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글의 조형성을 공감하여

하계훈

한글의 조형성을 공감하여

하계훈(미술평론가)

2008년 개관 이래로 몇 해 전부터 매년 안평대군과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모티브로 전시를 기획하기도 하고 이와 관련된 학술행사를 개최해오기도 한 자하미술관에서 이번에는 안평대군과 그의 아버지 세종대왕을 연결하는 고리로서 한글을 주제로 특별기획 전시를 마련하였다. 자하미술관은 안평대군의 집터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는 지리적 연고를 전시기획과 연결하여, 이로부터 파생되는 주제를 단계적으로 확산시키며 비교적 탄탄하고 꾸준하게 미술관 기획전시들을 운영해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 제 4대 왕인 세종께서 우리 백성이 문자로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싶어도 글을 쉽게 깨우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형편을 이해하고, 기존의 문자인 한자로는 제대로 자기표현이 안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한글을 창제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은 한글창제에 직, 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기여를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한글과 관련된 영화가 개봉되고, 경상북도 상주에 있다고 알려진 두 번째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하여 국민적인 관심이 높은 시점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시의성 면에서도 아주 적절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18명의 작가가 서예에서부터 회화와 입체, 그리고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관통하면서 우리 한글을 조형적으로 분석하고 자기화하여 작품으로 녹여내는 작업은 이미지를 중심으로 표현되는 미술 분야에서 이러한 주제에 접근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어려운 작업이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한번쯤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 출품한 작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1998년 안동에서 발굴된 무덤의 부장품 가운데 소위 ‘원이 엄마의 한글편지’라는 출토품에서 자신의 작품의 모티브를 이끌어내고 있다.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31세에 요절한 남편을 그리는 애절한 사연이 담긴 아내의 한글 편지는 그 내용에 있어서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마치 한 편의 일기나 짧은 소설을 읽는 듯한 감흥을 주기도 하여서 글을 쓰는 작가들뿐 아니라 시각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도 창작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글의 내용을 떠나서 당시의 상황을 추측해보더라도 ‘원이 엄마의 한글편지’는 세종대왕이 백성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한글창제의 취지가 제대로 구현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여 작가 가운데 류준화는 이러한 원이엄마의 사연에 공감하여, 젊은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내는 임신한 아내의 애처로운 감정이 글자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그녀의 편지를 따라 써보는 작업을 통해 상상 속에서 그 현장에 참여해본다. 작가는 이 편지를 통해서 원이 엄마를 그려보고 마치 그녀의 고결함을 말해주려는 듯이 피어난 하얀 목단을 화면 중앙에 탐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부귀영화와 품격, 그리고 행복한 결혼을 상징하는 목단의 꽃말은 원이 엄마의 애처로운 처지와 대비를 이루며 한 여인이 처한 상황을 더욱 안타깝게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화면 상단 오른쪽에 곱게 머리를 뒤로 올려 비녀를 꽂은 원이 엄마(로 추정되는 인물)의 뒷모습에서는 현실의 어려움에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살아가려는 여인의 의지가 읽히는 듯하기도 하다.
문봉선 역시 원이 엄마의 편지를 필사하듯이 색지에 먹으로 써내려가면서 그 여인의 마음을 더듬어보기도 하였고, 김종구는 자신의 쇳가루 글씨 작업에 대한 해석에다 원이 엄마의 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까지 연결하면서 자신이 만들어내는 ‘문자 덩어리’가 마치 원이 엄마라는 여인의 마음을 담은 ‘문자 응어리’로 전이된다는 각운(脚韻)의 재치와 기호학적 해석으로까지 작품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한글을 문인화와 서예와 연결하여 안평대군을 상상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박종회의 작품이나 안평대군의 삶을 떠올리며 그린 강병인의 소나무의 정신, 그리고 흙과 먹을 섞어 글자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획에 에너지를 담은 임옥상의 작품 등은 안상수의 타이포그래피와 김형관의 한글자판을 형상화한 작품, 정고암의 전각 작품, 그리고 오윤석의 글자해체 작업을 통한 언캐니(uncanny)한 이미지를 창출해내는 작업 등과 함께 한글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양하게 채택되어 작품화되는 현상을 펼쳐 보여준다.
허미자, 홍인숙, 그리고 강용면과 금보성의 작품에서는 한글의 형태가 회화의 중요한 조형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등장한다. ‘집’과 ‘사랑’이라는 감성적인 단어와 꽃다발을 연결한 홍인숙의 화화나 ‘약속’이라는 단어가 주는 사회적 의무감의 무게를 입체로 표현한 금보성의 작품은, 평면뿐 아니라 입체 작업을 통해서도 한글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길우와 유승호 역시 한글의 획과 자모의 형태가 화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면서 또한 현대사회의 디지털 문화에서 익숙하게 만나게 되는 화소의 단위로서 한글의 형태가 그 기능을 담당하는 작품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오프닝에서는 성능경의 퍼포먼스가 진행되었으며 출품작 가운데에는 미술평론가이자 행위예술 작가로 활동해 온 윤진섭이 한글의 모음과 연결된 발성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 연작 작품들도 함께 출품되고 있다. 이처럼 18명의 작가들이 다양한 관점과 해석에서 도출된 표현 기법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과 한글과의 접점을 모색해 온 실험과 노력이 한자리에 모인 결과가 결국 <안평과 한글-나랏말싸미>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해석과 표현의 다양성이 세종대왕과 안평대군을 비롯한 학자들의 한글창제에서 바라던 기대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번 전시는 자신의 내부로 수렴해 들어가는 감성을 표현하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결핍되는 역사의식과 거시적인 문화와 삶에 접목되는 개념을 작품으로 녹여내려는 노력이 읽혀진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