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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을 / 사유와 명상을 불러일으키는 은유적 형상의 극사실성

하계훈

이목을의 작품은 사실적이다. 그의 작품에는 표면의 질감이나 오브제에 내려앉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통해 실제 사물을 그 자체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 어떤 이는 그의 작품이 사진을 찍어 인화한 것처럼, 보는 사람에게 감쪽같이 눈속임을 할 정도로 사실적이라는 의미에서 극사실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사실적이라는 것은 보는 이의 시점과 작품이 평행한 조건 안에서만 성립된다. 그의 작품 한 귀퉁이에서 시점을 화면 가까이로 낮추어 비스듬히 바라보면 이목을의 작품 이미지들은 심한 왜곡과 함께 사실성을 상실하며 우리 눈이 작가의 손놀림에 속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말하자면 우리는 작가가 제시하는 허구의 이미지를 진실로 믿게 만드는 그럴듯한 눈속임(trompe loeil)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림 속의 이미지들이 마치 실물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인 것을 찬양하던 시대에는 이러한 화가의 손기술이 놀라움과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솔거라는 신라의 화가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에는 이 나무를 실제 나무로 착각하고 새들이 내려앉으려다가 부딪혀 떨어졌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실물처럼 그리는 일은 자칫 의미 없는 재주부리기에 그칠 위험이 있다. 사진영상을 넘어 입체영상에 익숙한 오늘날 극사실주의 혹은 사진 사실주의(Photorealism)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우리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기 위해서는 정밀한 사실적 묘사 뿐 아니라 그 화면 안에 담긴 내러티브와 감정의 전달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비사실적 회화가 갖는 주제 해석의 깊이를 사실적 회화가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보다 높은 차원의 형식적 완성도와 주제의 깊이를 추구하는 진정한 사실주의 회화의 임무는 좀 더 충실한 서사성과 감흥의 전달에 있을 것이다.

미술사 속에는 사실적 표현에 뛰어났던 작품들이 많다. 그 가운데 런던 내셔날갤러리에 소장된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작품에는 두 명의 인물 사이로 화면 하단부에 사선으로 빗그어지듯이 그려진, 알아보기 힘들게 왜곡된 형상이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그 형상은 화면 오른편으로 바짝 다가가 옆으로 비껴 바라보면 인골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주영 프랑스 대사 장 드 당트빌은 해골을 통해 인생의 허무와 유한함을 말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인물들이 실물 크기로 묘사되어 있어서 실물같은 사실성을 더해주지만 화면을 가로지르는 이 인골의 왜곡된 형태에 의해 작품의 사실성은 일순간에 차단되어버린다.

이목을과 홀바인은 모두 사실적인 묘사에 능하며 유화물감을 이용하여 사물의 미세한 표현까지 놓치지 않는 기술적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특히 홀바인의 경우에는 왕실의 초상화나 역사화를 표현함에 있어서 오늘날의 사진가의 역할까지 담당해야 하므로 사실적인 묘사능력은 당시의 화가들에게 중요하고 필수적인 능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목을의 경우에는 인물의 사실적 묘사에 대한 부담은 없다. 실제로 그의 작품 속에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목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주로 과일이나 생선, 그 밖의 일상의 사물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목을의 사실적인 작품은 팝아트 작품과 일맥상통하게 우리 생활 주변을 탐색한다는 공통점을 갖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까지 정물화와 풍경화는 역사화나 인물화 등의 장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아왔다. 18세기 이전에 종교적 상징이나 우의적 의미를 담은 작품으로서 정물화가 표현되기는 하였지만 정물화가 다른 장르의 작품에 비하여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술적인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 서사성이나 풍부한 감정과 이야기의 맥락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목을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단순히 사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그 물건 자체가 갖는 인간의 정서와 행동을 은유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과나 대추 하나하나를 사람의 존재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목을의 작품이 기법상 극사실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느낌을 배제시키는 것은 최근 작품에서 작가가 화면의 구성에 기하학적 배열을 즐기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상징주의 또는 개념주의적 해석을 자극하는 화면을 구성하는데 있다.

처음에 이목을은 자신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바탕으로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캔버스 대신에 폐기처분 되다시피 한 널빤지나 도마, 책상, 밥상, 나무소반 등 우리 생활의 주변에서 발견되는 물건들을 선택하여 그 위에 직접 자신이 선택한 이미지들을 그려 넣었다. 이러한 표현은 실제 사물에 가상의 이미지들이 결합함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사실성에 관한 새로운 감각을 자극하여 준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작가는 이러한 물건을 벗어나 스스로 화판을 마련하여 화면을 재단하고 그 위에 사실적 이미지들을 배치한다. 작가는 이러한 일련의 작품에 공(空)이라는 제목을 부여하기도 하고 화면을 십자가나 만(卍)자 모양으로 구획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단순히 사실적 형상을 전달하는 재현적 작품이 아니라 좀 더 정신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사유와 명상을 유발시키는 작품으로 인식되기를 희망한다.

자크 라캉은 인간과 인식체계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인간이 사물의 외형적인 모습보다 그 배후에 내재된 생각(idea)에 더 끌린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완성도 높은 묘사력과 명상적 도상으로 지난 10여년 동안 일관된 작업을 펼쳐왔던 이목을이 그간의 작업을 총정리하고 새로운 작업의 전환기를 삼으려는 이번 전시는 이런 의미에서라도 화가에게는 중요한 모멘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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