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색채추상을 통한 사유와 공감

하계훈





하계훈(미술평론가)



계몽주의 시대와 세기말, 그리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시대를 지나면서 인간은 사고하고 기억하고 상상하는 생활의 영역을 넓혀왔고, 화가들 역시 역사와 종교적 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예술노동에서 벗어나서 점차 창작의 주체인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기관조나 개인적 경험과 감정을 자기중심적으로 외화(外化)하는 작업에 몰입하여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하는 회화형식을 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미술사의 한 부분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1950년을 전후한 시기의 서양에서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 타쉬즘 등으로 불리던 일련의 추상회화 작업들은 그 작품들과 작가들이 속해있는 사회의 역사 속에 기록된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에서 작품 탄생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전개 과정에서 치유의 실마리 중 일부를 동양적 정신성이나 서예와 같은 예술형식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 시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표현은 그 시대가 불러일으킨 특징적인 현상의 대응과정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개별 작가들의 작품들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벌어진 사건과 다양한 현상에 대한 대응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대응의 방법은 작가 개인의 기질과 성향, 감수성과 정신세계의 깊이 등등의 요소들에 의해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윤정은 작가로서의 출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시기부터 추상의 영역에 자신의 의식과 경험을 정착시켰다. 물감을 가지고 캔버스 안에서 역사와 종교와 신화를 이야기하기보다는 보편적 인간성의 체현(embodiment)으로서의 작가 개인의 기억의 잔상과 경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그를 통해 인간사의 희노애락의 이야기를 관람자들과 공유하는 작업을 진행해 온 이윤정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역사와 신화의 거대한 서사의 세계만큼이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신과 영혼의 세계를 탐험하였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윤정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기억의 감성적인 부분을 색채라는 매개체를 통해 회화의 형식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들과 감성적 상호교류를 실현시킬 관계망을 형성하는 작업을 창작활동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있다. 색채를 중심으로 한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이윤정의 화법은 직설적이기보다는 암시적이고 상징적이며 때로는 모호하고 다의적일 수 있지만 이러한 불확실성은 작가의 감각을 통해 나타나는 색채의 표현력이나 화면 안에서 성공적으로 드러나는 색채의 리듬과 조화, 그리고 약간의 흘러내리는 물감과 흩뿌려진 색선들이나 낙서처럼 끄적거린 듯한 이미지들과 화면에 투척된 듯한 이물질이 불러오는 작가의 제스처 등의 설득력으로 인해 소통의 언어를 다양화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색을 통한 관계의 형성과 소통의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다. 


이윤정이 구현하고 있는 색채 추상의 경우에는 작품의 형성에 작용하는 색채의 상징성과 표현력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녀의 추상은 화면에서 흔히 존재해온 것들이 제거되어 온 결과로서의 회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윤정의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녀의 작품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윤곽이 분명한 구체적 형태가 배제되고 있으며 이야기가 숨겨져 있고 미리 계획된 화면의 구조가 생략되어 있다. 우리가 굳이 보링거의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추상작업은 이러한 배제와 생략에 의해 대상과 어느 정도 낯설거나 작가 자신과 감정적 동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회피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윤정의 작품은 색채 중심의 추상적 표현을 바탕으로 관람자들의 추억과 상상을 자극하려는 공감의 노력인 동시에 관람자들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이야기들이 감춰지고 생략된 작가의 독백으로도 읽을 수 있는 이중적인 것이다. 


직설적 언어의 전달력과 파괴력은 은유적이고 모호하기도 하면서 우회적인 언어를 무능하게 보이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속도와 성과의 즉각적인 도출을 신봉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더 직설적 표현이 미덕으로 추앙될 수 있다. 하지만 직설적 표현의 공격성은 지속성과 공감 능력에서도 여전히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속적인 공감과 상호교류는 얼마간의 모호함과 그로부터 허용되는 상상이나 감정의 자극 등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윤정의 회화는 색을 통한 감각에 기초를 두고 관람객과 소통을 시도하며 경험과 기억을 받치고 있는 무의식을 자극하여 상상하고 추억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윤정은 서양의 추상표현주의적인 공격적 직설화법보다는 서정성이 가미된 추상적 표현을 동원하고 있다. 이윤정의 작업에서 색채의 표현은 기억의 잔상을 이미지화하는 주요한 도구로서 작가는 이러한 색채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지극히 절제가 필요한 순간과 자신의 내면을 폭발적으로 분출할 필요가 있는 순간을 적절하게 조절해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 듣는 추상회화의 격렬한 공격성이 이윤정의 회화에서는 오히려 억제되고 조절되어 소위 서정적 추상이라는 안정감과 더 나아가 초월적이고 때로는 몽환적이기까지 한 인식과 경험이 가능할 것 같은 장을 펼쳐주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해준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