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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의 산

하계훈

이정원의 산

하계훈(미술평론가)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의 모티브를 선택하는 계기는 다양할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물론 이러한 고민은 미술활동이 후원자로부터 자유로워진 이후에 대두되는 문제다. 서양의 경우 중세의 화가는 주로 교회의 주문에 따라 작품을 제작했고, 르네상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군주나 부호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을 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 모티브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를 지난 뒤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비유럽권의 많은 지역에서도 이러한 전개 과정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산업사회가 도래하고 자본가의 층이 확대되면서 미술은 시장의 요구를 반영하거나 사회의 큰 흐름을 선도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미술시장이 크게 확대된 시기에는 작가들이 다시 자본의 요구를 벗어나 독립성을 확보하려고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성정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환경 시아에서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경험과 미학적 신념에 따라 작품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정원의 작품의 경우 우리는 산을 키워드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오래 전부터 취미 삼아 등산이나 빙벽 등반과 같이 산이라는 자연의 공간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활동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제목에 설악, 도봉, 삼각산과 같은 구체적인 지명이 부여될 수 있었다. 동시에 작가는 자연을 심층적으로 바라보는 풍수와 기(氣) 등의 학문적 연구도 병행하였다. 작가는 산길을 걸으며 많은 것을 사유해왔고 그러한 사유가 시각적으로 재현된 것이 이 작품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정원의 작품에 도입되는 산은 부감법적 관점에서 전체를 조망하면서 무심한 듯 전개되는 모습이기 보다는 물활론(hylozoism)적인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조형적 흐름을 형성하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내용적으로 명징하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서 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서는 객관적인 관찰과 함께 몸으로 직접 체험한 감각과 호흡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이러한 구도와 기운을 담으려는 시도를 하였음을 스스로 언급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관점에서 산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에는 우리 전통 산수화에서 자연을 관조하며 마음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투사시키는 작가의 태도가 담겨있기도 하다. 다만 전통 산수화에서는 문기(文氣)나 사의(寫意) 등과 같은 개념을 통해 주로 유교나 도교적 사유와 관조가 주로 표현되었던 것에 비하여 이정원의 현대적으로 번역된 산수풍경에서는 관념의 틀을 넘어서서 보다 인간적으로 다가서려는 감정 교류의 시도가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의 세부를 들여다보면 작가는 산속의 고요와 정적을 통해 관람자의 사유와 명상을 유도하려는 의도와 함께 그 장면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를 암시하는 공간에 그들의 체온과 흔적을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이정원의 작품은 주제와 기법, 이 두 가지 면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주제 면에서 이러한 정신성과 사유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기법 면에서는 작가 특유의 표현 재료와 방식을 도입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화면에 드로잉을 한 뒤 그것에 기초하여 세절기로 파쇄시킨 띠 모양의 종이 조각들을 세심하게 부착하고 그 위에 채색을 가미함으로써 그리기와 만들기라는 두 가지 작업을 한 화면 속에 도입한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작가는 성실한 노동의 집중적인 작업에 대해 산과 자연에서 자라는 나무와 같은 섬유 식물들이 펄프로 가공을 거쳐 종이라는 물질로 태어나 쓰임을 다한 뒤 파쇄되는 생성과 소멸의 순환과정을 담아낸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순환의 회로에서 작가가 파쇄지를 이용하여 작품을 창작해내는 작업은 다시 생명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라는 의미를 담는다.   
이정원의 작품에 표현되는 시간은 한낮이 아닌 새벽과 밤의 풍경이 대부분이다. 작가는 새벽의 맑은 정신과 한밤의 고요가 주는 사유의 깊이 등을 의도한 측면이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그와 함께 작가가 도입하는 작업 표현 방식이 이러한 시간의 풍경에 더욱 적합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화면 안에서는 파쇄지와 에어컴프레서 분사에 의해 채색되는 사물의 입체감과 율동, 빛과 명암의 대비가 주는 낭만주의적 신비를 느낄 수 있는데, 이 점이 작가의 독창성이자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산의 표정과 모습을 자신만의 독특한 재료와 표현기법으로 구현해내는 이정원의 작품들은 그 자체가 생명을 가진 개체로 이해해볼 때 성장과 진화의 단계를 거치게 될 것이다.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창작에 대한 이정원의 열정과 성실한 노동에의 몰입을 확인한 필자로서는 작가가 언급하는 의욕과 갈증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제 앞으로의 과제는 지금까지의 성과를 심화시키는 한편으로 새로운 소재와 표현을 개발하는 문제일 것이다. 필자는 이번 기회를 통해 작가가 이제까지 산을 모티브로 하여 쌓아 온 성과를 확산시켜 보다 폭넓은 작품 표현에 이르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역할을 맡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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