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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T 존립, 가능성과 유의미함

하계훈



K-ART 존립, 가능성과 유의미함




우리 생활의 여러 분야 가운데에는 국가적 구분이 없이 보편성을 지향하는 분야가 있는가 하면 그 구분을 명확히 하려는 분야가 있다. 그리고 구분이 명확한 분야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승부 대결이나 선의의 경쟁의식이 작동한다. 예를 들어 국가간의 스포츠 대결이나 경제 분야에서의 성과 측정 등은 후자에 속한다. 그렇다면 아트 분야에서 국가별 특징을 구분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 구분이 가능하다면 아트는 과연 국가간의 우열관계 측정과 서열화가 필요하거나 또는 그것이 가능한가?

요즘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소위 K-Art라는 단어를 보면서 필자는 과연 미술에 있어서 국가별 구분이 성립할 수 있는지, 또 그것이 굳이 필요한지 궁금해졌다.(사실 K-Art라는 용어도 아직 학문적인 용어로서의 정의는 부재한 듯하며 앞으로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논의와 인식의 공유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미술이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과도 다르고,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의 미술과도 다르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름’과 ‘우열짓기’는 별개의 것인만큼 우리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불고 있는 K-Art의 국제적인 확산을 무의식적으로 국제적 경쟁의 구도에서 이해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미술을 국가별로 구분하여 성격과 내용을 파악하는 방식은 아마도 르네상스 이후 미술품 수집과 전시 과정에서 그 양이 폭증함에 따라 일정한 기준을 세워 작품과 자료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시작한 듯하다. 예를 들어 초기 루브르박물관의 미술품들은 벽면 공간의 여백에 맞춰 작품을 끼워넣듯이 전시하는 방식에서 점차 이탈리아 작가, 프랑스 작가, 네덜란드 작가 등으로 구분하여 전시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유럽연합의 깃발 아래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의 유럽은 국가간의 과학과 문화에 대한 경쟁의식이 상당한 정도로 작동되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851년 런던 사우스켄싱턴에서 시작한 국제산업박람회다. 그리고 이 박람회에서 국가별 전시를 통해 각 나라의 과학과 문화를 뽐내는 방식을 적용하여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의 국가들이 앞 다투어 경쟁을 벌인 결과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파리의 에펠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제산업박람회의 국가간 경쟁방식을 미술계에 도입한 행사가 1895년에 시작된 이탈리아의 베니스비엔날레인 것이다. 지금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90개에 가까운 국가가 자국의 독립된 전시공간을 확보하고 그곳에서 자국의 작가를 중심으로 전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995년부터 한국관을 건립하여 매번 한국 작가들 가운데 국제적 경쟁력이 있는 작가를 선발하여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한류드라마, K-pop, K-food, K-beauty 등의 용어가 대중매체에서 유통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는 K-art라는 용어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미술이 국제무대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한 적은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출신의 작가가 일본이나 독일, 미국 등에서 개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것을 엄밀히 말하면 한국 태생일 뿐이며 조형교육과 작가로서의 성장의 토양은 외국이었고 심지어 작가들의 국적마저 한국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미술은 언제나 종교와 정치에 예속되어 왔고 근대 자본주의와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아래서는 언제나 힘센 진영의 논리에 지배되어왔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고 6.25 전쟁의 충격을 극복하여 경제적 도약을 이루기 이전에는 세계 미술계의 주류에 참여하기 어려웠으며, 1990년대 접어들어 세계적인 힘의 판도가 동서냉전 체제의 와해와 미술 중심의 다기화 현상이 일어나는 시점을 계기로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국가관 신축, 그리고 같은 해의 광주비엔날레 창설 등의 국제적인 활동을 통해 비로소 세계미술의 흐름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 세계 미술계는 비엔날레나 이와 유사한 국제미술제 형식의 행사를 통해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에 대한 담론이나 미술에 있어서의 주변부와 중심부의 관계 재설정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게 제기되는 듯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지역에서도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 등의 행사가 적지 않게 개최되었고, 한때는 비엔날레의 전세계적인 유행을 형성하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경제논리에 제압당하여 현재 상당수의 비엔날레들이 해당 지역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감당해내지 못하거나 경제적 이유로 부실화되어서 결과적으로 해당 비엔날레가 유명무실해지거나 폐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세계경제의 회복세에 편승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소더비, 크리스티 등의 경매회사와 바젤아트페어, 프리즈아트페어, FIAC 등의 미술시장이 활발해졌다.  이윤의 극대화를 주된 목표로 하는 이 분야에서는 미술계의 성과를 금전적으로 변환하여 측정하게 됨으로써 이제는 많은 돈과 교환할 수 있는 작품이 곧 우수한 작품이 되었으며, 경매회사와 아트페어가 대부분의 작가들의 지향점이 되었던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아트페어와 경매회사들은 2000년대 들어서 급부상하는 중국 경제와 동남아시아의 성장, 그리고 한국의 성장 등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높여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홍콩아트페어로 시작한 아시아의 대표적인 미술시장이 아트바젤 운영진들에 의해 매입되어 ‘아트바젤 홍콩’으로 재출발 한 것이나 경매회사들이 아시아 주요도시에 진출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K-art라는 말도 우리 미술계의 독자적인 약진이기 보다는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과 소위 한류드라마와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K-pop의 확산,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국산 화장품을 중심으로 하는 K-beauty의 열풍 등의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 올려놓은 기반 위에 한국미술의 차례가 돌아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난 몇 해 전부터 소위 단색화 풍의 작품들이 국제적인 관심을 받기 전에 유럽과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서는 근래에 급성장한 한국의 위상을 고려하여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작품 확보 비율을 높이려는 시도를 해왔었다. 예를 들어 김수자, 서도호, 이승택 등 단색화 계열과는 관계가 없는 작품들이 유럽과 미국의 주요 미술관 등에서 먼저 관심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최근의 단색화에 대한 열기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의 단색화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은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의 단색화’전을 개최한 데 이어 광주비엔날레 20주년이었던 2015년에는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한 상업 갤러리에서 ‘단색화의 예술’전이 열려 대부분의 작품이 해외 미술관에 판매되는 성과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단색화에 대한 관심은 외국으로 확산되어 2014년 뉴욕 소재 알렉산더 그레이 어소시에이츠(Alexander Gray Associates) 갤러리와 LA 소재 블럼앤포(Blum & Poe) 갤러리에서도 한국 단색화전이 열렸다. LA 전시는 2013년 단색화에 대한 영문서를 출간한 조앤 기(Joan Kee) 미시간대학교 미술사 교수가 기획했으며, 박서보·하종현·정상화 작가의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미술시장에서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가격은 10배로 뛰어 올랐고 그 열풍이 국내로 유입되면서 국내시장에서도 소위 단색화 열풍이 일어났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던 작가들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작업하면서 성장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단색화가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는다는 사실은 우리 미술계를 위해서도 상당히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분위기가 앞으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일각에서 말하는 포스트 단색화에 대한 준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우리들의 바람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한국의 추상회화가 요즈음과 같은 국제적 확산현상을 보이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다른 매체의 질문에 대해서 노벨상을 기대하는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 비유하여 답을 한 적이 있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기가 다가오면 우리나라 언론과 대중들은 이번엔, 이번엔 하면서 헛된 기대를 반복해왔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다른 나라의 작가에게 수상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왔다.

우리가 노벨문학상을 가져오지 못하는 이유는 몇 가지로 분석되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독서량이 이웃 나라들에 비하여 크게 떨어지면서 노벨문학상을 기대한다는 이율배반성을 지적받기도 한다. 얼마 전 미국의 유력 신문 가운데 하나인 뉴요커지에서는 이러한 우리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내용을 기사화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이유로는 국제적인 정보의 보급이 부족하였다는 분석이 있다. 

노벨상에의 도전에 실패하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 미술이 국제적인 약진에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로 국제적 소통 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시간대학교의 조앤 기 교수도 국내의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단색화의 약진 전망에 걸림돌이 되는 점으로 국제미술계에서 하이 컬처로서의 한국미술 에 대한 관심도가 낮기 때문에 한국 미술을 강조하기보다는 작품 자체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관심을 끌어야 하며, 동시대 아시아 미술이라는 맥락 안에서 전략적으로 주요 작가와 작품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고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추상미술에 대한 더 많은 외국어 정보와 심도 있는 미술사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우리 미술계에서 불고 있는 단색화 열풍과 그 바람의 국제적 확산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노벨문학상을 꿈꾸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떠올렸다.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의 독서량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비슷하게 '과연 우리는 얼마만큼의 우리미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독서하지 않으면서 문학상을 바라는 것이나 우리 미술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우리미술이 세계적으로 약진하기를 바라는 것은 묘하게 닮은 어리석은 구석이 있다. 

우리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거의 처음으로 단색화를 필두로 하는 우리미술이 국제무대에 진출하여 높은 관심을 얻고 있다. 비록 현재까지의 관심이 미술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전문적인 연구자들보다는 상업화랑이 앞서서 단색화 바람을 일으키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꾸준히 유지되고 더욱 확산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대로 우리 미술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미술 관람객들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감상하고, 응원하는 적극적인 후원이 꺼지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도 받아오고 우리 K-art도 국제적 무대의 상층부에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K-pop이나 K-beauty와 같이 국내에서의 전폭적인 관심과 든든한 후원이 바탕이 되어서 그것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K-art의 국제적인 약진은 어디까지나 국가간의 경쟁이 아니라 세계 인류의 보편적인 미의식과 문화발전에 기여하는 예술로서의 K-art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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