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Markus Lupertz and A.R. Penck '회화 그리고 회화'

하계훈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유럽과 미국의 힘의 균형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승전국인 미국이 상승세를 탄 반면에 승전국과 패전국이 공존하는 유럽대륙의 각국들은 승자는 승자대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어려움을 겪었고, 패자들은 그들대로 파괴의 상처와 패전의 책임이라는 질곡 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와 문화의 영역에까지 확대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뉴욕은 2차 대전을 마무리하면서 파리를 제치고 새로운 세계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2차 대전 직후 유럽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위협과 이를 걱정하는 서방의 새로운 맹주인 미국 사이의 긴장을 반영하는 장이었다. 미국은 유럽의 빈곤이 공산주의를 불러올 것이라는 염려로 인해 유럽 16개국의 경제 회복을 지원하는 일명 마샬플랜을 집행하는데, 이 계획 덕분에 독일은 경제적인 회복의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1950년대 독일은 최근까지 중국이 보여준 놀라운 경제성장률과 유사하게 연 9.7%의 성장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독일의 경제회복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후 독일의 미술은 신표현주의와 개념미술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부활을 모색하였으며 이 중심에 독일의 전후세대 예술가들이 있었다. 뤼페르츠와 펭크는 이러한 독일의 재건과 번영의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작가들이다. 그들이 미술계에 뛰어들게 되는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뉴욕을 중심으로 팝아트나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미술이 주도하는 시기였다.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전후 복구 과정에서 높은 성장을 달성한 독일은 군사적으로는 발이 묶여있지만 경제와 문화에 있어서는 자신감이 충만하니 미술계에서 뉴욕의 독주를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르쿠스 뤼페르츠 와 A.R. 펭크(본명: 랄프 윙클러) 는 임멘도르프, 바젤리츠, 키퍼 등과 함께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의 1세대를 형성한다. 서양미술사에서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가 뉴욕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유럽은 이전보다 위축된 미술계를 목격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유럽미술의 침체기를 지나면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를 거쳐 미국주도의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미술운동의 하나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신표현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신표현주의 미술의 대표 작가들은 이러한 전후 시대를 겪은 작가들로서 독일의 재건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패전국의 역사를 회고하는 것이 금기시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들이다.


뤼페르츠는 1941년 당시 동독 땅이었던 체코의 서북부 마을에서 태어나 8살 때 부모를 따라 서독으로 망명하여 뒤셀도르프 근처의 소도시에서 자랐다. 1962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한 작가는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것 이외에도 시를 짓고 재즈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분단된 독일의 양면을 기억하는 젊은 작가에게 현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동독과 서독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정신적 빈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치 시대의 기억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정치적, 문화적 자기정체성을 찾기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품활동에 들어간 뤼페르츠가 선택한 방법은 현실 공간에서의 이탈과 격리였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인체의 비례를 왜곡시킨다거나 사물의 자연형태를 변형시키고 거칠고 무계획적인 표현으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화법(?法)의 변혁을 시도하였다.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도 작가는 도전을 차용하여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뤼페르츠는 회화란 어떤 이념도 표현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예술을 통한 세계의 변화와 인간 사고의 개조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가능성을 신봉하는 화가이자 음유시인의 현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방어기재이며 양식적 주관성과 감정의 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73년 동서독이 UN에 동시가입하는 해에 뤼페르츠는 자신의 시를 통해 ‘예술가는 예언자’라는 자신감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번 출품작 가운데 뤼페르츠의 <Untitled (Kongo - Korrektur des Konstruktivismus)>는 뤼페르츠와는 개인적인 관련이 별로 없는 콩고라는 주제로부터 출발하지만, 펭크의 권유를 받고 출품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 정부가 회화와 조각을 부르주아 미술형식이라는 이유로 부정하고 재료의 사회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비재현적 구성을 추구한 시각을 교정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2013년에 그린 <Arkadien- Weißer Stamm>에서는 등을 보이고선 인물의 오른편 바닥에 비례에 맞지 않게 거대하게 표현된 독일 사병의 철모를 통해 전통적인 독일을 연상시키고 있다. 뤼페르츠와 펭크는 독일 신표현주의 화풍을 이끈 대표작가들(본인들은 이러한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이라는 공통점 이외에도 몇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두 작가는 어린 시절 동독생활을 경험했고, 나중에 서독이나 유럽과 미국 등으로 창작 무대를 옮긴 점이나 문학과 재즈 음악에 대한 관심 등이 공유된다. 펭크는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1980년까지 동독에서 생활하면서 분단된 독일의 현실을 바라보며 혼란스런 시각을 갖게 된다. 작가는 체제의 억압이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절망감 등을 그만의 독특한 조형언어인 막대기 형태의 그림으로 표현하여 비밀리에 서방으로 보냈다. 이러한 그의 창작활동은 동독 비밀경찰에 의해 반체제적 움직임으로 낙인찍혀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 펭크의 작품들은 거의 단색조에 몇 개의 간단한 선들로 이루어진 단순한 화면 구성을 통해 동독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강압과 갈등으로 점철된 냉전시대의 역사적 모순을 축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상황 인식을 극복하고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지닌 조형언어인 '기호언어(Zeichensprache)'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였다. 


펭크의 작품에 대해서는 낙서 같은 해학과 자유스러움이 암호 같은 상징과 난해함과 공존하고, 유희적인 동시에 유토피아를 연상시키는 기호화된 형상들로 구성된 화면의 이원적 해석 작업이 요구된다. 수학기호나 암호문자같은 형상들로 구성된 펭크의 회화는 독일적인 주제, 즉 역사와 사회전반에 관한 메시지를 넘어서서 문명화된 사회를 관조하는 냉정함과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번에 이유진갤러리에서 열리는 뤼페르츠와 펭크의 2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통해서 관람객들은 2차대전 이후 성장한 독일 신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자아의 현실과 주변의 환경에 대한 시각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현대사회에서 발견되는 인간 본질의 문제로까지 작품의 이미지와 메시지를 확대시키는 두 작가들의 사유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