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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과 카오스에서의 출구로 통하는 상상력과 아름다움

하계훈

이현배의 작품은 환상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적 작품에 관람객들이 공감하는 이유는 우리가 일상의 현실에서는 정확하게 경험한 적이 없지만 한번쯤 꿈속이나 우리의 상상 속에서 본 듯한 이미지들이 이현배의 화면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현배의 작품에는 마치 높은 하늘의 짙은 구름이나 화산 폭발이 뿜어내는 연기, 혹은 아메바나 연체동물 같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자기 증식하는 것처럼 운동성을 보여주는 신비스런 모습으로 드러나며, 그것들이 우리의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상상력을 자극해준다.

이현배가 이러한 작품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 창밖으로 바라본 구름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채택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공감하겠지만 높은 하늘에서 비행기 창밖으로 펼쳐지는 구름밭은 바라보는 이들을 몽환적 상태로 인도하며 서서히 추억과 명상, 상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작한 자신의 작품에 하늘풍경(skyscape)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따라서 이현배의 작품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작가와 관람자와의 경험이나 상상을 매개로 한 감각적 공유와 경험 및 정서적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현배가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은 서양미술사에서 20세기 초에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자동기술법과 유사하다. 작가는 주로 청색 계열의 묽은 안료를 캔버스에 쏟아 부은 다음에 이 물감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흔적을 작품의 배경으로 채택한다. 이 과정에서 물감의 움직임에 대한 작가의 수작업이 조금 개입되고 물감의 건조를 위하여 드라이어 등의 도구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화면 위의 이미지의 생성은 그야말로 자율적이고 자생적인(autonomous)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현배의 화면에서 드러나는 자동기술법적 이미지들도 의식과 논리의 개입이 최소화되고 우연성과 무의식의 선택이 우선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작가는 “ ...흘리고 뿌려서 스스로 고이고 흘러내린 자국들을 따라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따라간다. 나는 캔버스에 정신과 육체를 주어 스스로 무언가 자율적인 존재가 되게 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자동기술법적 제작 방법의 배경에는 현실도피적인 태도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현배의 작품에서는 환상적이면서도 카오스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의 초기 작품 가운데 한 점에서는 재현적인 인체를 묘사한 다음 인체의 머리 부분을 카오스적인 형상으로 표현함으로써 당시에 작가를 둘러싼 복잡한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해본 적도 있다. 작품의 배경을 지배하는 푸른색의 공간은 무한한 우주공간이나 깊은 바닷물 속을 떠올리게 해준다는 점도 다른 세상을 꿈꾸려는 작가의 의식을 짐작해보게 만들어준다.

도피적인 의식과 태도는 쉽게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태도와 연결될 수 있다. 실제로 다다(Dada) 운동을 하던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 대한 부정은 무정부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의식을 키우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현배는 자신의 자동기술법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을 통해 이러한 부정적인 의식을 키워가기 보다는 그 지점으로부터 그리기를 즐기는 작가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여 환상적인 조형적 아름다움과 스스로 형성되는 어떤 존재의 자율성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이현배의 작품이 주는 매력은 이처럼 환상적이고 자율적인 과정을 통해서 출발하여 작가의 조형적 의지와 노력이 꼼꼼하게 반영되면서 역동적이고 생명감을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 화면에 가득 담김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공감적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일 것이다. 신비롭고 역동적이면서도 혼돈과 카오스를 연상시키는 이현배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환상적 아름다움과 상상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화가의 기본 덕목은 성실한 그리기이며 그리기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그리기 과정에서 작가가 조우하는 모든 상황과 사물을 작품으로 통합시키는 능력,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서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진정성이 관람객들에게 잘 전달될 때 작가는 예술가로서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현배의 작품은 이러한 요소들이 다소 주관적이긴 하지만 비교적 잘 배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앞으로 이현배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제반 요소들과 작가의 진정성이 지속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이 어떠한 형식으로 발전, 전개될 것인가에 따라 이현배와 우리들 사이의 감각과 경험 및 의식의 진정한 교감과 교류의 심도와 향방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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