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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체험을 재현한 징후(徵候)적 풍경화

하계훈

작가의 체험을 재현한 징후(徵候)적 풍경화
Ominous landscapes translated from Artist's Experience

하계훈(미술평론가)

화가가 좋은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계기에 적당한 소재를 발견해내고 그것을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동원하여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재를 발굴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지만 작가가 몸소 경험하는 현장성이 그 무엇보다도 호소력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관람객과의 소통과 설득에도 이러한 방법이 가장 유효한 성과를 낼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함양하기 위하여 작가들은 전문교육 기관에서 일정 기간 동안 조형훈련을 받기도 한다. 
공성훈은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공과대학 대학원, 그리고 다시 미술대학 대학원을 다니면서 미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조형훈련과 실험을 거치고 나서 자신의 독자적인 개성을 확립하였고, 이러한 소통의 기술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키며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회화뿐 아니라 영상, 설치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섭렵하며 20여 년 동안 활동해 온 작가는 설치와 회화의 차이를 마치 문학에서의 두괄식 문장과 미괄식 문장의 차이처럼 생각하고 있다. 구체적인 설치가 마무리되기 전에 이미 작품이 설계되고 설치된 모습이 정해져 있는 상태가 설치작품의 특징이라면, 회화는 그 끝을 알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작가가 붓을 움직여야 하고 그 상태에 이르기까지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마치 미괄식 문장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공성훈이 여러 가지 표현 형식을 거쳐서 마침내 회화로 관심을 돌려 20여 년간을 작업해 온 것도 이러한 회화의 속성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98년 서울 외곽의 벽제 지역에서 거주하게 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생활공간 인근에서 목격한 식육견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에서 시작하여 공성훈의 작품이 소재 면에서 점진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은 작가의 작품 속에 생활 일기처럼 고스란히 담겨왔다. 공성훈은 서울 외곽의 신도시들과 자신의 거주지 부근의 공원과 산책로, 그리고 부산과 제주도의 바닷가 등을 답사하거나 여행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장면들을 화면 안에 자기 방식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이번 전시는 공성훈이 2018년에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한 시점을 계기로 작가의 20년간의 이러한 창작의 역사를 중간 정산하는 성격을 가진 전시다.
장르 구분상 공성훈의 작품들은 대부분 풍경화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작가 활동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공성훈의 화면에 반복해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표현 방식은 미술사 속에서의 일반적인 풍경화에 자주 등장하는 시간이나 공간과는 사뭇 다른 것을 읽을 수 있다. 우리 전통회화에서 풍경은 조선 후기에 실경산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 실제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일정한 화법에 의해 표현해왔다는 점에서 공성훈의 풍경화들과 접점을 찾기가 어렵다. 서양화 역시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점을 지적할 수 있으며, 사실적인 풍경화에 있어서도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배경으로 동원되거나 필요에 따라 그것이 편집되고 변형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 일반인들의 여행이 수월해지고 생활 속에 종교적인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등장하게 되는 풍경화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풍경의 파노라마적 재현과 그 공간에 스며든 초자연적인 정신성과 감흥 등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연의 모습은 가능한 한 자세하고 광활하게 재현되며 때로는 목가적이고 문명 회귀적이며 애국심이나 우리 삶의 근원을 제시하는 신화적 성격의 내용들을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야경이나 사나운 기후 아래서의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풍경화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풍경의 묘사에서 햇빛의 작용을 중요한 요소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성훈의 작품과는 어느 정도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더군다나 19세기에 들어서면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사회의 산업화가 초래하는 부정적인 현상들에 대한 불안감의 가시화와 이러한 불안의 해결책으로서의 풍경화의 역할은 역사적, 사회적 함의를 띠게 되기도 한다. 
풍경화는 도덕적 주제를 담아내기도 한다. 19세기 전반에 미국의 허드슨 강파(Hudson River School)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 콜(Thomas Cole)은 당시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해 변화되어가는 미국의 동부 지역을 목격하면서 “요즘 우리나라의 도덕정신은 이전보다 현저하게 낮아졌다. 현명함과 선의는 포악함이 판치는 세상에서 다 사라져버리고 이제 그들이 살아있는 한 악행과 피를 부르는 압제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며 자연의 소멸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태도는 도시화를 등지고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에 정착한 장 프랑스와 밀레와 같은 화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밀레는 풍경화보다는 그러한 자연 배경 안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활동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공성훈의 풍경화들을 관통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최근까지 작가가 햇빛을 극히 제한적으로 화면에 도입하고 있으며 짙은 단색조의 대형 화면에 명암의 대비를 극적으로 표현하여 원인 모를 긴장감과 불안감을 입혀놓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풍경은 사진적 사실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주입된 이중적인 화면을 형성하게 되고, 그 지점에서 우리는 공성훈의 작품이 일반 풍경화들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고 서술하는 방법 가운데 빈번하게 동원되는 방법은 미술사 속의 작품들과의 유사성이나 연관성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은 공성훈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수 있다. 작가는 작품 속의 장면에 작가가 몸소 현장을 방문하고 그 공간의 분위기를 눈과 함께 다른 오감의 감각기관을 통해 감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작가가 먼 나라의 옛날 풍경을 자신의 작품과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방법은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공성훈의 작품은 서양미술사의 주요 작가들 몇몇을 연상시켜주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작가가 제시하는 공간이 이러한 참고 작품들 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왠지 낯설고 기이하며 사실적이면서도 현실에서 한 걸음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교묘한 양면성과 반전이 감지된다는 특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가 작가의 창작 생활 20년 정도를 아우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일관된 관점으로 모든 작품들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편의상 공성훈의 작품을 몇 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98년부터 2000년대 초반의 작품들에서는 비교적 단색 화면에 자신의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오브제들을 모티브로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한동안 작가는 이곳에서 발견하는 개들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으며 그들과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게 설정됨으로써 작가와 대상 간에는 어느 정도 공간을 공유하는 긴장과계나 정서적 교감과 소통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은 작가가 자신을 화면 안에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는 않지만 화면 속 주요 모티브인 개들로 향하여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를 통해 작가 또는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가 그 공간에 심리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어두운 밤 한정된 공간을 비추는 조명은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이 평범한 공간을 마치 연극 무대에서 팔로우 조명(Follow Spotlight)을 받고 있는 모종의 상황이 전개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붉은 색 혹은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화면 안에 등잘하는 개들이 이방인의 틈입을 경계하듯 화면 밖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빛이 비치는 장면은 긴장감을 더해주며 곧 야성의 공격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해준다. 
이 시기에 작가가 그린 자화상(2001)은 특별히 주목을 끈다. 강한 명암의 대비를 화면에 담고 있으며 붉은 색조의 단색에 가까운 표현에서 위의 개들을 그린 작품들과 표현의 특징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는 화면 밖에 머무르지 않고 화면 속으로 들어가 주인공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자화상에서 보이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뜻밖의 누드상태에서 사실성이 떨어지는 팽창된 복부를 가지고 있으며 그 부분이 제일 밝게 하이라이트를 받는다. 이처럼 자화상에서 작가는 정작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에서 담아내야 하는 모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어둠 속에 배치한 특이한 표현을 보여준다. 화면의 오른편 뒤 배경에는 작가의 거주지와 연관된 신도시로 추정되는 장소의 불빛들이 색색으로 밝혀졌음을 읽을 수 있다. 대도시의 외곽에 세워지는 신도시의 밤은 이곳을 찾아 욕망과 향락의 일탈을 부추기는 황홀한 불빛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따라서 인물의 부풀어 오른 배와 배경의 유흥가에서 뿜어내는 화려한 불빛은 도덕적 상관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자화상은 곧 작가 자신으로 대변되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 굳이 그러려 하지 않았지만 이 인물의 모습은 벨기에 겐트의 성 바보(St. Bavo) 대성당에 소장된, 반 에이크(van Eyck) 형제의 제단화 속에서 선악과를 따서 손에 들고 있는, 원죄의 주인공 이브의 부풀어 오른 배를 떠올리게 한다.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공성훈의 작품에는 이전보다 다양하고 환상적인 색채의 스펙트럼이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여전히 화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명암의 대비이긴 하지만 이 무렵의 작품들 속에서는 마치 오로라를 연상하는 다채로운 색상의 그라데이션이 화면을 지배하면서 작가와 대상간의 거리가 더 멀어지고 공간의 크기도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다. 따라서 화면의 효과는 색채 면에서 화려해질 뿐 아니라 극적인 장관을 이루는 장면이 광활하게 전개된다. 작품의 소재는 여전히 작가의 활동 반경에서 포착되는 모티브들이 주를 이루며 야간이나 동트기 직전처럼 대기의 빛이 구름에 비치거나 대기중에 넓게 퍼져 나아가면서 다채롭고 화려하게 변화하는 순간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 시간대의 광원의 특성상 지평선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비춰지는 역광 빛에 의해 화면 속의 인물이나 자연물 등은 실루엣에 가깝게 표현되게 되어 바닥에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나 물위에 비치는 인물과 사물들의 그림자가 화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장흥>(2006), <벽제 화장터>(2006)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한 화면에 여러 장면들이 모자이크처럼 동시에 표현된 작품이다. 한 화면 안에 하나의 장면을 표현하던 작품들에 비하여 동시에 여러 공간과 시간이 하나의 화면에 표현되는 작품들은 좀 더 풍부한 내러티브를 제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깊은 밤 인공조명이 비추는 가운데 드러나는 화장장의 이곳저곳이나 교외의 모텔들의 이모저모를 한 화면에 담은 작품들은 그러한 작품을 대하는 관람객의 사유와 상상력을 증폭시켜준다.
마지막으로 대략 2010년경부터 공성훈이 자신의 작품에 담아내는 이미지들은 여전히 청회색 톤의 단색조 화면을 주조로 하고 있으면서 때때로 해 뜰 무렵이나 해질녘의 하늘에 나타나는 색채의 화려한 표현 등이 더해지기도 한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작가는 수평선이나 지평선이 화면의 중간에서 하늘과 맞닿아 있는 지점을 경계로 사실적 표현과 극적으로 과장된 듯한 표현이 한 화면 안에 담긴 작품들을 다수 제작한다. 특히 작가는 제주도나 부산 등의 해안지역 바닷가에서 포착하는 풍경에 이러한 표현을 자주 도입하고 있으며 파도가 부서지거나 천둥이 내려치기 직전의 하늘같은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순간의 장면을 즐겨 표현하고 있다. 알 수 없는 모종의 현상의 징후가 임박한 공간의 긴장감과 깊은 골짜기나 가파른 절벽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인물의 뒷모습에서 관람자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함께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담고 있는 자신의 풍경화 들을 ‘사건으로서의 풍경’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주변 공간의 풍경을 개성적으로 표현해오던 공성훈의 최근작에서는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가 담긴 <버드나무>(2015)와 <웅덩이>(2019), <덩굴>(2019)과 같은 작품들에서 작가는 이전보다 드라마틱한 공간의 긴장감을 암시하기보다는 화면의 평면화나 한낮의 햇빛이 도입을 새로이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번 전시가 공성훈의 이인성미술상 수상을 계기로 열리는 중간 결산 성격의 전시이기 때문에 이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창작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그 창작의 과정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니만큼 앞으로의 공성훈의 작품의 전개가 사뭇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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