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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란? - 박광수 우쟈루전 리뷰

윤진섭



그림이란?  

윤진섭 | 미술평론가

요즈음 우리나라에도 드로잉(drawing)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주로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현상이지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조형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미술가들이 부단히 드로잉을 한다는 것은 마치 운동선수가 기초체력을 다지기 위해 매일 달리기를 하는 것과도 같다. 

 둘째는 사물에 대한 관찰력을 기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권장하고 싶다. 물론 드로잉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사물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나, 그 대상이 밖에 있는 사물이든, 아니면 작가의 내면에 이는 어떤 심상적 이미지든 간에 구체적인 물질 위에 흔적을 남긴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면 드로잉, 즉 소묘란 과연 무엇인가? 혼란을 피하기 위해 미술용어사전(월간미술 발행, 2015)에 적힌 한 구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표현이나 형태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선을 사용해 이미지를 그려내는 기술로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 모든 예술의 기초를 형성한다. 밑그림이라고도 하며, 프랑스어로는 건축의 도면, 도안 등의 뜻도 포함한다. 제작의 목적이나 동기에 따라 크로키, 스케치, 에스키스, 바탕그림, 에보슈, 카르통, 에튀드 등의 명칭이 쓰이기도 한다.” 

 자, 이는 물론 드로잉에 대한 광범위한 설명이지만, 미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회화가 위기에 부딪히게 되면 그때마다 드로잉이 소환된다. 비근한 예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80년대 초반에 분 ‘드로잉’의 선풍을 들 수 있다. 당시는 70년대 우리 미술계를 강타한 개념미술의 영향으로 작가들이 사물과 사태에 대해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으며, 그러한 경향은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 등등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전의 참가와 맞물려 더욱 증폭됐다. 이른바 개념적 드로잉의 확산을 가져 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무려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불고 있는 드로잉 선풍은 과연 어디에 그 원인이 있을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여럿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가령 컴퓨터를 이용한 AI(인공지능) 기법의 다양한 개발 및 확산을 들 수 있다. 이제는 애써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컴퓨터상에서 적당한 저작도구의 앱을 선택해 입력하면 놀라운 세계가 펼쳐지는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을 살펴보면 과학기술 대(對) 인간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투쟁이 느껴진다. 즉, 눈부신 기술의 발전에 대응하는 미술가들의 긴장감이 엿보이는 것이다. 어찌 기계가 예술가의 창의력에 도전한다는 말인가? 궁극적으로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차에 화랑가를 거닐다가 두 개의 전시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이태원에 위치한 P21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우 쟈루(Wu Jiaru)의 개인전이며, 또 하나는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박광수: 구리와 손]전이었다. 이 두 전시회는 내면의식에서 일렁이는 다양한 풍경을 드로잉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우 쟈루의 [Emotional Device]전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을 두 개의 화랑 공간에서 펼쳐 보인다. 간략히 요약하면, 비단 그림뿐만이 아니라 오브제와 영상이 어우러진 종합전이다. 따라서 이 전시는 오로지 드로잉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드로잉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작가의 내면의식을 보여주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 오브제와 영상이 덧붙여졌다고 하는 편이 낳겠다. 

 우 쟈루의 그림을 보면서 얼핏 드는 생각은 생각의 자유로운 유희이다. 일종의 자동기술이라고나 할까, 뇌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시간의 순차적 흐름과 무관하게 캔버스에 옮겨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의 그림들에 표현된 색채는 비록 인체를 다뤘지만 과격하지 않고 연한 노랑과 연두, 연갈색, 청색, 회색 등등이 어울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구상적 스타일로 그린 소품을 들 수 있는데, 약간 프란시스 베이컨의 내음이 맡아지는 게 특이하다. 

 작가가 살아오면서 느낀 다양한 체험과 상상이 녹아든 그림들은 얼핏 불합리해 보이지만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도 많이 보인다. 풀밭, 나무들, 새와 동물, 바다 위를 떠가는 배,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의 얼굴, 허공을 나는 새, 밭을 가는 소 등등 온갖 물상들의 집합장처럼 보이는 화면을 통해 작가는 자유로운 상상의 놀이를 즐긴다.

 영상은 그림의 확장된 버전으로 다양한 장소에서 찍은 군중들의 모습과 때로는 고대 신상들이 나타나는 중간에 작가의 수많은 그림 이미지들이 화면 위를 덮는다. 여기서 우 쟈루는 기술과 대결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상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장소의 몽타주와 상이한 이미지들의 오버랩을 통해 아날로그 상태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 디지털의 효과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물론,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을 미스 홍콩의 가짜 왕관이나 손상된 우산 등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뜻도 내비치긴 하나 전반적으로 과격하지 않고 유머러스하며, 솜처럼 부드럽다. 놀랍다. 그토록 무거운 주제를 이처럼 경쾌하게 풀어내다니! 

 박광수는 영상기술을 부분적으로 활용한 우 쟈루와는 달리 철저히 손에 의존하는 아날로그 형 작가이다. 그러나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내면세계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 쟈루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박광수의 그림이 우 쟈루의 그것과 다른 점은 후자가 여백의 미를 추구하는 반면, 전자는 화면 전체를 사물의 이미지와 추상적인 붓질로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타일만 다를 뿐, 현실을 벗어난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나로선 이들의 언술 방식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는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초월하여 나타나고 있는 이 시대의 한 징후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의 이런 가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국내외 미술의 현장에서 흔히 만나는 MZ세대의 작품들에는 자의식 과잉과 다변, 심지어는 요설이 넘쳐흐른다. 그렇다면 박광수의 경우는 과연 어떠한가? 여기서 잠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많은 경우 본인이 처한 가혹한 상황을 감내해 내고 있다. 그 끝은 대부분 실패인데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림에서 색들이 충만하게 매혹적이기도 위협적이기도 하며 서로 간의 강렬한 충돌로 그 세계가 극단적이길 원한다.” 

 아하, 그렇구나. 이번 전시에서 박광수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생경하고 낯선 느낌이 작가가 의도한 바로 그 지점이었구나. 그렇다면 그의 그림들은 성공하지 않았는가? 작가의 의도와 관람객이 받은 느낌이 딱 일치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작가는 앞의 글에서 “그 끝이 대부분 실패”라고 했을까? 게다가 등장하는 대상들이 “가혹한 상황을 감내해 내고” 있다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 

 그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 전에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이 작가의 드로잉에 대한 내공이 대단해 보인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많이 그려본 솜씨다. 선이 물 흐르는 듯 유연하게 흘러가며, 동시에 겹들이 쌓이고 쌓여 숱한 형상들이 드러나는데 그로부터 이야기가 파생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서로 연결된 것이라기보다는 분절된 것이기 때문에 알아보기/듣기가 매우 어렵다. 가령, <작은 산>(캔버스에 유채, 162x130cm, 2023)이란 제목의 그림에서 숲속에 웅크리고 앉은 소년이 양손을 곧추세워 땅바닥에 흰 선들을 긋는데, 손가락의 개수와 선의 개수가 일치하지 않는다고(8:9) 이 그림을 논리적으로 틀렸다고 할 ‘논리적’인 근거는 없다. 왜? 바로 그게 예술이니까. 그걸 생각하고 그의 작품을 찬찬히 바라보니 마치 퍼즐을 푸는 것만치 재미가 쏠쏠하다. 

 이처럼 박광수의 그림에는 재미의 요소와 함께 작가의 다양한 감정들이 배설물처럼 산재해 있다. 그것들은 숨은그림찾기나 정글에 난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로 얽혀 있어 해독이 어렵다. 비단 대상의 크기가 지나치게 작거나 형태가 모호해서만이 아니다. 형상들은 중의적인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예컨대 얼핏 사마귀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나무뿌리인 것이다. 

 캔버스는 평면이되 끝없이 중첩되는 겹의 집합장이기도 하다. 명암, 색상의 차이, 명도와 채도, 선, 면, 점 등등 다양한 조형 요소들을 사용한 시각적 트릭과 다양한 회화적 기술, 기법에 의해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진기한 세계 속을 바야흐로 박광수가 누비고 있다. 미시적인 세계와 거시적인 세계가 혼재하는 환상의 세계다. 

아트인컬처 202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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