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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숙 /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희망을 사유하는 시공간의 순례

하계훈

나진숙은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나서 한동안 작품에서 손을 놓았었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이 기간 동안 결혼과 육아에 초점을 맞추며 생활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녀가 다시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서 창작의욕이 되살아나며 자유를 호흡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작은 정사각형의 나무를 다듬어 체스판 모양으로 사방으로 연결해나가면서 작가는 그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다. 작은 나무판 위에 저부조 형태로 볼록하게 드러나는 이미지들은 부드러운 나무의 촉감을 바탕으로 작가의 의식과 경험을 기록한 다양한 형상들과 앞으로 나진숙이 작가로서, 또 생활인으로서 삶을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이상과 희망의 상징들이었다.

나진숙은 미국에서 조소와 함께 영상을 전공하면서 작품의 입체성과 평면성 속의 유동적 이미지를 탐구해왔으며 결과적으로 평면과 입체를 아우르는 폭넓은 작업이 가능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가의 전통적인 조소 작업이 개인적 경험과 기억의 축적이나 감정의 기록 등의 작업이 과거에 머물면서 화석화되는 한계를 극복하고 현재를 반영하면서 미래를 향해 작업 방향을 설정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귀국 후 국립현대미술관의 창동 스튜디오 프로그램과 네덜란드 아른헴에 있는 Stichting Atelierbeheer SLAK의 단기 스튜디오 프로그램, 경기도 영은미술관의 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나진숙의 작품은 재료의 변화를 보여준다. 크기의 차이는 있으나 작은 사각형의 화면이 연결되어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화면의 구조는 변함없는데, 이제 나진숙이 선택하는 재료는 나무에서 한지나 고무판, 그리고 파라핀 등 현지화된 재료로 전환된다.

이미지가 새겨진 판에 한지죽으로 페이퍼 캐스팅을 하고 엠보싱된 것처럼 드러난 한지 부조의 표면에 영상과 음향을 겹쳐 올려 기억과 사유의 경험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거나, 귀국 후 수년간 천착해 온 빗방울의 흔적을 고무판에 담아 비오는 날의 오후를 기록하는 등 감수성 짙은 작업을 거쳐 최근 나진숙의 작업은 청색과 핑크색 바탕의 판넬 위에 파라핀으로 가느다란 선을 한 올 한 올을 겹쳐 올리며 형성하는 원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거나 산호의 형상을 떠올리는 입체적 형태를 캐스팅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재료로 작가는 자신의 추억과 감정의 퇴적층을 쌓아간다. 이렇게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시작된 나진숙의 작품은 점점 더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발전시키며 미래를 향한 보다 확대된 삶의 자세와 창작의 화두로 진화한다.

나진숙의 작품은 관찰과 사유의 과정을 거쳐 태어난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품은 구상성과 추상성이 동시에 드러나며 형식상으로의 해석과 내용상으로의 해석이 이중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나진숙이 지금까지 작품 속에 투영해 온 주제의 연장선에서 인간의 생명의 근원적인 형상으로서 원형이나 자연에서 발견되는 식물이나 산호의 형상을 통해 안식과 평화를 찾는 구도의 과정을 보여준다. 청색 바탕 화면 위로 커다랗게 확대된 꽃의 형상은 잎의 수맥 조직과 같은 결들이 하나하나가 드러날 정도로 세밀하게 표현되며 그렇게 집적된 잎의 모양은 조명효과와 어울려 전체적으로 유기적 형상의 신비스런 느낌을 자아낸다. 조명 효과에 의해 반짝거리는 결 하나하나는 전체적으로는 곡선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형상의 웨이브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세부적으로는 마치 넓은 바다의 물결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듯한 환상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19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청색을 천상의 색이라고 했다. 나진숙의 작품에서 바탕을 이루는 청색의 판넬은 마치 반 고흐가 말한 천상과 같은 신비스런 공간을 연상시켜주며, 그 위에 작가의 생각과 경험을 아라크네의 실처럼 한올 한올 쌓아 올려가는 작업은 시간과 노력이 집약되는 고된 작업일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지난 시간의 추억과 흔적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시공간의 순례 같은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작품에서 작가는 작가로서, 또 생활인으로서의 개인의 삶에 대한 회고와 반추, 현실의 문제에 대한 궁리와 분석, 미래의 방향에 대한 모색과 시도 등의 다양한 사유를 담고 있을 것이다.

산호의 형상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오브제의 경우에는 둥글면서 곡선으로 이루어진 초가지붕 모양의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사유의 정서를 유발한다. 이러한 입체 작품 역시 시간의 축적에 따르는 작가의 사유와 상상력을 수반한다. 작가는 이러한 형상으로부터 안식의 공간을 떠올린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로서의 자기정화와 안식을 희망하며 평면과 입체 뿐 아니라 영상을 이용하여 표현 형식의 완성을 향해 창작의욕을 발휘하는 나진숙의 작품들이 우리들과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보편적 정서에 기반을 둔 경험과 사유를 시각화 하는데 있어서 진솔하고 꾸준한 작가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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