전이, 확장될 것으로 전망된다. 

 공교롭게도 코로나의 발생 이전부터 개발돼 온 각종 디지털 네트워크와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등 발달한 첨단의 기기들에 의해 인류의 생활은 중단되지 않고 영위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비록 실재감은 떨어지지만, 가상공간에서 미술품을 감상하고, 인터넷을 통해 화상회의를 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삶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처럼 편리한 문명의 이기(利器)가 가져온 생활의 직접적 변화는 비대면이다. 미술관이나 극장의 관람도 비대면 예약으로 이루어지고, 각종 공연이나 방송물도 비대면으로 치루어진다. 그 밖에 셀프 주문기로 이루어지는 음식의 주문/배달 시스템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무인카페와 로봇이 커피를 내리는 로봇 바리스타 카페도 생겨났다. 
 코로나가 야기한 불안과 공포는 문화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가령 영화관의 매출이 급감한 반면,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한 콘텐츠 소비는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Ⅱ. 
어느 경우든 몸은 사회적 현상이다. 인간은 고립된 개인의 상태를 떠나 늘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손 크루소는 인간이 그리워 흑인 포로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 친구로 삼고 개를 키웠다. 그는 문명사회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매일 나무둥치에 날짜를 표시했다. 비록 원시에 가까운 생활을 했지만, 그의 몸속에는 문명의 유전자가 깊숙이 각인돼 있었다. 

 이처럼 인간의 몸은 지향성을 지닌다. 인간의 전면에 위치한 얼굴은 앞만 볼 수 있다. 뒤통수는 머리의 뒤에 있지만 불행히도 거기에는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부재한다. 그 부재, 즉 결핍이 머리가 360도 돌아갈 수 있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을 낳았다. 반면에 이러한 상황은 정작 로봇을 낳은 주체인 인간의 몸이 배제되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의 소외’라고 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인간의 얼굴은 대칭적 특징을 지닌다. 얼굴은 코를 중심으로 눈과 귀가 양쪽에 각각 하나씩 있으며 인중을 중심으로 입이 양쪽으로 반씩 나누어진다. 이 균형이 인간의 얼굴을 얼굴답게 만드는 미적 측면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은 인간의 오감 중에서 약 7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감각기관이다. 

 미술은 이 시각과 관련된 인간의 활동 영역이다.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 발생한 모더니티(modernity)를 상징하는 원근법(perspective)은 시선의 지향성, 즉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힘, 즉 ‘시각의 합리화’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근대 이후 서양이 제국주의란 미명하에 세계를 정복한 것은 바로 이 시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시각이 의미하는 몸의 담론은 따라서 플라톤 이후 서구의 지성사에서 오랜 기간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 온 정신으로부터 몸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서구에서 발원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및 그와 관련된 문화현상은 역설적으로 시각에 의해 구성된 모더니티의 결과에 대한 반성적 국면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여성에 관한 담론, 동양에 관한 담론, 제3세계의 문화와 예술에 관한 담론 등등 서구 중심의 주류문화가 거센 저항을 받으면서 그동안 소외돼 온 다양한 가치들이 조명되기에 이른 것이다.     


Ⅲ. 
예술가와 신체의 관계를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른바 해체의 이미지이다. 몸과 관련하여 볼 때, 예술가에게 가장 직접적인 것은 자신의 신체이다. 고전적으로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들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해가는 자신의 얼굴을 통해 정신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서 빛이 낳은 음영의 깊이는 이러한 정신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다. 

 몸의 담론과 관련시켜 볼 때,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지닌 종교적 법열과 맞먹는 정신성은 현대에 이르러 급격한 해체의 징후를 보인다. 윌렘 드 쿠닝의 폭발할 듯한 여성의 해체적 이미지를 비롯하여 바닥에 펼쳐진 거대한 캔버스 위를 누빈 잭슨 폴록의 드리핑, 이브 클랭의 누드 퍼포먼스, 피에르 만조니의 통조림 똥에 이르기까지 몸의 급진성이 미술사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만조니의 똥 이후에 나타난 다양한 신체(body) 퍼포먼스의 양상 중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작품들은 프랑스의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이야기한 ‘애브젝트(abject)’의 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계열의 예술가들은 이른바 오랜 가부장적 지배체제하에서 억압되고 왜곡돼 온 여성에 대한 관념을 전유와 전복의 전략을 통해 교정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일부의 급진적인 퍼포머들은 피, 똥, 오줌, 생리혈, 구토, 오물, 고름과 같은 천한 물질들의 공공연한 노출을 통해 가부장적인 상징계를 위협했다. 자신의 질에서 여성주의에 관한 텍스트가 적힌 두루마리를 꺼내며 읽는 캐롤리 슈니만의 퍼포먼스와 얼굴 성형수술을 통해 끊임없이 다른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오를랑의 퍼포먼스가 이에 속한다. 


Ⅳ. 
다음에 살펴볼 것은 기술과 예술의 관계가 어떻게 몸의 개념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터넷을 이용한 퍼포먼스는 광역의 예술개념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의 양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인터넷을 이용하여 퍼포먼스를 한 작가로 가장 주목되는 사람은 호주 출신의 스텔락(Stelarc)을 꼽을 수 있다. 일본에 오래 거주한 스텔락은 벌거벗은 몸에 갈고리를 꿰어 천정에 매달린 퍼포먼스를 필두로, 차들이 붐비는 도심의 수십 층 높이 빌딩 사이에 와이어를 설치한 뒤, 역시 벌거벗은 몸에 갈고리를 꿰어 매달린 퍼포먼스를 행했다. 스텔락 퍼포먼스의 진가는 인터넷을 활용하면서 배가되었

 사이버 보디 아티스트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스텔락에게 더 큰 유명세를 안긴 것은 제3의 손이라고 부르는 불수의근 신체(involuntary body)이다. 그는 전선이 얼기설기 엉킨 인공 로봇 팔을 몸에 부착하고 퍼포먼스를 벌였다. 2000년 서울국제행위예술제에 참가차 서울에 온 그는 선재아트센터에서 강연을 하면서 이 제3의 손을 몸에 장착하고 시연을 했다. 
 
Ⅳ. 
가상현실이 됐든 증강현실이 됐든,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NFT나 메타버스(Metaverse)가 됐든지 간에, 미디어로서 예술가와 신체의 관계는 화가나 조각가의 경우처럼 예술적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대리물로서의 신체가 아니라, 신체 자체가 주제가 되는 시대의 문을 열었다. 즉, 이는 다시 말해서 예술을 위해 예술가가 자신의 신체를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예술을 위해 스스로 존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텔락의 불수의근, 올랑의 성형수술은 그런 의미에서 자족적이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경호의 정처없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비닐 봉지는 일종의 전령사이다. 이경호의 손에 든 카메라와 허공 높이 치솟은 드론의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비닐 봉지는 정처없이 지상을 떠다니는 영혼의 한 유비(analogy)이다. 그것은 한편의 시이기도 하고 피폐해서 더 이상 기댈 데가 없는 버림받은 영혼이 마지막으로 흔드는 흰 손수건처럼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에 김석환은 자신의 얼굴을 노끈으로 칭칭 감거나 날고기를 씹어먹는 행위를 통해 신체의 직접성을 추구해왔다. 제의에 뿌리를 둔 그의 행위는 신체 자체를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글의 주제에 부합한다. 김석환의 퍼포먼스는 제의적 측면에서 오스트리아의 행위예술가 헤르만 니취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 헤르만 니취가 목표로 삼는 사회정화, 즉 고통과 대속을 통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단 니취의 행위가 디오니소스 축제를 비롯하여 십자가 책형, 양의 도살 등 기독교에 뿌리박은 서양의 오랜 문화적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반면, 김석환은 개인적인 발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장내에 들어서면서 호각을 부는 것으로 행위를 시작하는 심홍재의 퍼포먼스는 동양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주역의 12간지가 중요한 개념의 설정이다. 그는 12개의 서로 마주 보는 흰 종이에 먹을 듬뿍 머금은 큰 붓으로 12간지를 한자로 쓴다. 여기서 행위자의 신체는 의미의 전달자로 작용한다. 품바 스타일로 유명한 성능경 퍼포먼스의 핵심은 관객과의 소통이다. ‘소통의 불통’을 주장하는 그는 그러면서도 불통의 벽을 깨기 위해 일상에서 채집한 경구가 적힌 탁구공을 관객을 겨냥해 새총으로 쏜다. 간간히 터지는 촌철살인의 유머는 성능경의 퍼포먼스에 기름을 친다. 문재선 역시 소통을 중시하는 퍼포머다. 통신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장비를 등에 짊어진 채 안테나 같이 생긴 가늘고 긴 금속 막대를 양손에 든 문재선의 모습은 한 마리의 검은 파리를 연상시킨다. 성백은 천으로 된 긴꼬리가 달린 공 모양의 물체를 십여 미터 앞에 세워진 철판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던지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둥근 물체에는 검정 혹은 붉은 색이 뭍혀 있어 철판에 부딪힐 때 마다 요란한 굉음이 터진다. 대중의 의식을 깨우는 소리다. 이쯤에서 다시 퍼포먼스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Ⅴ. 
'오늘날 퍼포먼스는 선사시대의 동굴생활을 동경한다. 몸의 외침은 벌거벗은 인간으로의 원초적 회귀 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미분화된 사회, 그리하여 사회의 전체상을 살펴보기 어려워진 이 시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이다. 오늘날 웹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쪽방들(cells)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거대한 퍼포먼스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대변되는 사회적 관계망은 근대 이전(pre-modern)으로의 회귀 의식을 주재하는 원환 운동의 도구인 것이다. 모더니티의 선형적 진행에서 리좀적 가지뻗기로의 선회, 이 어찌 축복이 아닌가.” (필자, <몸의 언어>(터치아트, 2009)

 나는 지금 광활한 몽골의 초원에 서 있다. 몽골의 초원은 바람만이 역사를 쓰던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양을 비롯한 가축이 죽어 썩으면 독수리나 들짐승이 먹는다. 초식동물인 소나 말, 양의 똥은 초원 위에서 삭고, 죽은 동물의 뼈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몽골에는 매장 풍습이 없다. 몽골의 자연미술가 바다(Batsaikhan.S)는 이십 오년 전만해도 사람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가다 뭔가에 부딪혀 떨어지면 그대로 두는 풍습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연의 순환이 아닌가. 드넓은 초원 위에 널린 흰 동물의 뼈들과 똥들. 천신을 믿는 몽골인들은 하늘을 향해 예를 올린다. 텡그리(Tengri) 신앙의 산물이다. 나는 몽골의 자연미술가 그룹이 주최한 [Mongolian Nomad Project 2022]에 참가차 이곳에 왔다가 이 글을 쓰고 있다. 물질의 풍요,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잠시 무소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초원의 저 너머에 보이는 작은 초막을 바라보며, 예술가의 신체가 욕망의 다른 이름은 아닌지 잠시 생각에 잠겨보는 것이다.

더원 미술세계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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