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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익훈 / 감각의 변환을 통해 동시적으로 표현되는 실재와 환영

하계훈



감각의 변환을 통해 동시적으로 표현되는 실재와 환영




하계훈(미술평론가)

엄익훈의 작품이 관람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주된 요소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철조 재료의 용접과 성형을 통해 보여주는 작품의 밀도와 조형성,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유기적으로 증식되어 가는듯한 작품이 점유하는 공간에 창출되는 움직임의 확장이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즉물적 작품이 조명의 개입에 의해 그림자라는 평면적 허상을 만들어내는데, 최근작에서 그 그림자의 형상은 철조 작품의 형상과는 사뭇 다르게 (주로) 인물의 실루엣을 표현해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에는 조각과 화화라는 3차원과 2차원의 대비, 추상성과 구체성, 그리고 실재와 허상의 결합이라는 대조적인 요소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절묘함이 있는 것이다.

작가의 초기 작품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엄익훈의 관심이 재료의 물성과 그 재료들 사이의 연결과 접합이 만들어내는 유기체적 확장, 그리고 그러한 물질적 증식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아가는 모종의 내러티브 및 정신적 서사와 사유를 시각적으로 전개시켜 나아가는데 있다는 점이다. 동판이나 스테인리스 스틸을 자르고 구부리고 다듬어서 용접하여 형상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용접이라는 접합행위에 의해 확장되는 작품이 비정형의 유기체적 증식을 진행시키면서 점유하는 공간은 작가뿐 아니라 관람객들의 상상과 사유가 담겨지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엄익훈은 이렇게 창조되는 공간을 비현실이 현실화되는 과정으로 보았고 그 역할이 바로 작가의 소명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철조 용접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빛과의 결합에 의해 더욱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조형의 지평을 전개시킨다. 엄익훈의 작품이 처음으로 빛과 결합되는 계기는 일정한 볼륨을 갖도록 용접되고 연마된 작품 내부에 자리 잡은 광원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이 전시장 벽 위에 그려내는, 폭발성을 머금은 그림자 드로잉이었다. 볼륨을 가진 오브제가 내부로부터 발산하여 투과되는 빛을 인접한 벽면위에 그림자와 빛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적 요소로 그려내는 작품에서는 입체와 평면, 실제와 허상이 공존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공간에 충만한 작품의 아우라는 관람자들을 현실의 세계에서 초현실의 공간으로 이어지는 물질적, 정신적 이행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형성되는 벽면 그림자 드로잉의 특징은 채색 도구나 필기구로 그리는 드로잉과 다르게 벽면에 안료가 물질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과 그 이미지의 성질에 있어서 광원의 위치나 밝기, 벽면과 광원 사이에 개입하는 간섭물체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초점의 명확도 등이 달라지면서 일반 드로잉이 갖기 힘든 역동성과 환상적 일루젼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벽면이나 바닥에 비추는 빛은 조도의 저하와 초점 흐리기 현상이 일어나기도 함으로써 그것이 화면의 표현성을 다채롭게 해주고 시각적 감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조명의 개입이 전제되는 상황에서만 가능할 뿐, 조명이 꺼지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상황으로부터 받게 되는 감각의 충격도 예비되어 있는 셈이다. 

서양의 18세기 예술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회화의 기원’이었다. 물론 이 문제는 이보다 훨씬 오래 전인 로마시대 박물학자 플리니(Pliny the Elder)의 궁금증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까지 동의했던 것은 먼 곳으로 떠나는 연인의 모습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벽에 그의 그림자 윤곽을 따라 모습을 그려넣은 에피소드로부터 회화의 기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실재와 허상이 우리의 상상력에 의해 실재와 동일시되는 신화적 차원의 상징성이다. 이와 비슷하게 엄익훈은 자신의 그림자 작품에 대하여 ‘실재하지만 부재하는’이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회화의 기원에 관련된 그림자 에피소드와 자신의 작품과의 접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엄익훈의 작품에서 그림자에 집중해보자. 그의 그림자 작품에서는 주로 인물들의 옆모습이 표현이 된다. 인물의 옆모습을 표현하는 전통은 로마시대 동전에 황제의 옆모습을 표현하는 관례에서 시작하여 14세기까지 초상화의 대부분을 차자하는 표현형식으로 자리잡아왔다. 르네상스시기에 약간 비스듬한 각도로 정면을 바라보는 새로운 인물 표현법이 등장하여 초상화의 표현이 자연스러워지고, 18세기 유럽의 상류사회에서 화려함의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초상화의 인물 표현도 화려해지고 그에 따라 제작비용도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에 경제적 이유에서 인물의 옆모습을 윤곽에 따라 그리고 내부를 검게 채우는 간단한 인물 초상화 기법이 도입되게 된 것이다.

엄익훈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실루엣 초상의 속성이 발견된다. 다만 작가의 작품에서는 빛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개입되어야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엄익훈의 철조 용접 조각은 그 자체로서도 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작가는 여기에 일정 지점으로부터 빛을 내는 조명을 가미하여 철조 조각의 그림자가 인접한 벽면에 비춰지도록 작품을 복합화시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업의 결과 엄익훈의 조각 작품은 실재하는 물성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그 존재가 감지되지 않는 인물의 허상이 광원의 개입에 의해 그림자 형태로 벽면에 드러나면서 비로소 그 존재감을 암시하게 만들어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작업의 성격상 색채의 다채로움이나 디테일의 묘사의 제한성, 인물이나 사물의 측면에 한정된 표현의 제한, 그리고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의 환경적 제한이 따르기는 하지만 엄익훈의 작품이 갖는 호소력은 성실한 손노동으로 창조해내는 철조 오브제의 견고함과 역동성이 빛의 개입에 의해 관람자들의 시선을 또 다른 그림자 이미지로 유도하고 있음으로 해서 관람자들에게 두 방향으로 시선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람자들은 엄익훈의 작품을 선택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고, 또는 동시에 두 가지 감각의 변환을 통해 동시적으로 감상하면서 실제와 허상, 3차원과 2차원, 추상과 구상 등의 대조적 요소들을 경험하고 그것들을 사유하는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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