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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와 실험 : 60-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과 해석

윤진섭




전위와 실험 : 60-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과 해석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내가 김구림을 비롯하여 정찬승, 정강자, 고호 등등 ‘제4집단’이 발표한 1970년의 해프닝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에 대한 기사를 처음 접한 것은 ‘선데이 서울’을 통해서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일찍이 중학교 시절부터 미술과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한국단편문학전집에 실린 이상(李箱) 김해경(1910-1937)의 시 <오감도>를 비롯하여 소설 <날개>, <지주회시(蜘蛛會豕> 등등 다다(Dada) 풍(風)의 난해한 문학작품을 읽으며 전위예술에 빠져들었다. 따라서 ‘선데이 서울’에 실린 기사는 감수성이 풍부한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것은 행렬의 뒤에서 관(棺)을 들고 광화문 거리를 걸어가는 키가 크고 머리가 긴 정찬승(1942-1994)의 모습이다. 당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 <신동아>지의 기자 장윤환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제4집단의 무체사상(無體思想)과 순수화합을 뜻한다는 집단의 상징인 백기(白旗)를 든 김구림(金丘林)을 선두로 50m 뒤에 역시 백기를 든 정강자(鄭江子)가 뒤따르고 손일광(孫日光)과 임(林)중웅이 꽃으로 장식된 관을 메고, 정찬승(鄭燦昇) 최(崔)영식이 태극기를 들고 뒤따랐다.”

 훗날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며 이 기이한 행렬이 ‘해프닝(Happening)’이란 것을 알았지만, 당시만 해도 나의 눈에는 그저 예술가들이 벌이는 기행(奇行)쯤으로 비쳤다. 

 한국의 해프닝은 이처럼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문화적 토대 위에서 1950년대 후반, 앨런 카프로(Allen Kapraw) 등에 의해 주도된 미국의 해프닝과는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전개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은 미국의 해프닝을 <TIME>이나 <LIFE> 등등 해외잡지에 난 사진 몇 장을 통해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독특한 상상력에 의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독자적인 해프닝을 창안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의 <가두시위>(1967), <한강변의 타살>1),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1970) 등등 한국의 초기 해프닝은 훗날 민중미술 작가들에 의한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맹아(萌芽)로써, 사회 풍자 내지는 정치적 시위의 성격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Ⅱ.
 내가 미술대학에 진학한 해는 1975년이다. 이 시기는 한국 초기의 해프닝인 <가두시위>와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2)이 벌어진 지 만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결실을 맺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이 산업화하는 징후들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었으며, 2년 뒤인 1977년에는 수출이 1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나는 일찍이 전후 한국 사회가 맞이한 이 시기를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 시대로 묘사한 바 있다. ‘희망’이란 근대화 정책이 전례 없이 눈부신 경제적 도약을 가져온 결과를 이름이요, ‘절망’이란 “그러한 경제적 도약의 이면에 목표 달성을 위해 자행한 인권의 탄압”이 가려져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3)  
 
 한국현대미술사에서 197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특히 1975년은 박서보(1931- )를 중심으로 한 한국미술협회가 1972년의 [앙데팡당]전을 필두로 [에꼴 드 서울]과 [서울현대미술제]를 잇달아 창설한 해였다. 전국적 규모의 이 전시회들은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는데4), 특히 [에꼴 드 서울]전과 [서울현대미술제]는 김창열, 박서보, 정상화, 정창섭, 정영렬, 윤명로, 윤형근 등등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미술사상 최초로 전위적 노선을 지향한 비정형 회화(Informel) 세력의 복권을 의미한다. 즉,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화단을 점유한 비정형 회화가 단색화란 이름의 새로운 운동 주체세력으로 재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은 비정형 회화 세대의 제자들이었다. 이른바 ‘탈(脫)평면’을 주장한 이들은 자신들의 예술 이념과 가치를 캔버스를 벗어난 사물이나 행위, 사건에 두었다. 이들은 오브제의 미학을 신봉하며 해프닝과 같은 전위적 제스처를 선호했다. 따라서 무동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의 작업은 실험. 무에서 출발. 창조만을 위한 행동이다.”(무동인 선언/ 1967)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의 각본을 쓰는 등 당시 이들의 활동을 비평적으로 적극 옹호한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이들의 활동에서 스승 세대와는 다른 이념의 격차를 발견했다. 196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을 통해 등단한 오광수는 이른 화단 활동을 통해 그 차이를 체험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차이란 과연 무엇인가? 오광수는 1957년에 결성한 <현대미술가협회>와 1960년에 창립한 <60년미협>을 ‘앵포르멜’이란 동질의 이념적 결속체로 파악한 반면, <청년작가연립전>을 구성하는 <무동인>, <신전>, <오리진>의 이념은 다소의 격차를 보인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연립전의 구성내역을 살펴보면, 「무동인(無同人)」이 62년에 출발하고 있고 「오리진」이 62년에 출발하고 있으며 「신전(新展)」이 65년도에 출발한 「논꼴」멤버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 실상 이들의 연령차는 3년 내외로 압축되고 있다. 「무동인(無同人)」은 63년에 창립전을 가진 후 한동안의 침묵을 지키다가 67년 「현대미술의 실험전」이란 표제와 전시를 기해 재기하고 있다.”
 -오광수, <냉각된 열기와-혼미와 모색>(1966-1970), 한국의 추상미술-20년의 궤적, 서울 중앙일보사, 1979- 

 이 글의 주제와 관련지어 볼 때, 세 개의 그룹 중에서 가장 선두주자인 <무동인>이 <한국청년작가연립전>보다 약간 앞서 [1차 현대미술의 실험전]을 연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전시명에 ‘실험’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한 ‘실험’이란 무엇인가? 한국미술사에서 실험이란 용어는 곧 전위(avant-garde)와 유사한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때로 ‘현대미술(contemporary art)’과 거의 동격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는 물론 관용적인 표현이지만 [국전]을 보수의 대명사로 간주할 때, 그 반대급부로서 ‘현대미술’은 그 이면에 실험적인 미술 혹은 전위미술(avant-garde art)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내가 한국 전위미술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던 <ST>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할 때, 나는 실험미술이나 전위미술을 최첨단의 ‘현대미술’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당시 이 용어들은 미술계에서 그와 유사한 맥락에서 통용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전위’라는 용어는 그보다 훨씬 앞서 사용된 전례가 있다. 미학자인 백기수는 <세대>지 1968년 9월호에 전위미술을 어원적 측면에서 파악했다. 그는 전위란 “군사용어로서 본대에 선행하여 전방을 호위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사전적인 의미를 부여한 뒤, “전위예술(l'art d'avant-garde)>은 기존의 인습적이며 전통적인 예술 경향이나 관념과는 달리 그 시대의 첨단을 걷는 혁신적(革新的)인 예술 경향 내지 작가를 지칭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백기수는 이 글을 한국현대미술에서 본격적인 전위의 출범을 알리는 <AG> 그룹의 창립보다 1년 전에 썼다. 당시 지식인들이 보는 잡지가 <사상계>, <신동아>, <공간> 등등 숫자가 극히 제한돼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 글이 어떤 형태로든 한국 전위예술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특히 필자인 백기수가 당시 서울대 미학과 교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 권위와 영향력은 더욱 배가된다. 

 1969년, <AG> 그룹의 등장은 ‘전위’라는 용어를 선언적으로 분명하게 밝힌 최초의 그룹이었다. 이들은 전위 그룹의 결성에 필수적인 기관지를 발행하고 그 서두에 “전위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젼 빈곤의 한국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하여 한국 미술 문화 발전에 기여한다”5) 고 자신들의 이념을 분명히 밝혔다. <AG> 그룹은 <전위예술론>을 쓴 레나토 포지올리(Renato Poggioli)가 전위운동이 갖춰야 할 3가지 요소로 든, 그룹, 기관지, 선언문을 갖춘 단체였는데, 그 보다 앞서 ‘논꼴’ 동인(1965)이 이 삼박자를 갖췄으나 단명했다.  

  같은 해인 1969년에 미술평론가 이일의 유명한 <전위예술론>이 나왔다. 이일은 “전위미술론-그 변혁의 양상과 한계에 대한 시론>을 통해 전위가 “예술적 표현과 연결될 때 가장 정의하기 힘든 용어의 하나”임을 토로했다. 또한 그는 이 글에서 어떤 특정한 경향이나 유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 뒤, 전위의 자기 부정적 성격을 뚜렷이 했다.  

 앞에서 인용한 백기수의 글과 그 이듬해에 나온 이일의 글을 염두에 둘 때 당시의 문화적 풍토에서 ‘전위’가 그다지 생소한 용어가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전위, 실험, 현대미술과 같은 용어들은 서구의 사조들을 수용하기에 급급했던 당시 화단 현실에서 개념이 엄밀하게 정리되지 못한 채 혼용된 측면이 있는데, 이러한 관습은 한국 전위미술의 개화기(開花期)라고 할 수 있는 70년대에도 거의 유사했다.  

 미술평론가 이일이 60-70년대 전위예술론이나 단색화론을 통해 모더니즘 진영의 이론적 지지를 담당한 반면, 훗날 민중미술 비평의 핵심적 비평가로 활동한 미술평론가 김윤수는 그 반대급부로 서구추수적 모더니즘의 폐해를 지적했다. 그는 수년 동안 한국의 예술계에서 전위의 역할이나 비중이 커지고 있는 추세는 인정하면서도 한국의 전위가 지닌 태생적 한계, 즉 이식(移植)의 맹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의 날을 세웠다.  

 “지금까지는 대개 외국의 전위예술을 그때그때 옮겨온 것이거나 아니면 거기에다 약간의 변경을 가하여 뭔가 놀랍고 신기한 것을 만들어 보이고 개중에는 전통예술과의 접합을 시도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건 우리의 현실에 밀착하지 못한 채 한갓된 모드나 팝송처럼 유행하고 폐기해온 감이 없지 않다.”6)

 김윤수의 당시 비평적 태도나 입장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이 글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전위미술이 서구추수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문화 접변의 시기에 품었을 창작과 비평을 둘러싼 작가들과 비평가들의 정신적 고뇌를 도외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잘 알려진 용어를 빌리면 ‘새것 콤플렉스’는 때로 독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약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선진 문화나 예술에 대한 창작인들의 과잉 욕구가 낳은 모방과 표절은 그런 의미에서 ‘독’이라고 한다면, 표현과 재료, 방법을 둘러싼 세련된 조형 언어들이 국제화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측면에서 보면 약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김윤수가 이 글을 쓴 해는 마침 이건용의 <신체항>7)이 파리비엔날레에서 호평을 받은 때였다. 나는 이건용의 이 작품을 한국미술의 국제화 시대의 포문을 연 문제작으로 삼고 싶다. 한국미술의 해외 비엔날레 출품 역사를 놓고 볼 때 이건용의 <신체항>은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분기점이 돼 준다. 이 작품이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 언론에서 얻은 높은 호응과 찬사, 장 자크 레베크를 비롯한 비평가들의 주목 등은 가히 대대적이었다. 두부모처럼 반듯하게 자른 흙더미 위에 거대한 나무 둥치를 올려놓은 이건용의 <신체항>은 이건용의 출세작이기도 하거니와, 한국 모더니즘 전위미술의 실상을 잘 드러낸 수작(秀作)이었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이건용은 다음과 같이 썼다. 

 “1973년 파리비엔날레에 「신체항(身体項)」이라는 입체구조물을 발표하고난 후 신체를 하나의 상태성으로 응고시키는 데서부터 어떻게 하면 그것을 행위로써 해소시킬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행위해 본 것이 75년 백록(白鹿)화랑에서 발표한 「오늘의 방법전」의 이벤트였지요. 그후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 윤진섭등과 그룹으로 개인적으로 서울, 대구, 광주등지에서 몇개의 이벤트가 행해졌습니다.”
 -이건용, <행위의 장으로서의 만남-에저또와 해프닝, 이벤트, 판토마임>, 공간 132호 1978.6월호, 46-49쪽-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60-70년대에는 모더니즘이 강세를 보이고 있었으며, 이와 반대되는 현실주의 경향의 미술은 반짝 맹아를 보이는 듯 했으나8) 사라지고, 1979년 <현실과 발언> 동인의 창립을 계기로 현실화되었다. 김윤수는 80년대 이후 민중미술의 전개 과정에서 민중미술가들의 활동을 현실주의적 비평관을 통해 전폭적으로 지지한 인물이었다.    
 

Ⅲ.
 전후(戰後) 한국미술에서 구상성과 재현의 배제는 곧 근대성(modernity)의 학습을 의미했다. 물론 그것의 진원지는 서구(西歐)였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선전9)을 본 따 만든 국전10)이 지향한 구상성과 재현은 국전이란 구체제에 저항한 50년대의 비정형 회화 세대에게는 부정해야 할 낡은 가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추상(抽象)은 곧 근대성(modernity)의 대명사였다. 그들은 밖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구상적 형식이나 재현적 기법은 전쟁이란 극한적 상황을 체험한 자신들의 감정을 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서로 용해되어 있는 상태이다. 어제와 이제, 너와 나, 사물 모든 것이 철철 녹아서 한 곳으로 흘러 고여있는 상태인 것이다.....지금 ‘나’는 덥기만 하다. 지금 우리는 지글지글 끓고 있는 것이다.”11)  
   
 ‘철철 녹아서 한 곳으로 흘러 고여있는 상태’란 곧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지 않은 ‘비정형(非定形)’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극한적인 전쟁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허무와 영도(零度)로의 환원은 한 세대 아래인 ‘AG’선언문에 나타난 ‘환원’과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는가. 비정형의 회화 세대에게 있어서 내면이 투사된 풍경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나는 그것을 일러 ‘몸의 투사(投射)’라 부르련다. 찐득찐득한 점액질의 물질성과 광포(狂暴)한 느낌을 자아내는 거대한 캔버스 안의 스산한 풍경들. 전쟁세대의 산물인 비정형 회화가 ‘몸성(性)’에 기반한 물질감을 추구했다고 한다면, 4.19세대에 해당하는 [청년작가연립전]과 ‘AG’, ‘ST’는 다 같이 개념미술(conceptual art)로 향하는 다리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60년대 후반부터 예술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태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태도는 오브제, 설치, 해프닝 등 ‘탈(脫)평면’의 방법론을 통해 화단에 확산되었는 바, ‘ST’에 이르러 보다 정교하게 세분화됐기 때문이다.12)  

 매우 과감하게도 ‘ST’회원들의 활동을 ‘현대미술의 세계사 문맥에서 파악하고자 시도한 사람은 미술평론가 김복영이었다. 그는 20세기의 “주도적인 추상주의가 완전히 종결되고 새로운 에포크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해프닝을 들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에포크란 과연 무엇인가? 김복영은 “플라톤주의적 절대 형상의 추출이라는 지루한 사고방식이 완전히 제거되고 새로운 사상에 대한 철저한 희구가 용솟음치는” 계기가 바로 해프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지향점이 바로 ‘자연’으로의 회귀라고 생각했다.13) 

 김복영이 본 이러한 관점은 불과 3년 후에 한국의 대전과 공주에서 일어난 자연미술운동 ‘야투(野投)’의 탄생을 예견한 것이었으니 실로 탁견(卓見)이 아닐 수 없다. 

 
Ⅳ.
 1960년대 이후 불, 물, 바람, 연기, 구름, 안개 등 비(非)물질 작업을 해 온 이승택은 아마도 한국화단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이른바 ‘거꾸로’를 작업의 모티브로 삼은 그는 남이 하지 않은 작업을 하며 그것은 그만큼 독창성을 살리는 요체가 되었다. 이 비물질적 작업에 대해 이승택은 “이것은 오지나 비닐과 달리 뚜렷한 비물질적인 소재에 대한 나의 관심이었으며, 그 자체의 물질적 편집이 아니라 비시각적인 공기를 시각화하려고 노끈과 헝겊, 한지들을 등장시켰다. 공간을 통해서 형과 색, 바람에 의해 펄럭이는 소리와 움직임으로써 4차원을 시도한 새로운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14) 고 말했다. 

 <AG>, <ST>와 함께 70년대의 대표적인 전위 그룹 가운데 하나인 <신체제>의 멤버인 이강소는 1974년에 집단적 현대미술의 발표장(發表場)이었던 [대구현대미술제]를 창설한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한 [서울현대미술제]보다 1년 전에 창립된 이 현대미술제는 전국적인 규모의 것으로는 최초였다.15) 

 한국의 전위미술과 관련져 볼 때, 대구현대미술제가 기여한 공로는 야외에서 행한 ‘이벤트’였다. 이벤트는 개념미술 위주의 설치, 오브제와 함께 19070년대 한국 전위미술의 중핵을 이룬다. 이강소는 1979년 대구시의 근교인 강정에서 열린 이벤트에 대한 장문의 르뽀 기사를 <공간>지에 기고, 생생한 증언을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강정에서 작업들이 끝났을 때 그곳을 떠나는 관중들의 표정은 정말 흥미가 있었다. 야릇한 웃음기를 띤 얼굴들, 장난기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진지한 속을 버리지 않는 어정쩡하게 흥분된 얼굴들, 술 한잔 먹는 것, 밥 먹는 것, 취한 아낙네, 모든 것을 이벤트(?) 작업으로 연결시킨다.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리던 것을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묘한 자기 해석을 해보려고 하는 짓거리가 얼마나 재미있고 흐뭇한지 이러한 작업들의 강점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행위작업을 하는 작가의 수가 열손가락을 꼽을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이고 보니 또 그 작업량이 적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16)    
 
 이처럼 이벤트는 소수의 작가들 사이에서 행해졌던, 당시로서는 첨단을 걷는 전위적 퍼포먼스였다. 70년대를 통해 이건용, 김구림, 이강소, 이승택 등등 예술의 첨단을 신봉하던 작가들이 해프닝과 이벤트를 행한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전혀 우연이 아니다. [앙데팡당]전의 경우에서 보듯이,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등 국제전에 참가한 작가들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건용과 이강소의 경우에서 보듯이, 설치작업(이건용의 <신체항>)과 이벤트(이강소의 닭(무제-75031))에 특화돼 있었다.17) 


Ⅴ.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는 제1회 서울비엔날레를 열면서 장차 국제전으로 발돋움할 것을 희망했지만 1회전으로 막을 내렸다. 따라서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창조하려는 야심 찬 계획은 교묘한 화단정치의 장막에 가려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젊은 세대의 도전”은 말 그대로 “모험과 시련의 연속”을 겪다 종장(終章)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김구림, 김동규, 김청정, 김한, 박석원, 박종배, 서승원, 송번수, 신학철, 심문섭, 이강소, 이건용, 이승조, 이승택, 조성묵, 최명영, 하종현 등 <AG>의 멤버들은 작고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현재 한국화단의 원로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화단의 최정예 멤버인 이들은 그룹 이름이 말해주듯이 전위미술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전후(戰後)의 혼란과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한국의 현대미술은 당대의 발언을 계속해 왔다. 6.25 전쟁 세대에 의한 비정형 회화를 필두로 60년대 후반의 [청년작가연립전], <AG>, <ST>를 잇는 4.19세대의 실험적인 몸짓들은 한국 전위미술의 맥을 이어왔다. 그 후 근 6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은 절대빈곤의 가난을 딛고 이제 1인당 국민소득 3만 5천 달러를 넘어선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이제 태권도를 비롯하여 싸이(PSY)의 강남스타일, BTS, 드라마 <오징어 게임>, 영화 <기생충>, <미나리>, 단색화(Dansaekhwa) 등등 세계에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상징물들이 점점 더 늘어가는 추세다. 이 짧은 글 속에서 60-70년대 한국의 미술계를 기술한 글들을 정리하다 보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나른한 봄날이 지나가듯이.   



ㅡㅡㅡㅡㅡ
1) 1968년 10월 17일, 제2한강교 다리 밑에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벌인 해프닝. 

2) 이 두 개의 해프닝은 [청년작가연립전](1967.12.11-16/중앙공보관)에 참가한 ‘무’동인과 ‘신전’동인 멤버들이 벌인 것이다. ‘무’ 동인의 최붕현, 김영자, 임단, 이태현, 문복철, 진익상 등과 ‘신전’ 동인의 강국진, 양덕수,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정찬승이 연합하여 한국 해프닝의 첫 물꼬를 텄다. 그 중 ‘가두시위’(1967.12.11)는 ‘행동하는 화가’, ‘현대미술관이 없는 한국’ 등 정치적인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두 그룹의 멤버들이 소공동에서 광화문까지 행진을 한 이색 퍼포먼스였다. 
[청년작가연립전]을 기점으로 한국의 전위예술을 통사적으로 살핀 전시로는 [공간의 반란-한국의 입체·설치·퍼포먼스 1967-1995](기획 : 윤진섭/주최 : ‘95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정도 600년 기념관)이 있다. 

3) 윤진섭, 1970년대 한국 단색화의 태동과 전개,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서진수 편저, 마로니에북스, 2015, 69쪽.  

4)  한국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처음 세워진 것은 1969년이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경복궁 안에 있었다. 1972년에 제1회 [앙데팡당전]이 여기서 열렸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듬해에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 제2회 [앙데팡당전]부터는 이곳에서 열렸다. 

5)  AG, No.3. 1970, 한국아방가르드협회 발행, 16쪽. 

6)  김윤수, <전위예술은 퇴폐가 아니다 : 창조의 활력과 독창성이 전제>, 동아일보, 1973년 1월 23일. 

7)  이건용의 <신체항>이 맨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의 <미협>전에서 였다. 이후 이건용은 동일한 내용과 제목의 <신체항>을 십 수 개의 버전으로 제작하였다. 

8)  1969년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이던 오윤, 오경환, 임세택 등이 결성한 동인으로 장문의 <현실동인> 선언문은 김지하가 썼다. 그러나 이 전시는 불발되었다. 

9)  ‘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

10)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약칭

11) 현대미술가협회+60년미술가협회 연립전 선언문 중에서 

12) 가령 이건용의 로지컬 이벤트(Event Logical), 성능경의 <신문읽기>, 김용민의 <걸레짜기> 등. 

13) 김복영, <대지를 만들고 세계를 여는 사람들-ST전의 의미>, 1977년 제6회 [ST전] 도록. 

14)  이승택, <한국적인 소재와 나의 것>, 공간, 145호, 1979년 7월호 

15)  물론 대구현대미술제 이전, 전국적 규모로 가장 큰 현대미술제로는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한 [앙데팡당]전이 있었다. 1972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 전시는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전 참가 작가 선정이 가장 큰 이슈였다. 1975년에 창립된 [서울현대미술제]는 주최측인 한국미술협회가 1973년에 창설, 개최 사실을 언론을 통해 알리기도 했지만, 불발되고 말았다. 1974년에 창립된 대구현대미술제는 이듬해에 열린 서울현대미술제를 비롯해서 광주, 부산, 전주 등등 전국적 현대미술제의 붐을 이루는 단초가 되었다. 

16)  이강소, 공간 제147호, 1979년 9월호 73쪽. 

17)  1970년대 당시만 해도 한국은 베니스비엔날레의 참가국이 아니었다. 문공부에 의해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국제전 참가의 선정권이 한국미술협회에 위임돼 있었으며, 한국이 베니스비엔날레에 처음 참가한 것은 1986년이었다.  



1차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국실험미술 60-70년대> 도록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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