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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현실 사이, 그 어딘가에서의 서정적 관조

하계훈

예술과 현실 사이, 그 어딘가에서의 서정적 관조

하계훈(미술평론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인간과 그들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여러 가지 분석틀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방법론에 있어서 그들은 자주 자신들의 연구 대상을 유형화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유형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의 인식 방법은 다른 호사가들에게까지 확산되어 때로는 불필요한 유형화와 근거 없는 분류를 부추김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려 하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는 키 큰 사람은 싱겁고, 작은 사람은 매운 고추처럼 야무지고, B형 혈액형의 남자는 어떻고, 누구누구는 어떻고 등등의 그다지 믿을만한 근거가 없는 판단에 승복하기도 한다. 
40대 중반의 하이경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빈번히 예단하는 유형화에 희생될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관련 기업체에서 몇 년간 일하다가 자연스럽게 결혼 적령기의 선택에 의해 창작으로부터 멀어진 생활인이 이런 저런 일상의 경험을 거치는 어느 순간에 문득 떠오른 창작의 기억. 남편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나이드신 부모님들의 어려운 일도 나몰라라 할 수 없는 일상생활과 창작을 위한 자기만의 공간에서 은거하는 양립된 생활. 이러한 이력을 가진 작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쉽게 그 사람의 작품들과 작가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이 나왔겠거니라고 생각하면 보는 이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세심하게 하이경의 작품들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하이경은 작품을 통해 거창한 사회학적 담론이나 심리학적 이론을 풀어놓지 않는다. 그저 생활의 순간순간에 작가의 감수성을 건드리는, 일상의 행동반경 속 장면과 그로부터 연상되는 생각의 끝자락을 쥐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쫒아갈 뿐이다. 하이경은 때로는 삶의 틀 속에 갇힌 자기 자신을 문명사회의 인공적 공간에 갇혀서 편집된 자연에 투사시키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한발 물러선 시선으로 무심하게 바라보는 눈앞의 풍경에 대한 관조의 순간을 즐기기도 하는 것같다. 
지난 10년 동안 작가가 그려온 작품들은 대부분 이러한 풍경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작품 속의 풍경은 작가의 생활의 궤적을 반영하게 된다. 하이경의 초기 작품에서 작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신의 내부를 응시하였었다. 그리고 그러한 응시에서 풀려나오는 사유를 외부와 공유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이야기 나누는 편이었다. 이러한 자기대화법은 작품 가운데 패턴화된 표현 작업과정에서 작가가 떠올렸을 생각들과 여러 가지 마음이 수시로 교차했을 순간순간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은 나중에 작가 스스로 말했듯이 작업 과정 모두가 결국은 스스로의 위로와 해소가 되어주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하이경의 작품은 초기작으로부터 현재로 올수록 묘사의 사실성은 증가하는 반면에 화면의 밝기와 색의 투명도는 이에 비례하지 않고 점점 더 낮아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생각이 깊어지면 시각은 잠시 쉬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재현적 묘사도 감소하고 화면 구성도 단순해져야 할 것인데. 하이경의 작품에서는 오히려 독특한 시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시적 분위기를 더해간다.
하이경이 다루는 네모난 캔버스의 틀 안에 포착되는 장면들은 사실 우리들도 생활 속에서 여러 번 만났을 수 있는 장면들이다. 다만 그렇게 평범한 장면들이 작가의 눈과 마음을 통해 새롭게 포착되고, 이것이 다시 이미지화되어 낯익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하이경 작품의 의식적 프로세스를 구성한다.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의 주관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서정성이 풍부한 시적 공간들을 담고 있다. 이처럼 작가에게 중요한 소재는 문득 마주친 공간에서 그 당시의 자신의 기억과 정서가 투사되는 순간을 담고 있는 어떤 것이다. 
하이경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소재 가운데에는 그림자와 가로등, 그리고 비오는 날의 습도를 느끼고 숨쉴 수 있을 것같은 공기가 있다. 그림자는 어떤 물리적 존재가 빛을 받을 때 나타나는 반대편의 어두움의 부분이다. 이러한 그림자는 그 존재를 암시하는 형태를 유지하면서 빛의 각도에 따라 변형되고 더 나아가 때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 있는 형상이 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실재에 대한 허상이다. 하이경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그림자들은 이러한 의미 해석을 허용하면서도 화면의 중요한 조형적 구성 요소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가로등과 비는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으로서 지극히 시적일 수 있으며 보는 이들을 추억과 명상으로 유도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우리들을 쉽게 생각에 잠기게 해줄 것이다. 작가 스스로도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는 것처럼 작가는 자신의 심정이 투사되는 장면을 눈으로 포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슴과 청각, 그리고 호흡으로 공감하고, 그것을 작품화하는 과정에서 보다 숙성된 사유의 차원으로까지 자신의 감수성을 이끌어가고 있다.
하이경의 작품이 이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이유는 화면에 담긴 공간에 존재해야 할 것같은 인물들의 부재에서 오는 생경한 느낌일 것이다. 하이경의 작품 공간에는 좀처럼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화면 속의 공간은 익숙한 현실의 공간이면서도 이상스러운 느낌을 주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성격을 바꾸게 되기도 한다. 
형식면에서 하이경의 작품 화면에는 반복적으로 얇게 그어진 가로선이 작품 속의 이미지 위에 중첩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마치 창문에 쳐놓은 블라인드의 틈으로 바깥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대상을 관조하면서 삶의 의미를 사유하는 작가의 태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듯한 이러한 작품들은 하이경이 포착하는 풍경이 작가의 감정을 투사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블라인드로 구분되는, 이쪽과 저쪽으로  격리된 공간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작가가 두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과 예술의 세계 중간의 그 어딘가에서 작가는 서정적 관조의 시각으로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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