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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경 / 실(絲)로 말하고 눈으로 듣기

하계훈

한국화를 전공한 노신경이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은 좀 특이하다. 작가는 붓 대신 바늘을, 종이 대신 천을 사용한다. 노신경이 이처럼 천과 바늘을 이용하여 바느질 회화(sewing machine drawing)로 그 표현의 범위를 넓혀가게 된 것은 어릴 적 작가의 집안에서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따라서 우리는 노신경의 작품 속에 스토리텔링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현대인이 점점 잃어가고 있는 가족적 친밀감과 유대감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관계의 단절과 소외를 극복하고 소통과 교류를 희망하는 작가의 정서를 읽을 수도 있다.

화선지와 먹으로 그리는 한국화가 아니라 천과 실로 의식의 수면 아래 잠재해온 기억을 재구성하는 노신경의 화면은 내용면에서 개인적 기억을 현재화하는 시도이며 표현 형식에 있어서는 전통적 한국화가 충분하게 허용해주지 못하는 자유와 상상의 확장을 가져다준다고 볼 수 있다. 노신경의 작업에서 천과 실은 곧 새로운 차원으로 치환된 종이와 붓이라 할 수 있으며 작가가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매체를 통해 관람자와 보다 보편적이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채널을 구축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매체의 전환과 확장의 개념은 서양미술사에서 20세기 초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으며, 좀 더 구체적으로 천과 바느질이 이루어지는 작품은 이보다 더 오래 전부터 퀼트 등의 공예품에서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바느질과 관련된 한국의 전통 민속에서는 보자기와 같은 민속 공예품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는데 노신경이 조각 천을 이어 바느질로 화면을 구성하던 초기의 작품들은 그 이미지가 우리 전통 민예품인 조각보와 상당히 흡사하다. 실제로 작가가 자신이 밝힌 것처럼 노신경은 보자기에서 영감을 얻어 바느질 회화를 시작하게 되었고 여기서부터 지금의 작품으로 진화해 나아갔다.

그러나 노신경의 작품이 퀼트나 조각보와 다른 점은 여전히 한국화의 정신과 회화적 조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바느질 작업과 함께 우리 전통의 천연 염색을 연구하였으며 천의 일부분에 멱과 채색을 가하여 화면에 조형성을 유지하는 작업을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퀼트나 조각보가 조형적 아름다움과 함께 기능성이 강조되는 점도 노신경의 작품이 이러한 형식의 작품들과 차별성을 갖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노신경이 갖가지 무늬와 색채를 가진 다양한 크기의 천을 직사각형으로 재단한 드로잉을 통해 화면을 구성하는 작업은 전통 조각보와 흡사할 뿐 아니라 서양미술에서의 몬드리안의 추상회화와도 형식상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위 차가운 추상으로 분류되는 몬드리안의 작품에 비하여 노신경은 논리적이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의 제작과정에서 작가가 처음에는 손바느질을 하였지만 점차 그 작업은 재봉틀을 이용하는 바느질로 옮겨가고 화면에는 더 많은 실의 흔적들이 드러나게 된다. 재봉질을 통한 이미지의 창출이라는 과정은 여러 종류의 천과 반복된 색실의 드로잉과 같은 바느질 작업은 촉각과 시각적 형식이 동시에 드러나는 색다른 경험을 전달한다. 재봉틀로 작업할 때 바늘이 반복적으로 들어가고 나오면서 형성되는 실의 흔적인 점선들의 연결은 작가의 손놀림이 연상되는 펜이나 연필 드로잉과 같은 느낌을 주면서 즉흥적인 운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노신경의 작업은 소통을 지향하는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작업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이제까지 꾸준하게 작업해 온 바느질 회화의 연장선에서 화면을 입체화시키고 일부분에 솜과 같이 부피감을 갖는 재료를 삽입하여 부드러움을 추가시키고 그것을 바느질과 결합시킴으로써 하나의 입체적인 오브제 형식으로 화면을 진화시킨다. 이렇게 진화된 화면에는 바느질과 함께 여전히 먹과 채색이 가해지고 자신이 사용하는 재봉틀의 형상이 실루엣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렇게 바느질로 화면을 구성한 노신경의 최근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관람자들은 마치 작가를 마주 대하고 그녀로부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화면의 일부분이 부풀어 오르고 그 주변에 다시 다채로운 천 조각들과 색실로 재봉틀의 바느질이 가해져 보다 다채롭게 구성된 화면 속에서 노신경의 실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관람객들은 전통적인 동양화의 단순한 그리기를 벗어나 보다 다양하면서도 보편적인 조형언어를 구사하려는 작가의 바람과 마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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