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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문예부흥(American Renaissance)시기의 미술관 설립과 초기 운영에 관한 연구

하계훈

미국식 문예부흥(American Renaissance)시기의 미술관 설립과 초기 운영에 관한 연구


하계훈(단국대교수)


1. 서론 

19세기 후반까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아온 미술관들은 대부분 유럽에 있었다. 이러한 미술관 분포의 지형에 변화가 일어나가 시작하는 것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1870년경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소위 미국식 문예부흥(American Renaissance)시기부터였다. 신대륙 미국의 산업자본가들과 금융자본가들에 의해 유럽의 문화적 향유 활동을 모방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추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가 시작한 이 시기에서부터 미국의 미술관은 전성기를 맞을 준비를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환점으로 하여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미술관의 지형이 유럽 중심에서 상당부분 미국 중심으로 전환되었지만 그에 앞서 북미대륙에서는 1870년대부터 미술관 문화의 부흥을 예고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가 1900년대 중반에 반영되어 오늘날의 미국 미술관들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창기의 미국은 미술관보다 박물관이 더 많이 설립되어 여가 활용과 교육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말에 오면 미술관이 박물관보다 더 많은 숫자를 형성하게 된다. 

미국에서 이 시기에 미술관과 박물관이 집중적으로 설립되는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독립전쟁을 완수하고 산업기술의 발전을 이룩한 미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문화적인 상황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 1870년경부터 시작된 미술관을 포함한 문화 전반의 영역에서 일어난 이러한 활성화 움직임을 ‘미국식 문예부흥’이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문예부흥 시기는 경제적으로 농업사회가 산업사회로 급속하게 전환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전환현상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시기에 요구되는 노동력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유입되는 이민자들의 이질적인 문화를 부드럽게 기존의 미국사회에 안착시키고 동화시킬 필요성이 요구되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지난 수 십 년간의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사회의 산업화와 그 연장선에서 최근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안정적인 착근 문제가 어느 정도 평행한 비교를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 논문에서는 1870년경부터 시작된  ‘미국식 문예부흥’ 시기에 미국에서 설립되기 시작한 주요 미술관들의 설립과정과 설립 이후의 전개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최근 우리나라에서 미술관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움직임과 비교했을 때의 시사점과 참고할 수 있는 측면을 찾아보도록 하고자 한다.


2. 미국 사회의 성장과 미국식 문예부흥(American Renaissance)

 

잘 알려진 것처럼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나라는 1492년 콜럼버스가 북미 대륙의 입구에 도착하면서 유럽인들에게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탄 청교도들이 미국 대륙의 동부에 도착하여 점차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밀어내고 백인 중심의 사회를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오늘날의 모습을 만들어낸 나라다. 프로테스탄트 백인들은 넓은 경작지에 곡물과 면화 등을 재배하면서 신대륙에서의 부를 축적해나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모자라는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인들을 강제로 납치하는 노예무역이 성행하였고, 마침내 흑인들의 노동력과 인권을 둘러싼 충돌로 미국의 남부와 북부가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는 등의 정치적, 군사적 혼돈의 시기를 거치기도 하였다. 

1773년에 일어난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Party)은 이렇게 성장해가는 미국사회가 영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8년간의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1775년 ~ 1783년)은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으로부터 독립시켜 미합중국이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전기를 마련하게 해주었다. 이후 미국은 남부의 농업과 북부의 공업을 발달시켜 나아갔는데 1861년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의 주들이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고 전쟁을 시작하여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 곧 미국의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다. 이 전쟁이 북부 공업지역의 승리로 끝난 뒤 미국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중심으로 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사회의 안정을 이루고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발전을 꾀하게 된다. 

한편 이에 앞서서 1853년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산업박람회(Exhibition of the Industry of All Nations)를 계기로 미국의 사회지도층들은 국제적 규모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갖출 필요를 실감했다. 또한 이 무렵부터 미국은 신흥 공업국가로서의 지위를 굳혀갔으며 농업중심 사회에서 제조업중심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져가고 있었다. 산업화에 따른 노동력의 수요가 늘어나자 남부와 북부유럽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활발하게 유입되게 되는데, 이러한 인구의 급속한 유입은 미국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켰으며 이들보다 먼저 정착한 앵글로색슨계 백인들(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거부감이 표면화되어 사회문제로 불거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도 이들 양쪽 그룹들의 우호적인 화합과 동화가 필요했으며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미술관과 박물관은 유용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와 같이 지식과 문화를 향한 욕구는 그들의 사회적 전통으로 볼 수 있으며 프로테스탄트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부합했다. 신대륙에 이주한 프로테스탄트 미국인들도 이러한 전통을 받아들여 박물관과 미술관의 교육적 기능을 인정하고 거기에 자선가(philanthropy) 정신과 민주주의 전통이 더해짐으로써 미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북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은 프로테스탄트 자본가들은 미술관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사회기반시설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요구를 구체적으로 반영한 움직임 가운데 하나가 도시미화운동(The City Beautiful Movement)인데 이 운동은 1890년대와 1900년대 미국 건축계에서 아름답고 장대한 건물을 짓고 광장과 공원을 만드는 운동으로 퍼져나가서 뉴욕이나 보스턴 뿐 아니라 시카고, 클리브랜드, 디트로이트, 워싱턴D.C. 등의 도시의 모습을 세련되게 변화시켰다. 미국사회의 지도층은 이를 통해 주민들의 도덕성과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키워나가기를 희망하였다. 도시미화운동 기간 동안 시카고에서는 1893년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만국박람회가 열리기도 하였고, 1870년대에 설립된 미술관들 가운데 일부는 확장과 이전 개관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는 경우도 있었다.


3. 미국식 문예부흥기에 설립된 미술관들


건축사학자인 윌슨(Richard Guy Wilson)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남북전쟁 이전과 전쟁 중의 혼란을 유럽 중세와 동일시하였고 남북전쟁 이후의 정치, 경제, 학문과 예술의 발전을 도모하던 사회를 유럽의 르네상스 개념과 일치시키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다수의 사업가와 지식인, 예술가들이 대략 1876년부터 1917년 사이의 기간을 미국의 문예부흥기라고 규정하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미국사회는 유럽과 달리 대를 이어서 문화적 전통이 이어져 온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많은 양의 소장 자료와 예술품을 짧은 시간 안에 확보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미국 미술관들은 어느 정도 소장품이 갖춰진 상태에 이르기 전에 건물을 세우는 일을 먼저 시행하는 경향을 보였다. 미술관 건립자 측에서는 고전적인 대형 건물을 지으면 많은 부유층 소장가들이 작품을 기증하거나 운영자금을 기부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는데 실제로 이러한 예측은 잘 맞아떨어진 편이었다. 이러한 기증과 기부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와 달리 자손들에게 증여할 의사가 적고, 그보다는 자신의 세대에서 사회적 기여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높은 편인 소장자들의 생각과 함께 사회적으로 기증자에 대한 찬사와 격려가 주요 일간지의 1면에 실리는 등의 방법에 의해 이러한 기부행위가 미화되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미술관과 박물관이 전개되는 양상은 유럽의 그것과 달랐다. 유럽은 기본적으로 군주와 귀족, 그리고 중세를 거치면서 문화적 역량을 축적해 온 교회가 중심이 되어 국가의 문화 활동을 후원하고 성장을 주도한 반면에 미국에서는 성공한 개인과 지역사회가 중심이 되어 지역주민을 계몽하면서 그들에게 지식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설립된 경우가 적지 않다. 

1846년 인류의 '지식의 확산과 보급을 위하여(for the increase and diffusion of knowledge)' 설립된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에도 박물관들이 마련되었는데 초기에는 미술관보다 박물관 위주로 시설이 갖춰져 나아갔다. 1858년 자연사박물관(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 1889년 동물원(National Zoological Park), 1897년 쿠퍼-휴잇 국립 디자인미술관(Cooper-Hewitt, National Design Museum) 등이 문예부흥기에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에 설립되었고 1900년대 들어서 각종 미술관들도 추가되어 현재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에 소속된 박물관과 미술관의 합계는 모두 19개 기관에 이르고 있다.

1900년대에 들어서서 스미소니언 인스티튜션에 디트로이트 출신의 자선가 프리어(Charles Lang Freer)의 기부를 필두로 하여 국립 미국미술관(National Museum of American Art, 현재는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등이 설립되게 되고 뉴욕주에도 부루클린미술관(Brooklyn Museum, 1997년부터 Brooklyn Museum of Art )이 일찍이 1895년에, 뉴저지에는 뉴왁미술관(Newark Museum)이 1909년에 설립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미술관의 설립 배경에는 지역의 독지가들의 노력과 헌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설립된 미술관들은 미국인들의 자신감과 야망을 드러내는 공간이었지만 초기의 소장품 가운데 상당 부분은 복제품으로 채워졌다. 미국의 주요 미술관들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중요한 설립 목표 가운데 하나를 교육기능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출발기의 부족한 재정 상태 아래서 교육적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복제품들을 소장품으로 포함시키는 데에 별로 거부감이 없었으며, 특히 미술관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는 미술관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미술관의 전시실에 이 복제품들을 원본들과 함께 전시해왔다.

미술관 분야에서 미국식 문예부흥기에 탄생한 주요 미술관들을 들어보면 뉴욕 맨해튼에 설립된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보스턴의 보스턴미술관, 그리고 시카고의 시카고미술관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미국의 문예부흥기에 탄생한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많겠지만 연구 기간과 지면의 한정성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앞에 언급한 3개의 미술관으로 연구 범위를 한정하고자 한다.


3-1 메트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1870년 일군의 사업가와 금융가, 그리고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미국 사회의 예술교육에 기여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을 설립할 것을 천명하면서 탄생하게 된다. 지도와 서적 출판가였던 디스터넬(John Disturnell)에 의하면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미술교육진흥과 그 성과의 응용, 그리고 그와 관련된 지식을 증진시키고 대중들에게 교육과 여가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립이 추진된 것을 알 수 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탄생하게 된 계기는 미국의 독립선언 참여 정치가중 한 사람이며 법조계와 외교 등의 분야에서 활약했던 제이(John Jay)가 1866년 파리에서 열린 독립기념일 기념 만찬에서 했던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설립의 역사를 연구한  톰킨스(Calvin Tomkins)는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미술관을 설립하면서 프랑스의 루브르미술관을 모델로 하였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 혁명에서 승리한 민주주의의 산물로 태어난 루브르미술관이 곧 미국이 신봉하는 민주주의의 정신에 잘 부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핵심적인 신념으로 채택한 미국에서 미술관의 주요 임무는 교육이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그것을 교육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미국인들은 인간의 이성에 의거하여 사물을 관찰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하는 방식이 가장 적절한 교육방식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실물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교육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미술관의 건립이 활발하게 준비되고 있던 1870년대 초는 사실 경제적으로 불황을 겪고 있었다. 5만여 개의 기업이 도산하고, 도시마다 범죄율이 높아지고 질병과 매춘이 널리 퍼지고, 집 없이 거리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수천 명에 달하는 한편으로 정부의 관리들의 부패도 심각하였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건립에 있어서 발기인들이 정부의 개입을 경계한 것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설립준비 이사회는 뉴욕시 정부가 부지와 건립비를 제공하더라도 구체적인 운영에 개입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1870년대의 뉴욕은 유럽과 같은 귀족적 전통도 없었으며,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만한 파리의 살롱과 같은 사교모임도 별로 없었다. 다만 뉴욕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묶어주는 것은 일명 Old New York이라는 생활태도로서 사람들은 신앙심 깊고 열심히 일하며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성격이지만 다분히 세속적이어서 미술과 같은 문화 분야에 대한 관심은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의 상류층들보다 적은 편이었다. 미술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는데 있어서도 뉴욕 시민들은 보스턴 시민들에 비하여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몇몇 뜻있는 재력가들은 일반인들보다는 적극적이었다. 미술관의 건립이 결정되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초대 이사장을 맡은 존스턴(John Taylor Johnston)을 비롯한 이사들과 많은 재력가들은 미술관의 내부를 채울 미술품들을 사들이는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부를 동원하여 유럽으로부터 미술시장에 올라오는 미술품들을 싹쓸이하듯 구입하여 일부는 개인 소장품으로 보관하고 일부는 새로 건립되는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다행히 1878년경부터 경제 사정이 나아지자 부유한 재력가들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성공한 사업가들과 금융인들은 국제적인 규모의 미술관이 그들의 사업체가 소재한 지역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주며 개인적으로도 그들의 정치적 입지나 사회적 위신을 세우는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 금융계의 거물 모건(J.P. Morgan)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좋은 뜻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실리적인 이유에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이 이 당시 미국 상류층 인사들의 미술관 설립에 참여한 동기를 잘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민주주의적인 설립취지에도 불구하고 개관 후 처음 20년간 미술관은 일요일을 휴무일로 운영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노동자들이 유일하게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는 날이 일요일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설치한 운영방식이었다. 따라서 미술관의 이사회를 구성하는 지도층 인사들이 선언적으로 밝히는 민주주의적인 설립취지와 현실적인 운영방침 사이에는 모순된 괴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일요일 개관은 1881년부터 1만 명의 서명운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의회에서도 지원금을 축소하는 형식으로 압박을 가하여 1891년부터 일요일 개관이 관철되었다.  

1870년 4월 13일 뉴욕주의 입법에 의해 설립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1872년 2월 20일 맨하탄 5번가 681번지에 처음 문을 열었다. 철도회사를 운영하던 미술품 컬렉터 존스턴을 비롯한 설립 발기인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전쟁영웅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세스놀라(Luigi Palma di Cesnola)를 1879년에 첫 관장으로 임명하였다. 세스놀라 자신도 이탈리아인들의 미국이민이 가속화되던 시기인 186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던 사람이다. 세스놀라가 관장으로 임명되기 전에 사이프러스 영사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자비로 시행한 발굴 작업의 결과물들을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편입시킨 것이 불법적인 행위라는 관계자들의 지적과 유물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긴 했지만 1904년 사망할 때까지 세스놀라는 25년 동안 관장직을 수행하였다. 

소장품 기증자와 기부금 기부자들이 미술관을 도왔지만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대중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전체적인 미술사적 흐름을 보여주기 위한 작품들을 확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1889-1895년 사이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유럽의 유명 미술품을 복제하여 전시하였으며 몇몇 기증자들이 내세운 조건을 수용하기 위하여 공간을 개인 컬렉션에 할애하면서 전문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미술관 운영의 전문성에 관한 논란은 소장품을 둘러싼 큐레이터의 전문성과 자율성의 문제에 관하여서도 일어났다. 세스놀라의 중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재직중 세스놀라는 자신이 발굴한 사이프러스 토기의 진위를 가리는 문제에 있어서 관장직을 남용하여 큐레이터 구디어(William Goodyear)로부터 자신에게 유리한 의견을 이끌어내려고 하였다가 이를 거부하는 큐레이터와 감정적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큐레이터에 대한 부당한 압력은 1905년 미술관의 중요한 기증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컨드(Henry Marquand)가 가짜인줄 알면서 기증한 그림들을 놓고 큐레이터가 자세히 조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몇몇 조건부 기증자들은 자신들의 기증품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미술관 전시실에 배치되도록 요구함으로써 미술관 큐레이터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하였다.


3-2 보스턴미술관(Boston Museum of Fine Arts)

 

보스턴미술관의 설립에 관한 역사는 미술관 정문 입구 옆에 부착된 동판에 요약되어 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같은 시기에 설립된 미술관으로서 보스턴미술관 역시 개인들이 주도하여 설립되었으며 설립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를 교육활동에 두고 있다. 미술관은 1805년에 설립된 인류학회 도서관에서 출발하여 1807년 보스턴 아테네움(Athenæum)이 설립되고 몇 차례의 이전을 거쳐 1870년 보스턴 시가 미술관 부지를 제공하자 보스턴 출신의 컬렉터 겸 문화활동가이자 미술평론가인 퍼킨스(Charles C. Perkins)를 비롯한 12명의 이사들로 구성된 설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보스턴미술관은 아테네움에서 넘겨받은 작품들과 지역 유지들의 기부와 기증에 힘입어 미국의 독립기념 100주년이 되는 1876년 7월 3일에 공식적으로 일반에게 개관되었다. 미국의 미술관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보스턴미술관은 개관 이후 정부로부터의 지원이 거의 없는 가운데 지역의 후원자들이 자신이 부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기증품과 기부금을 보탬으로써 운영되는 형식을 현재까지도 재정운영의 중심적인 형식으로 채택해오고 있다. 초기 보스턴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들 가운데에는 동양미술에 관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의 지식인들이 당시 인도와 이집트 뿐 아니라 중국, 일본, 한국 등의 동양지역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기회에 이 지역의 미술품들을 수집하고 돌아와 보스턴미술관에 기증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미술관 개막식에 참석한 보스턴 시장 콥(Samuel C. Cobb)은 보스턴미술관을 ‘미술관 교육의 중심(The crown of education system)'이라고 하였다. 보스턴미술관에서는 1907년부터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전시안내원의 활동이 시작되어 관람객의 작품 감상을 돕기 시작하였다. 보스턴 아테네움의 소장품을 계승하고 1869년 하버드 대학,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사회과학협회의 컬렉션을 인수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보스턴미술관은 미술학교(The School of the Museum of Fine Arts)와 함께 개관하면서 첫 관장으로 독일 출신의 화가 그룬트만(Emil Otto Grundmann)을 영입하였다. 

보스턴미술관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설립과 다르게 사업을 통해 커다란 재산을 형성한 소수의 후원자들에게 의존하기보다 대대로 이어온 학자와 중산층 사업가 가문의 후계자들이 조금씩 후원하는 재정에 의존해서 미술관을 운영해오고 있다. 보스턴미술관은 인근의 하버드대학과 MIT대학의 인재들로부터 전문적 연구에 관한 인력을 공급받을 수 있고 이 대학 출신의 성공한 인사들로부터 적지 않은 기부를 받아오고 있다는 점이 다른 지역의 미술관들과 차별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보스턴미술관이 교육 기능을 강조하긴 하였지만 초창기 미술관의 이사회는 대중적 운영보다는 엘리트 중심의 미술관 운영에 무게를 두었다. 부관장이었던 프리차드(Matthew Prichard)는 보스턴미술관의 목표가 “도시민들 사이에 높은 수준의 미적 취향을 정립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 속의 도시민들은 노동자 계급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도시민이 아니었다. 

미술관 이사회는 소장품 전시장을 일반인을 위한 전시장과 전문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을 위한 전시장으로 분리시킬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며, 보스턴미술관의 간사(secretary)였던 길먼(Benjamin Ives Gilman)은 박물관과 달리 미술관에서는 소장품에 대한 설명이 필요 없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미술관이 교훈적인 목적보다는 미학적인 목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길먼의 생각은 미술품 감상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관람객보다는 상대적으로 미술품 감상 기회나 교육의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었던 상류층 관람객들을 중심으로 미술관의 운영을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와 다르게 보스턴미술관의 운영에 있어서 미학적인 내용보다는 교육적인 접근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었다. 화이트힐에 의하면 퍼킨스가 제안한 보스턴미술관의 설립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파리의 루브르미술관을 모델로 한 것과 달리 런던의 사우스켄싱턴뮤지엄(지금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을 모델로 제시하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보스턴미술관은 관람객의 미학적 체험보다 교육을 통한 배움과 계몽적 운영을 우위 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퍼킨스는 새로 지어질 미술관의 재정적 한계 때문에 원작보다는 모작, 그리고 그림이나 조각보다는 화폐, 메달, 사진, 드로잉 등을 중심으로 수집할 것을 제안하였다. 

미술관 이사회의 시각이 전적으로 대중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달리 보스턴미술관은 개관 초기부터 노동자 계급의 미술관 방문 편의를 위하여 일요일 개관을 시행하였다. 개관 후 보스턴미술관은 일주일 내내 개관하면서 일요일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입장료를 받고 매주 토요일은 무료입장을 시행하다가 1877년 3월부터는 일요일 오후에도 무료입장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유료와 무료입장이 병행되자 평일 유료입장객수는 100명을 넘지 못하는 반면에 무료입장객수는 1600여명까지 오르는 큰 차이를 나타냈다. 이 결과 미술관 입장객 가운데 유료 입장객은 10% 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화가와 미술학교 학생, 그리고 보스턴 지역의 건축전공 대학생들도 무료로 입장하였다. 

미술관 개관과 함께 보스턴미술관은 미술관 지하에서 미술학교(School of Drawing and Painting)를 운영하였는데 첫 학기의 학생은 경쟁 공모를 통해 선발되어 학비가 면제된 5명의 학생을 포함하여 8명이었다. 비록 한 공간에 있었지만 미술학교는 미술관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재정적으로는 부실한 편이어서 설립자들과 독지가들의 후원에 상당부분을 의존하였지만 설립자 가운데 한사람인 퍼킨스가 미술학교가 없이 미술관만 있는 것은 “영혼 없는 육체(a body without soul)' 같다고 한 것처럼 미술학교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보스턴미술관은 같은 시기에 개관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은근한 경쟁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경쟁은 미술관 전문인력에 대한 영입에서도 나타났는데, 예를 들어 1905년 관장직에 있던 로빈슨(Edward Robinson)이 미술관 이전과 복제미술품에 대한 전시를 반대하는 이사회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사임을 결정하자 메트로폴리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06년 로빈슨을 신설된 부관장직에 영입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도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보스턴미술관의 이집트미술 담당 큐레이터였던 리트고(Albert Lythgoe)를 영입하여 이집트미술 부분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보스턴미술관은 1909년 지금의 위치인 헌팅턴 애비뉴(Huntington Avenue)로 이전하였으며 수차례의 개축과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개관 이후 미술관은 보스턴 시민들의 기부금 모금에 의해 건물의 외관을 정비하기도 하고 소장품 기증이 늘어나면서 필요한 전시 공간을 조금씩 늘려 나아갔다. 보스턴미술관은 1999년에는 일본의 나고야에 분관을 설립하여 매년 5개월씩 두 차례의 전시를 개최하도록 보스턴미술관의 소장품을 나고야 분관에 대여해주고 있다. 


3-3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뉴욕에 이어서 미국의 제 2대 도시로 알려진 시카고는 1871년 대화재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으나 1893년 국제박람회를 계기로 도시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미술관과 공연장, 도서관 등의 문화시설을 확보하여 현재의 문화지형을 형성하게 되었다. 시카고미술관의 경우 1866년 35명의 시카고 출신 예술가들이 유럽의 미술아카데미를 모델로 시카고디자인아카데미(Chicago Academy of Design)를 세워 운영하다가 1871년의 대화재에 의한 타격과 경영부진으로 문을 닫게 되자 1878년 일군의 사업가들이 경영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이사진들은 아카데미를 살려내지 못하고 모두 사퇴하였고 새로 구성된 이사진들은 1879년 다시 시카고미술아카데미(Chicago Academy of Fine Arts)를 세워 디자인아카데미의 자산을 매입하는 형식으로 재출발하였다. 이 미술아카데미는 1882년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로 명칭을 변경하여 미술학교와 미술관을 동시에 운영하는 형태로 오늘날까지 운영되어오고 있다.

초대 학교장 겸 관장 지낸 프렌치(William M.R. French)와 금융가 출신의 이사장 허친슨(Charles L. Hutchinson)은  시카고에서 1893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박람회가 열리자 박람회측이 미술관과 함께 건물을 지어 박람회 기간 동안 학술대회장(scholarly congresses)으로 운영하다가 박람회 종료 후 자신들이 건물을 인수할 것을 제안하였고 박람회 측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위치에 지어진 시카고미술관의 내부는 주로 루브르의 공간을 참고로 건설되었으며 외부는 베니스의 산마르코 성당과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 등을 차용하여 지어졌다. 이러한 건축 양식이 상징하는 것은 당시의 시카고미술관을 후원하던 사업가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카고를 과거에 한창 번창하던 베니스와 피렌체, 그리고 고대 아테네와 동일시하고 싶은 바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나 보스턴미술관처럼 시카고에 미술관이 설립되자 이 지역의 독지가들과 문화연구 단체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유물과 작품들을 앞 다투어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고대미술, 중세미술, 인상파미술, 도자기와 동양미술 등의 분야에서 조예가 깊은 소장가로서 작품들을 수집해왔으며 이렇게 수집한 작품들을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시카고미술관은 이 지역의 사업가들의 입장에서는 당시 시카고가 문화적인 이미지보다 상업과 물질주의의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을 누그러뜨리고 문화적 도시로 인식되는 것을 목표로 설립을 시작하였으며, 미술관의 입장에서도 시카고의 사업가들의 경영기법과 기부행위에 힘입어 다른 지역의 미술관보다 활발한 운영을 기대할 수 있었다. 미술관의 초기 소장품은 다분히 교육적 목적으로 수집된 오브제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러나 미술관 측은 1890년경부터 유럽의 주요 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허친슨을 비롯한 미술관 이사들과 지역의 유지들의 기증과 기부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미국사 연구가인 호로비츠(Helen Lefkowitz Horowitz)는 시카고미술관 후원자들의 기부활동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호로비츠에 따르면 앵글로색슨계이며, 주로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구성된 뉴잉글랜드 시카고 지역의 백인 사업가들이 미술관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 가운데 하나를 남북전쟁 이후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든 상황을 예술 후원을 통해 전환시켜보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미술관에 대한 후원을 통해 시카고의 지역 사회문제에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계급 주도권(class hegemony)을 지키고 더 나아가 이를 확대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시카고미술관의 초기 설립 목표는 “미술학교를 운영하고 미술작품을 창작하여 전시하고, 그것을 적절한 수단으로 계발하고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 미술관의 기능이 확장되면서 미술품을 수집, 연구, 전시하는 기능으로 확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미술학교 교사와 작가들 중심의 운영이 예술 활동과 소장품 구입을 후원하는 기업인들과 큐레이터들로까지 확대되었다. 미술관은 점차 소장품의 범위를 유럽의 근대와 르네상스 미술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지역으로 확대해갔으며 장르 면에서도 사진과 건축 등의 분야로 소장품의 범위를 확대시켜 나아갔다. 현재 시카고미술관은 고대나 르네상스미술과 함께 인상파시기의 미술품 가운데 중요한 작품들을 많이 소장한 미술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13년 시카고미술관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나 보스턴의 보스턴미술관과 달리 미술관에서 아모리쇼를 개최하였다. 비록 대중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받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학생들도 마티스 등의 유럽 작가들에 대해서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시카고의 미술품 컬렉터들은 동시대의 유럽미술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시카고미술관의 설립자들은 미술관이 도시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노동자 계층의 일반 대중들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시카고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는 사우스 미시간 애비뉴(South Michigan Avenue)는 오늘날에도 도시의 중심부에 속하여 편리한 대중교통의 혜택을 누리며 연간 수백 만 명의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2009년 5월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설계했던 영국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건물이 증축되었는데 이 건물의 3층은 건너편 밀레니엄 파크와 연결통로로 이어져있다.

 

4. 결론- 미국식 문예부흥기에 설립된 미술관들이 주는 시사점


미국이 1853년 세계산업박람회를 개최하게 된 것을 계기로 북부의 주요 도시에서 부와 명예를 이룩한 사업가들은 이전보다 깊이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1865년 남북전쟁을 치르고 나자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으로 자신감을 얻게 되었으며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국제적 규모의 미술관과 박물관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독립전쟁 이후 미국은 정치적으로 안정되면서 사회 지도층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이 줄어들고 그만큼의 관심이 예술 후원활동으로 전환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당시 미국사회가 산업화로 인한 노동력 수요 증가로 인해서 유럽으로부터 급속하게 유입되는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노동인력들을 미국사회에 순조롭게 흡수시키는 방법으로서 뉴욕, 보스턴, 시카고 등의 대도시에서는 학교나 교회 이외에 미술관과 박물관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도시의 지도층 인사들이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해 자신들의 국제적 위신을 높이고 국내적 안정을 꾀하고자 노력한 것 등은 한국의 국제사회로의 개방 과정에서 지난 수십 년 전부터 오늘날까지의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과 유사한 점이 있다. 

1870년경부터 시작된 미국식 문예부흥기에 미국의 대표적인 도시에서 일어난 미술관 설립의 움직임은 그로부터 100년 쯤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여름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무대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늘려가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에 관한 설립과 확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산업적으로도 1970년대부터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인구의 탈농촌화 및 도시유입 현상, 그리고 최근에 와서 고도 산업화와 노동시장의 국제적 개방에 따른 외국인 결혼 이민자들과 노동자들의 유입,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다문화 가정의 국내 적응 문제 등은 시간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르네상스 시기와 유사한 현상을 보여주며 일부 해결방법을 시사해주는 것 같다.

미술관을 통한 문화 컨텐츠의 대중적인 보급은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기득권층들이 예측하였던 것처럼 종교를 통한 사회의 순화 기능을 대체할 만한 효과를 불러올 수 있었다. 미술관의 이러한 역할은 이민 초기의 혼란스런 미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와 같이 압축적인 경제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계층간의 갈등과 불화를 효과적으로 누그러뜨리는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물론 미국의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관 설립과정과 최근 우리나라의 미술관 설립과정 사이에는 유사점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최근 들어 국공립미술관의 신축과 증축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도 개인이나 기업의 미술관들도 하나 둘씩 개관되거나 개관을 준비하는 것이 포착되기도 한다. 개인의 재산을 바탕으로 설립된 미술관에 대해서는 그 미술관이 과연 사회적으로 긍정적 기여를 하는가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의 양면적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들을 넘어서 개인에 의한 미술관 설립은 어느 정도 공공성을 띠며 적지 않은 재정의 투입이 필요하므로 정부에서는 공공미술관의 설립과는 별도로 사립미술관의 설립에 대해서도 공공성을 담보로 어느 정도 제도적인 지원을 해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설립자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선가적인 마음 자세도 갖출 필요가 있다.  

미국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미술관은 그 사회의 변화와 발전의 시기에 사회적 이질감과 마찰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기구라는 인식을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국의 사업가들이 느꼈던 것처럼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자신들의 사업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인식 역시 필요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앞으로 정치와 경제의 안정이 더욱 공공해지면 자본가와 정치가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미술관 설립과 운영의 주체가 누구이건 간에 미국미술관들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여가 활동과 교육에 이바지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를 위해서는 미술관에 대한 대중적인 접근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관람객의 신분이나 인종적, 문화적 배경을 포함한 어떠한 조건에 의한 차별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세스놀라 관장과 구디어 사이에서 작품의 진위문제에 관한 대립이 있었던 사례와 마컨드의 위작 논란, 그리고 J. P. 모간에 의해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조건부 기증 행위가 폐지된 것에서 보는 것처럼 미술관의 운영에 있어서 외부의 불필요한 간섭을 배제하고 전문성을 가진 큐레이터의 자율적인 역할을 보장하는 것은 미술관이 더욱 전문적인 기관으로 성장하고, 그로 인해서 결과적으로는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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