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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진리

윤진섭



사물의 진리


윤진섭 | 미술평론가



Ⅰ.
 돌이켜 보면 꿈 속을 헤맨 것처럼 지난 세월이 아득하다. 인생 칠십이 코 앞이요, 화단 생활이 오십 년에 가까운데, 쌓인 종이 뭉치를 바라보니 한숨만 저절로 나온다. 왜 아니 그러하겠는가? 장강천리(長江千里)에 나룻배 하나 외롭게 떠 있는 형국이니, 다가올 세월이 두려운 터라 그러하지 않겠는가. 

 나는 농촌 출신이다. 그것도 충청남도 성환, 개구리 참외로 유명한 곳이다. 안성평야가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 저 멀리 평택 시가(市街)가 어렴풋이 보이고, 삐죽 솟아오른 산에는 학(鶴) 한 마리가 단정히 앉았는데, 커서 중학교에 진학해 보니 그게 다름 아닌 충혼탑이더라는 사실. 

 네댓 살 먹은 아이의 눈에 비친 대상과 사춘기 소년이 눈으로 직접 본 ‘사물’ 사이에는 이처럼 꿈과 현실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니까 꿈과 현실이라는, 이 대립적이며 때로는 원환적(圓環的)인 구조 사이에서 오갔던 것이 바로 나의 삶이더라는 것. 이것이 인생 최대의 사고1)를 겪은 후에 든 생각이다. 

 이 뜻밖의 사고를 둘러싼 이야기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생략하련다. 그것은 별도의 장(章)이 필요하니까. 그러나 간략히 설명하자면, 그 사고로 인해 나의 삶이 그 전(前)과 후(後)로 나뉠 만큼 확연히 달라진 것만은 확실하다. 다음은 전기(前期)의 예술적 삶에 대한 설명이다. 


Ⅱ.
 아이는 커서 평택중학교에 진학한다. 1968년도2)의 일이다. 물론 입시를 거쳐서였다. 아직 겨울의 쌀쌀한 냉기가 가시지 않은 3월의 꽃샘 추위에 몸을 떨며 소년은 미술실에서 손에 쥔 목탄 한 조각에 황홀해 한다. 소년에게 있어 흰 석고상과 이젤, 종이는 완전한 ‘신세계’였다. 

 나의 중학교 시절은 미술과 문학 사이를 오간 방황기였다. 사춘기에 접어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나는 우연히 접한 이상(李箱) 김해경의 시와 소설에 빠졌으며3), 거기서 다다(Dada)를 비롯한 전위예술의 세계를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훗날 장성하여 내 예술과 삶의 기조가 된 ‘전위(avant-garde)’의 정신적 토양이 이때부터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일부러 공부 잘하는 모범생4)의 길을 거부하고 일탈(逸脫)을 일삼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로 밝히면, 나의 부모님(부:윤흥기(1908-1995), 모:정수연(1912-2004))은 3.1운동을 유년시절에 겪은 세대로 슬하에 팔 남매를 두었는데, 막내인 나의 위로 내리 누나 다섯과 형 둘이 있다. 큰 누나 윤순례는 1932년생으로 훗날 스승과 비평계의 선배로 모신 이 일, 유준상, 이구열 선생과 동갑인데, 이분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미술반 활동과 동시에 내면에 잠재된 문학에의 열정5)은 때로 혼란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어려서부터 호기심만은 왕성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뭘 하든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의 이 불간섭주의가 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키운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시골 태생인 부모님은 학교에는 근처에도 못 간 처지였는데도 선친은 한글은 물론 한자도 스스로 깨우쳤고, 어머니 역시 언문을 배워 성경책이 닿도록 청홍(靑紅) 두 가지 색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다. 하도 읽어 나달나달해진 성경책이 평생 십 수권에 이른다. 그 무렵 학교도 가기 전 나의 취미는 어머니 성경책의 간지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가령 누가복음이 끝나고 요한복음으로 들어가기 전에 백지가 한 장 있는데, 그런 곳이나 흰 여백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어머니 말씀이 “하루는 교회의 목사님이 보시고 꾸중을 하시더라”고 했다. 그러나 그 뿐, 그 뒤로 어머니는 막내가 뭘 하든 쓰다 달다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시골 농촌 출신인 덕에 어려서부터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나는 지금도 그 점을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나중에 글을 쓰게 되면서 유년시절의 추억이 많이 등장하는데, 시골의 자연과 풍물은 내 예술의 풍부한 소재의 보고(寶庫)이다. 중학교 시절에 살던 시골집은 친구의 말을 빌리면 대궐 같았는데, 안방 위에 딸린 골방 구석에서 가라는 학교는 안 가고 책에 빠져 지내는 날이 많았다. 나중에 가긴 했지만, 학교에 내야 할 수학여행 경비 3,400원을 안 내고 평택 시내에 있는 을지서점에서 붉은 바탕에 금박글씨와 문양이 번쩍이는 호화양장본 책 세 권을 샀다. 갓 나온 동화출판공사의 세계문학전집이었다. 그 중에 아꾸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892-1927))의 단편소설 <하동(河童)>이 있었다. ‘갑파’라고 하는, 마치 거북이처럼 생긴 반인반수의 생물이 지하와 지상을 넘나드는 신비스런 세계의 이야기였다. 소설을 번역한 고(故) 한운사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저자인 류노스케는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한국의 남도 지방에 머물면서 민속을 탐구한 적도 있다고 작품해설에 썼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한 여세를 몰아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에 응모했더니 덜컥 당선이 됐다. “나 이 일인데요....” 인생의 신산을 겪고 잠실 동네에 있는 독서실에 한 달간 처박혀 쓴 <로즈 셀라비여, 왜 재채기를 하는가?>를 신문사에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전화벨 소리에 무심코 든 수화기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저 윤아무개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제자인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시는 눈치였다. 용건은 글은 좋으나 끝부분이 좀 부족한 듯 하니 약간만 보완해서 제출하라는 말씀이었다. 다음날 원고를 들고 동아일보사 문화부로 이용우 기자를 찾아가니 “그 윤진섭이가 바로 윤선생입니까?” 하고 놀라는 것이 아닌가? 이 기자는 당시 행위예술에 대한 기사도 여러 번 쓰고 해서 서로 아는 사이였다.  

 여담이지만 1970-80년대에 나는 미술계에 이름이 제법 알려져 있었다. 1976년, 미술대학 2학년 때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한국미술대상전]6)에서 얼음의 가운데를 검정색 구두끈으로 묶어 녹는 과정을 촬영한 사진작품으로 입선을 한 이후7), 이듬해인 77년에 서울화랑에서 이건용 선생과 2인 이벤트 <조용한 미소>를 벌였다. 이때 <물과 종이>, <노랑구두>, <돌과 반죽> 등 세 개의 이벤트를 발표했다. 그 무렵 미협이 주최하는 [앙데팡당]전이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각종 국제전에 참가할 작가를 이 전시회에서 뽑았기 때문이었다. 이건용 선생은 1973년 [파리비엔날레]의 출품작인 <신체항>이 현지 매스컴의 각광을 받자 그 여파로 국내 일간지의 문화면 톱을 장식하며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나는 1977년의 [앙데팡당]전에 아,이,우,에,오 하고 모음을 발음하는 입 모양을 찍은 얼굴 사진과 같은 단어를 시멘트 바닥에 물걸레로 쓰는 동작을 찍은 사진8)을 각각 한 조로 12개 패널에 부착, 출품했는데, 의외로 인기가 좋아 미술평론가 방근택 선생이 <<현대예술>>지에 간단한 리뷰를 쓴 적도 있다. 그 후 이건용 선생은 나를 당시 ‘AG’와 함께 전위단체로 이름을 떨치던 ‘ST’그룹에 회원으로 추천, 대학생 신분에 기성 그룹의 일원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 
 

Ⅲ.
 여기서 화제를 잠시 돌려 ‘갑파’ 이야기를 한 두 개 더 할까 한다. 1990년대 초반, 평론가로 데뷔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한 전시장에 가니 어딘가 눈에 익은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형상을 보니 틀림없는 ‘갑파’였다. 아니, 이럴수가! 나는 궁금하여 마침 자리에 있던 작가 강 아무개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랬더니 왈, 이건 ‘갑파’라고 하는데, 자신의 고향인 하동 섬진강에 출몰하는 전설적인 동물이라는 것이 아닌가? 갑파라고요? 내가 놀라서 물었더니, 그는 곁에 서 있는 아버지에게 동의를 구했다. “하모!” 돌아온 아버지의 간단명쾌한 대답! 그렇다면? 아쿠다가와 류노스케가 하동지방을 탐사하며 갑파라는 동물의 실체를 알고 소설을? 

 순간, 나의 상상력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은 아쿠다가와 류우노스케가 경상도 하동 9) 지방의 민속을 연구해서 ‘갑파’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류노스케가 일본의 전설에 나오는 동물 갑파(かっぱ)를 빌어 소설의 등장인물을 창조한 것인지도 모론다.10) 

 그러구러 세월이 흘러 때는 2009년. 나는 한국에서는 남보다 일찍 얼책(facebook)을 시작했다. 한 미국인 친구의 권유로 가입을 한 것이다. 내가 누군가? 어릴 때부터 기를 북돋아 주신 어머니의 은덕으로 호기심 많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아닌가? 창의력은 또 어떻고? 게다가 상상력은? 말해 무엇해! ㅋㅋ 

 어느 글에선가 나는 “얼책11)의 창시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Juckerberg:1884- )가 나를 위해 양탄자를 깔아주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앙팡테리블’인 이 MZ세대의 기수가 무려 17년 전에 장차 세계를 석권할 미증유의 소셜 매체(SNS)를 창시했으니, 가히 상상력의 은덕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대체 이 아들뻘의 젊은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얼책 초기에 나는 잠도 안 자고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매달렸다. 얼핏 떠오른 것이 들뢰즈의 리좀(rhizome) 개념, 우리말로 땅속 뿌리줄기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것! 비유컨대, 르네상스 이후 서구 미술의 역사가 머리채를 잡아당기면 쑥 빠져나오는 우엉처럼 ‘단선적(linear)’인 역사라면, 20세기 이후 모더니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는 감자 뿌리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땅속에 단단하게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그걸 가리켜 리좀적 구조라고 하는 것. 과연 얼책의 구조가 딱 그랬다. 친구의 친구가 나의 친구가 되는 세계는 게시물을 공유하면 동시에 보고 응답할 수 있는 미증유의 세계를 열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생면부지의 브라질 사람이 내 친구가 되는 세상. 그야말로 중학생 시절에 읽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제목처럼 ‘멋진 신세계’가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즉석에서 종이를 펴놓고 감자뿌리처럼 퍼져나가는 세계 친구의 확산 개념도를 그리기 시작했다.12) 

 나는 친구를 신청하고 받는 재미에 빠져 마냥 얼책을 하다가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이게 다름 아닌 통신매체지? 그렇다면? 나는 즉석에서 도미노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자, 이제 내가 컴퓨터 자판에서 ‘I’를 친다. 지금 출발이다. 영국의 련던이 목표다. 친다. IIIIIIIIIIIIIIIIIIIIIII 자, 이제 싱가폴에 사는 누가 좀 자빠트려라, 제발! 그러나 아무도 내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한 사람이 댓글난에 ‘////////////’하고 쳤으면 됐을 텐데 런던에 도달하기도 전에 게임은 싱겁게 끝나고 만 것이다. 얼책과 관련된 나의 논문 < 현실 혹은 가상? 나의 페이스북(Facebook) 체험기>(유럽문화예술학회, 2010)과 <소셜 네트워크와 대안적 사회 교육의 가능성-나의 얼책(facebook) 활동에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유럽문화예술학회, 2011)은 바로 이처럼 다양한 얼책 활동이 낳은 산물이다. 

 나는 처음에는 불편을 무릅쓰고 영어로 소통하려고 노력했으나 시간이 지나 구글을 비롯한 번역기가 등장하면서 한글로 쓰기 시작했다. 요즈음에는 번역기도 발전을 거듭해 완성도가 제법 높다. 아무튼 2010년에 시작한 얼책 활동이 13년이 지난 지금 총33권 1만 2천 페이지의 분량으로 출판됐으니, 이만한 아카이브(archive) 자료가 없다.  


Ⅳ.
 1977년, 견지화랑에서 열린 제6회 [ST전]의 오프닝에서 나는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We Stroke)>이란 퍼포먼스를 했다. 이 퍼포먼스는 이제까지 이건용, 김용민, 성능경, 장석원 등 이 행한 논리적이며 선(禪)적 내지는 사회비판적인 이벤트와는 달리 유목적인 동시에 놀이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것은 80년대에 대두된 토탈아트적인 퍼포먼스의 물꼬를 튼, 당시로선 신세대적 감각의 퍼포먼스였다. 

 나는 노란색이 칠해진 어린이 장난감 같은 작은 수레를 끌고 전시장에 입장했다. 그 안에는 빨강, 노랑, 검정 등의 정방형 색지를 비롯하여 실패, 자갈, 백묵 그리고 작은 귀틀집을 지을 나뭇가지들이 담겨 있었다. 전시장 중앙에서 수레를 멈춘 나는 맨 먼저 색지를 꺼내 일렬로 구불구불 펼쳐 놓은 다음 그 위에 자갈을 한 개씩 얹었다. 그리고는 관객들에게 색지로 자갈을 싸도록 권유했다. 관객들이 종이로 자갈 싸기를 마치자 이건용 선생은 그 모습이 “마치 꽃밭과도 같다”고 감탄을 했다. 나는 자갈꽃들을 수레에 담고 전시장 구석으로 가서 빨간 자갈꽃만을 골라 올타리를 만들고 나뭇가지로 귀틀집을 지어 그 앞에 놓았다. 그리고는 역시 빨간 종이를 돌돌 말아 이어붙여 길을 놓았다. 유목생할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백묵으로 “철수네는 영희네 집보다 부자입니다.” 등등의 문장들을 전시장 바닥에 썼다. 여기서 나타난 언어에의 관심은 이보다 앞서 발표한 <어법>의 연장선에서 온 것인데, 이 언어적 요소는 ‘놀이성’과 함께 지금까지도 나의 작업을 관류하는 특성이다. 즉 언어게임과 놀이를 삶의 중요한 구성물로 본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말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으며, 놀이는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활력소인 것이다. 놀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심각한 것의 반대다. 무엇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놀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2019년의 어느 날, 어린이 전문 미술관인 헬로 뮤지엄의 김이삭 관장이 전화를 해서 “어린이들과 함께 퍼포먼스할 의향이 없는가”고 물었다. (당연히 해야지. 물론 하고말고). 김 관장은 덧붙여 이건용, 성능경 선생님도 함께 하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노 프러블럼!) 적어도 우리 세 사람은 70년대 중반 이후 여러 차례 합동 퍼포먼스를 치룬 사이가 아닌가. 2011년의 경기도립미술관 주최 [팔방미인전]을 필두로 2014년의 HanQ 초대전13), 같은 해의 쿤스트독 갤러리 주최의 이건용, 성능경, 윤진섭 합동 퍼포먼스 <못먹어도 GO>, 그리고 2019년의 헬로뮤지엄 주최 <미술관의 개구쟁이들-dear my grandchild>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Ⅴ.
 2009년의 가을 어느날, 나는 경기도 이천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천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지하철 신당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6호선 신당역에서 내려 2호선 정류장을 향해 길을 가는데, 한 아주머니가 장난감을 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머니 앞에는 노랑머리의 젊은 남녀가 탄 장난감 오토바이 두 대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서로 엇갈린 채 둥글게 돌고 있었다. “경비원에게 쫒기느라 아직 마수도 못했어요. 하나만 팔아주세요. 네?” 그녀는 거의 울다시피 했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뱅뱅거리며 도는 인형을 주시했다. “옳지!” 순간,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뒷좌석의 검정색 트렁크에 난 작은 구멍에 깃발을 꽂자. 나는 돈을 치루고 물건을 샀다.
 
 <예술과 정치(Art & Politics)>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당시 경기도자비엔날레의 특별전인 [Ceramic Fashion]의 예술감독인 나는 왕치(Wangzie/王治)라는 예명으로 이 인형 오토바이를 가지고 퍼포먼스를 벌었다. 방독면을 쓴 채 오방색 천을 두르고 오토바이 뒷자석의 작은 홈에는 깃발이 달린 가늘고 긴 대꼬치를 끼웠다. 그러나 아무리 시도해도 ‘Art’ 깃발과 ‘Politics’ 깃발은 한 번도 스치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예술과 정치는 서로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은유하는 듯 보였다.    

 내가 첫 예명으로 택한 왕치는 초등학교 사학년 때 KBS 라디오 방송 사극에 나온 산적 두목의 이름이다. 왕치는 손으로 가슴을 치며 “으흐흐, 나 왕치!”하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 연속극은 나중에 <십오야(十五夜)>(1969, 감독 임권택)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대중의 인기가 매우 높았다. 나쁜 놈을 응징하는 정의의 투사가 나타나는 대목에 이르면 관객들이 극장이 떠나가라 박수를 치던 시절이었다. 나는 일부러 왕치의 영어명을 ‘Wangchi’가 아니라 ‘Wangzie’라고 지어 2009년 무렵 한국에 유행하던 중국풍을 비꽜다. 그 후 예명의 행렬이 이어졌다. 왕치 다음에 한큐(HanQ)라고 정했는데, 그건 당구에서 쓰는 ‘쓰리 쿠션’과 비슷한 뜻으로 ‘한큐에 날린다’는 약간 코믹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2009년부터 이어진 예명의 행렬은 얼책으로 번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한큐 이후에 나는 작명의 근거로 추사 김정희 선생을 주목했다. 옥과미술관 관장을 지낸 최준호 박사가 <추사, 명호처럼 살다>라는 책을 썼는데, 그에 의하면 추사가 평생에 걸쳐 사용한 명호(名號)가 무려 334개란다. 우리는 보통 완당, 완당선생, 추사만 알고 있지 않은가? 순간,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떠오른 생각은? 그래. 서양의 경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아무리 천재라도 평생 한 이름만 사용하지 않았던가. 예외가 있다면 마르셀 뒤샹인데, 그는 최근에 들은 바에 의하면, 대중에게 익숙한 로즈 셀라비(Rrose Sēlavy) 외에도 서너 개의 예명이 더 있다고 한다.     

 나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명호(名號)의 문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아 정체성의 끊임없는 분열이 아닌가? 사대부 전통에서 명호는 19세까지는 이름을 쓰고 스무 살부터 호(號)를 지을 수 있는데, 본인이 지을 수도 있고 남이 지어줄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자아 정체성의 확장이야말로 전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Ⅵ.
 얼책을 하면서 나의 예명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Pajama Jun은 주로 그림을 그릴 때 쓰는 이름이고, Vindle Bindle K는 발음이 명료하지 않은 한국적 상황을 의식한 것이며, ‘천둥치는 이 밤에’는 영화 제목 ‘늑대와의 춤을’에서 착안한 것이다. Funny G.P.S는 장기간의 남북대치상황이 빚은 가족사적 비극을 빗댄 것인데,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련다. 중요한 것은 예명이 계속해서 늘어갔다는 것이며, 얼책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올리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현재 약 1백여 개에 이른다. 

 최근에 사용하기 시작한 RT는 요즘 미술계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RM’에서 힌트를 얻어 지은 예명인데, 사람들은 내가 설명할 때 RM 소리만 나와도 웃는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오랜 드로잉 역사에서 뚜렷한 계보와 족적을 지닌다. RT는 ‘Red Tongue’, 우리말로 ‘붉은 혀’의 약자이다. 왠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턴지 인디안식 이름14)인 붉은 혀가 내 그림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계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Ⅶ. 
 코로나 19로 대변되는 팬데믹 상황은 드로잉 작업에 더 빠져든 계기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 집 근처에 있는 남산 산책로를 걸으면서 틈나는 대로 배낭에 든 스케치북을 꺼내 드로잉을 했다. 병원에 입원 중에도 드로잉 습관은 이어졌다. 심지어는 수저를 넣는 종이봉투의 양면에 그리는가 하면 비닐로 된 한약 봉지와 처방전의 뒷면을 이용하기도 했다. 팬데믹이 시작되던 2020년 3월 27일 이후, 나는 그림을 그려 거의 전부를 얼책에 올렸다. 작게는 담뱃갑 크기부터 크게는 33미터에 달하는 롤(roll) 지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그린 드로잉이 약 2만 점에 달한다. 확인 가능한 숫자다. 이는 결코 내 자랑이 아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성경책 읽는 모습에서 은연중에 배운 것이다. 나는 농부였던 나의 선친을 링컨보다 더 존경하며, 바보처럼 성실하기만 했던 어머니가 영국 여왕보다 더 위대해 보인다.  

 오브제는 또 어떤가? “사물의 진리는 폐물에서 가장 잘 읽혀진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버려진 사물은 내게 늘 말을 건넨다. 사실 몰라서 그렇지 사물은 늘 뭔가를 속삭인다. 뭔가에 긁히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즐거우면 웃는다. 한번은 누군가 내게 물었다. 혀가 왜 붉죠? 이런, 붉으니깐 붉지. 클클클. 그건 대머리가 왜 대머리냐고 묻는 것과 같다. 왜 대머리냐고? 몰라서 물어? 머리가 빠졌으니까 대머리지. 다른 이유가 있어? 이건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많이 물어야 한다. 희랍인 조르바식으로 말하면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한다. 두목, 저 투명한 하늘을 보세요. 왜 저렇게 파란지 아세요? 저 날아가는 새가 옆의 새에게 지금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하는 식으로.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라고 읊었다. 경이(wonder)! 자연과 사물을 보고 경이를 느끼는 순간은 어린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때이다. 경이와 천진스런 아이의 마음은 예술가의 본향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때 어린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마음에 때가 끼기 시작한다. 천진한 아이들은 거짓을 모른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말한 사람은 솔직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어른들은 아첨부터 생각한다. 나는 부디 예술가들이 이 부류에 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작지만 내가 기댈 수 있는 나의 희망이자 유일한 소망이다.  



ㅡㅡㅡㅡㅡ
1)  2022년 12월 8일에 당한 교통사고를 말한다. 음주 운전자가 몬 차에 치인 이 사고로 인해 국립의료원 중환자실에 입원, 죽음의 직전까지 갔으나 천행으로 소생, 무사히 복귀하였다.  

2) 이 해에 김신조 등의 무장공비 침투 사건과 국민교육헌장 반포가 있었다. 

3) 큰 형수가 시집올 때 가져온 짐 속에 한국단편문학전집 한 권이 있었는데, 거기에 이상을 비롯하여 김유정 등의 단편소설이 수록돼 있었다. 

4) 평택중학교에 전체 차석으로 입학한 것을 말함. 

5)  이 분야의 중학시절 성과로는 평택중고등학교 전체 백일장에서 중1때 받은 시부문 차상(次上:2등)과 중3때 받은 산문 부문의 차상을 들 수 있다. 나의 삶에서 이 ‘2’는 매우 중요한 숫자인데, 삶의 여러 과정과 경로를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중학교 차석(1968), 대학입시 재수(1975), 광주비엔날레 총감독 최종 경선(2인x2회), 국립현대미술관장 최종 후보(2인) 낙마 등등.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며, 그런 연유로 내가 창작에서 우연을 즐기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체로 “삶은 신비에 가깝다”가 화두로 대두.       

6)  1970년, 수화 김환기의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지명공모 부문에서 영예의 대상을 수상한 공모전을 가리킴.  

7)  제목은 <매개항>이다. 이 작품은 당시 녹번동에 살던 성능경 선생이 자신의 화실 옥상에서 직접 찍어준 것이다. 

8)  얼굴 사진은 성능경 선생이, 글씨를 쓰는 동작은 진달래 그림으로 유명한 대학 동기 김정수가 홍대 교정에서 찍었다. 

9)  한글로 ‘하동’은 같지만 류우노스케의 소설 하동은 한자로 ‘河童’, 즉 ‘물에서 노는 아이’를 의미하며 경상도의 지명인 하동은 ‘河東’ 곧 ‘물의 동쪽’을 뜻해 서로 다르다. 

10)  이 갑파가 오이를 좋아해서 오이김밥을 가리켜 ‘갑파마키(かっぱ卷き)’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다. 

11)  일찍이 나는 페이스북을 가리켜 ‘얼이 담긴 책’이라는 뜻으로 ‘얼책’으로 표기했고 지금도 이 말을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12 ) 2012년의 단색화(Dansaekhwa) 뿌리줄기 개념도와 2016년의 퍼포먼스 뿌리줄기 개념도는 이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13) 한큐는 윤진섭의 예명이며,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열린 전시명은 [사물은 초즈의 치즈를 골랐다(La Chose chose Chose’s cheese)]이다. 세 사람의 합동 퍼포먼스는 전시 오픈 행사로 열렸다. 

14) 내가 본 대표적인 인디언식 이름으로는 ‘Mr. This is a book’이 있었는데, 화가의 이름에 붙는 성이었다. 또한 ‘곰가죽’을 뜻하는 ‘Bearskin’ 역시 인상적인 인디안식 이름 중 하나이다. 



1차 출처: Art in Culture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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