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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조형적 실험으로 이어지는 예술적 열정

하계훈





하계훈(미술평론가)


박주경의 작품에는 일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예민한 시선과, 이 시선이 포착한 대상을 예술적 열정으로 녹여내는 힘이 함께 드러난다. 20년 넘게 작가는 거의 매일 손에서 붓과 나이프를 놓은 적이 없으며 캔버스 앞에서 팔레트를 들고 물감과 놀고, 씨름하고, 대화하며 창작의 포자(胞子)를 증식시켰다. 그리고 이 포자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여러 가지 주제로 성장하였고 그 성장의 과정에서 때로는 붓으로 또 때로는 나이프로, 그리고 때로는 물감이 아닌 콜라주 기법으로 이미지화되었다. 


작가에 따라서는 한 평생을 단일한 스타일로 작업해오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작가는 작품이 수시로 변화하고 다시 예전의 스타일로 회귀하기도 한다. 작가의 작품이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에는 작가 내부의 감성과 외부적 상황의 변화가 작용한다. 예를 들어 피카소는 배우자가 바뀔 때마다 작품의 스타일이 변화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말년에는 종종 초기의 작품 스타일이 보다 성숙한 표현으로 되살아나거나 몇 가지 스타일이 융합적으로 승화되기도 하였다. 


박주경의 경우에는 후자의 경우처럼 여러 가지 작품 스타일을 실험하고 완성하면서 하나의 형식이 만족스런 수준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서면 작가가 다시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는 작품 활동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박주경 역시 초기에는 재현적인 작품을 통해 정물과 풍경 그리고 인물에 대한 표현을 중심으로 작가로서의 역량을 축적해 나아갔다. 이러한 조형적 연구를 해온 박주경은 최근 들어 크게 두 가지 스타일의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첫째로 박주경이 관심을 갖는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자신의 감성적 촉수에 포착되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공감의 시선이다. <citizen>이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여성으로서 당연하게 발현되는 미적 감각과 장식 본능이 화면 속의 다양한 인물들의 동작과 표정으로 형상화되는 작품은, 형이상학적 논리나 미학적 직관보다는 여성 특유의 관찰력과 친화력을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감성을 내포하고 있다. 도시의 일상을 연출하는 군중들의 다양한 표정을, 그들의 의상과 소지품을 통해 표현한 이러한 작품에서 박주경은 단색조의 배경 위로 인물의 전신 윤곽을 드로잉하고 일부 인물에 다채로운 패턴의 패브릭을 오려 붙임으로써 화면에 생동감과 도시적인 화려함을 부여한다. 


이러한 작품에서 작가가 패브릭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는 콜라주 기법은 원래 종합적 입체파 시기의 피카소와 브라크가 이전에 공간을 분할해나가면서 파편화되어버리는 형태의 회복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화면에 다양한 활력을 부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오브제들을 도입한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주경 역시 이러한 콜라주 형식의 표현을 통해 화면 속에 도시적 생동감과 화려함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 공간에 부유하듯 움직이는 인물들은 표정이 생략된 익명의 도시인들로서 이 공간에 유입되어 자유로운 오늘을 즐기는 모습(carpe diem)으로 표현되어 있다.


박주경이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작품 스타일은 정지된 화면에 착시적 효과에 의해 움직임을 불어넣는 형식의 작품이다. 오래 전부터 붓이 아닌 나이프를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해오던 작가는 능숙한 솜씨로 형상화한 인물의 실루엣에 세로로 가늘게 그어진 선들을 화면 가득 적용함으로써 옵아트(Op Art)의 착시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화면 속의 인물의 춤추는 동작은 이러한 표현에 의해 사진으로 포착한 듯한 정지된 표현이 아니라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렌티큘러 효과를 일으킨다.


이번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출품되지는 않았지만 춤추는 인물의 모습에서 작가가 채택하고 있는, 나이프를 이용한 인물묘사 방법은 그 대담함과 능숙함에서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밖에도 붓을 사용하지 않고 화면을 구성하려는 화가들의 시도는 튜브의 물감을 캔버스에 직접 짜 넣거나 손가락으로 물감을 발랐던 반 고흐와 붓 대신 막대를 이용하여 물감을 뿌리며 화면을 구성했던 잭슨 폴록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창작 태도 가운데 하나는 작가 내부에서 용솟음치듯이 분출되는 창작 의욕을 폭발하듯 발산시키는 열정적인 모습이다. 


박주경 역시 분출하듯 솟아나는 창작 의욕을 나이프를 이용한 회화적 기법으로 능숙하게 표현해왔고 이에 더하여 화면 속의 움직임 효과로까지 표현의 다양성을 확대시키려는 시도로서 이러한 작품을 제작해오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옵아트적인 표현은 화면 안에서 서로 상반되는 기질의 조합에 의해 대조(contrast)와 균형(balance)의 효과를 자아낸다. 나이프로 표현된 인물들이 열정과 감정으로 태어난다면 수학적 계산과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각효과로 화면에 그어진 수많은 수직선은 이성과 논리에 의해 표현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반된 두 가지 표현은 결과적으로 박주경의 작품에 풍부한 표현의 다양성을 부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화면의 균형을 유지하게 해준다. 최근 작가는 이러한 선을 보다 세밀하게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제작 태도는 작가 박주경의 창작 활동에서 사고의 폭을 넓혀주고 자신의 작업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것이며, 이로부터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에 의한 제 3의 양식이 탄생할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처럼 작가 박주경은 오랜 작품 활동을 거쳐 오면서 한 가지 형식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실험하면서 자신의 주변을 관찰해오고 있다. 이러한 부지런함과 열정의 댓가로 최근 박주경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앙드레 말로 협회 대상, 프랑스 테일러 재단에서 수여하는 테일러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상이 작가의 작품세계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는 없지만, 박주경의 경우 이러한 수상을 계기로 작가의 예술적 열정과 직관이 조금이나마 더 부추겨지는 모멘텀으로 작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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