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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 / 생명의 순환과 자기 정화의 체험에 대한 소통

하계훈

이진희는 연꽃을 화면 가득히 그려 넣고 , , 등의 선(禪)적인 제목을 붙이고 있다. 작가가 꽃을 소재로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몇 해 전에 우연히 발견한 이름 모를 들꽃이 보여주는 생명력과 생동감에서 감명을 받은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연꽃이 주요 소재로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이것도 작가가 꽃을 비롯한 자연의 사물에서 생명력과 자기정화의 사유를 유발시키는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며, 연꽃과 관련된 종교적 연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연꽃이 갖는 일반적인 꽃의 속성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가 전통적인 먹과 종이를 사용하지 않고 그 밖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경우는 요즈음 우리 미술계에서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진희의 경우에도 먹그림의 스밈이나 번짐 등의 기법을 부분적으로 응용하고 있지만 주로 오일 스틱이나 파스텔 같은 서양화의 재료를 이용하고 있는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붓을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과 손바닥을 이용하여 이러한 재료들을 보다 감각적으로 느껴가면서 화면에 적용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법은 과거의 중국과 한국의 회화에서 사용하던 지두화법(指頭畵法)이라는 기법을 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양미술에서의 로버트 라우센버그나 잭슨폴록이 전통적 재료와 새로운 재료의 융화와 회화적 표현의 확장을 시도한 것과도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진희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미묘한 감각적 표현은 작가가 작품의 결과를 미리 의도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재료의 적용과 그 재료들의 상호작용이 만들어 내는 조형적 효과를 마치 물이 흘러가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는 대로 작가가 그것을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진희가 작업에 임하는 화두 가운데 하나는 생명력과 활기 같은 에너지를 분출하는 듯한 테마지만 정작 그녀의 작품은 그리 격정적이거나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좀 더 정적이고 차분하며 부드럽고 조화로운 색채 감각과 구도 속에서 이러한 테마를 소화해내고 있다.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이진희가 한 잡지와 인터뷰 한 기사를 보면 작가는 자신이 한국화를 전공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있고 아름다움에 대한 시적 명상과 그것의 구현을 위한 작품 제작에 있어서 순수함과 우아함 등을 추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구상을 위하여 작가는 산책과 명상을 즐겨하면서 창작의 단초를 이끌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진희가 그리는 꽃은 묘사적이거나 설명적이지 않다. 그것은 화면 안에서 커다랗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물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의 색면으로서 전체 화면과의 관계 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구성요소로서의 형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작가는 대상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집착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상을 비약적으로 과장하거나 추상화하여 표현하지도 않는다. 작가 스스로가 언급한 것처럼 이진희의 작품은 구상과 추상의 영역을 넘나들며 화면에서 작가의 본능적 조형감각에 의해 즉흥적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작품에 착수하기 전에 예비적인 드로잉이나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이렇게 미리 계산되지 않고 마치 자동기술법처럼 작품의 진화 과정에서 스스로 표현력과 생명력을 품어 나아가는 작품 제작의 프로세스가 오히려 작가의 내면의 정서와 무드를 잘 이끌어낼 수 있으며 작가와 대상과의 조응, 작가와 관람객과의 소통을 더욱 순조롭게 만들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진희가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서 일관되게 무작위적인 화면의 자발적 전개에만 의존하여 작업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번 출품작 가운데 , 그리고 와 같은 작품들은 작품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도 그런 것처럼 작가가 원근법을 의식 하면서 화면을 구획하고 좀 더 사실적인 풍경의 묘사에 가까운 표현을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의 경우에는 연잎을 연상시키는 단순한 원형의 코발트색 색면들이 실제로 깊이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춤추듯이 넘실거리는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상징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이진희의 작품은 일견 아주 단순하고 쉽게 보인다. 문제는 우리가 이진희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작가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떤 화면을 구성하는가를 파악하는 것보다는 작가의 창작의 모티브를 선택하는 정황과 그렇게 선택된 모티브에 대하여 작가의 감성이 조응하는 과정, 그 배후에 작용하는 의식과 철학, 그러한 주제를 이끌어 내는 태도와 이미지의 전개과정, 그리고 그 결과로서 드러나는 작품에서 관람객이 포착하는 작가의 심상과 또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를 하나하나 읽어 나아가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진희는 2008년 귀국 후 몇 차례의 그룹전에 참가하였으나 아직까지 개인전을 갖지는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후 미국에서 다시 서양적인 표현을 공부한 이진희가 사실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자신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동서양의 대표적인 표현 매체의 융합과 함께 자신이 스스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의 순환과 자기 정화의 체험을 관람객과의 소통에서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을지 우리 모두 지켜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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