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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하계훈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작품 <단순한 열정>에서 주인공은 한 남자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장을 보고 빨래를 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평범한 일상의 일들에도 집중할 수 없고 남들과의 대화나 교류 활동에서 항상 겉돌게만 되는 자신이 넋이 나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여기서의 열정은 주인공 여성의 연하 남자 친구에 대한 연애감정이지만 이처럼 열정은 우리를 한 곳에 집중하면서 모든 다른 것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생각과 활동을 단순하게 만드는가보다. 

영어로 심플(simple)이라고 번역되는 ‘단순함’은 복잡한 현대생활에서 하나의 도피처이자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해독제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장욱진 작가가 되풀이해서 말한 “나는 심플하다'라는 말 역시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관심사에 열정적으로 집중하기 위한 삶의 태도를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장욱진의 단순한 열정은 그가 이사를 하거나 새집을 지을 때 작품 창작을 중지하고 집짓는데 몰두한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한 번에 한 가지에 몰두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단순함이라는 말은 비워버리거나 떠나버린다든지, 탐욕을 내려놓음으로써 역설적이게도 '텅 빈 충만'으로 채우는 것, 그래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에 온전하게 인생을 집중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소탈함과 정직함을 일상에서 지켜내려고 하면서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라고 했던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장욱진 화백이 추구한 단순함을 설명해준다고 본다.

흔히 장욱진 화백의 작품과 삶을 이야기 할 때 소박하고 천진한 사고와 주변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 속에서 간결하고 단순한 묘사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구성된 화면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심지어 혹자는 작가의 작품의 크기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화면을 주로 사용해 온 장욱진의 작품을 단순함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단순함이란 욕심을 내려놓은 자연스러움과 함께 대부분의 것들을 내려놓음으로써 다다르게 되는 경지에서의 깨달음과 통찰력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비로소 참된 가치를 발휘한다고 생각된다. 마치 어린 아이의 그림처럼 단순한 선과 천진난만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듯한 구도의 화면이지만 그 안에 우주와 삶의 본질과 핵심이 굳게 자리 잡고 있는 형상을 담아낼 때 우리는 단순함의 위대함을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장욱진은 '...안다는 경지가 밑바닥부터 알고 촉감부터 알 것이며,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모든 사물을 확실히 보여주는 방법으로서 사물의 모습을 회화의 기본적인 요소로 극히 단순화되고 보편타당성을 지닌 기호화된 조형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해학적이고 유희적으로 읽힐 수 있지만 동시에 삶과 사회를 관조하는 통찰력이 만들어내는 상징성을 담아낼 때 그 가치가 빛나게 된다. 

이번 전시는 장욱진미술관이 개관 1주년을 기념하여 시작한 '단순함(simple)'이라는 주제를 여러 방향으로 확장시켜보는 전시로서 지난해부터 시작된 동일한 주제를 그 연속선상에서 이어가는 두 번째 기획전이다. 이번에는 장욱진과 그의 후학들이라고 할 수 있는 4명의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장욱진이 추구해왔던 또 다른 형태의 '단순함'의 정신을 찾아보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곽남신, 김봉태, 이봉열, 홍승혜는 연령과 경력, 화풍과 주제 면에서도 각각 다른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들이 그들의 선배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장욱진의 작품과 단순함이라는 주제를 놓고 접점을 이루는 곳에서 어떻게 만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의 단순함이 얼마만큼 공감되고 공유되며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삶의 태도로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인지 살펴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곽남신은 평면에서부터 설치에 이르기까지 매체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하게 조형적인 실험을 해오는 작가다. 작가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화무쌍한 세상사를 평온하게 바라보고자 노력하며 인간의 본성을 탐구해온 그는 언제나 작가로서의 '감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에서는 회벽처럼 제시된 화면에 기호와 이미지들이 듬성듬성 뿌려진 작품을 통하여 삶을 관조하는 듯한 작가의 멈추지 않는 실험정신과 감수성의 예리한 촉수를 드러내거나, 작업실에 무심하게 놓인 채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온 오브제들을 통해 모든 것이 한 뿌리에서 나온 다른 모습이라는 동근이상(同根異相)의 철학을 말해주기도 하는데 우리는 모든 사물의 근원을 하나로 수렴시키는 관점과 단순함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봉태는 학창시절 직접적으로 장욱진의 가르침을 받은 작가다. 장욱진 작가가 '그림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다'고 하였으니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을지는 알 수 없겠지만 장욱진을 제자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준 스승으로 기억하는 그는 장욱진 화가의 덕소 화실 외벽 벽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미국 유학을 통해 서구적 조형원리를 습득한 뒤 귀국하여 우리 전통의 오방색 등을 주제로 작업해 왔던 김봉태의 최근작들에서는 기하학적인 정신과 조형원리에 의해 창조되는 단순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경쾌한 운동감과 입체감이 표현되어 있다. 김봉태 역시 자신의 작업을 '단순한 것을 보다 강렬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태도로 작업에 임하면서 장욱진의 단순함 정신과 접점을 찾아낼 수 있게 해준다.

이봉열 역시 학창시절 장욱진의 제자로 분류된다. 1968년 첫 개인전을 통해 모노크롬 계열의 작품을 선보인 이봉열은 화면 속에서 문학적·설화적 이야기를 배제시키면서 회화성을 최소한으로 잃지 않는 상태에서의 평면지향 작업을 해오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해 화면의 구조와 해체의 변주를 모색해온 작가는 1990년대부터 '몸'의 개념을 중심으로 화면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을 쏟아온 것으로 평가된다.

홍승혜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1990년대 중반부터 캔버스와 붓을 대신해 컴퓨터를 이용한 기하학적인 이미지들을 생성시키고 그 이미지들을 가구나 벽화 조각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에 적용시키는 작품을 해오고 있다. 간단한 몇 개의 선들이 만들어내는 사각형과 블록 형태의 단순한 도형은 그 자체로서의 단순함을 기본으로 하지만 평면과 3차원의 공간에서 자기반복적인 증식과정을 통하여 조형적 무게감과 비중을 확보하게 된다. 픽셀의 결합과 축적을 통해 그리드를 조합, 반복, 분해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 유기적인 기하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홍승혜는 이 과정에서 어떤 사물이나 이미지를 이루는 가장 작은 기본 단위가 구축되고 증식되면서 만들어내는 유기적인 조형 형태를 탐구함으로써 관람객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무수히 많은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인 픽셀의 네모난 형태가 어떤 조형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를 체험하고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장욱진은 예술 표현은 곧 작가 정신의 표현이자 자신의 발견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은 어려운 것인데, 그 까닭은 그러한 표현 안에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고백이 담기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형태의 단순함과 그 속에 담긴 의미 있는 소탈함이나 자유로움을 평생 동안 견지해 온 장욱진의 작품이 우리 미술사에 남긴 족적의 무게는 후학들에게 고마운 선물이면서 가슴으로 듣는 선배의 가르침일 것이다. 이번에 장욱진과 함께 단순함을 주제로 전시회를 갖는 4명의 작가들 역시 각자의 창작에 대한 철학을 자신의 방법으로 작품에 담아내고 있지만 모두들 장욱진이 추구해 온 단순함의 미학정신에는 뜻을 같이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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