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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조 / 공간을 부유하는 3차원적 추상의 세계

하계훈

공간을 부유하는 3차원적 추상의 세계


회화에 있어서 오랜 역사를 관통하며 작가들을 사로잡아 온 두 가지 화두는 내용면에서의 문학성과 형식면에서의 조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용면에서 역사화와 신화화에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내러티브가 담겨져 왔으며 현대 추상화에는 인간의 정서와 이념이 담겨져 왔다. 형식면에서는 아카데미 미술에서 그 가치를 강조하던 재현적인 회화의 시대가 지나면서 작가들은 추상 형식의 작품을 통해 화면 자체의 자율성과 조형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데에 자신들의 역량을 집중하였다. 나정조의 작품은 부분적으로 형상성을 감지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추상적인 표현을 담는다.

작가는 추상적 형식을 통해 화면의 활력과 깊이를 추구하며 작품의 표상을 넘어서 비가시적 본질을 품고 있는 내면에 자신의 생각과 정념, 추억과 희망을 주입한다. 나정조는 부드러우면서도 풍부한 화면의 색감과 함께 화면의 표면 근처에서 발생하는 공간의 깊이와 활력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다. 작가는 화면의 공간감과 깊이감을 더욱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캔버스 위에 실크를 덧씌우고 그 위에 규칙성과 리듬을 유도하는 형상을 추가하여 캔버스 위의 이미지들과 겹쳐지게 만듦으로써 입체감을 강조하게 된다. 나정조의 화면은 캔버스의 화면과 그 위에 약간의 공간을 유지하면서 캔버스에 덧씌우는 형식으로 첨부되는 실크 화면으로 구성된다.

캔버스와 실크라는 두 화면에 표현된 이미지들은 보는 이의 망막에서 하나로 통합되면서 입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내는데, 관람객이 바라보는 이미지는 두 화면 사이의 거리에 의해, 그리고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달리 포착되고 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이렇게 평면위에 또 다른 평면이 겹쳐지고 그 사이의 공간에 의해 이미지의 중첩과 공간의 시각적 효과를 만든다는 의미로 작가는 전시의 주제를 ‘듀얼 스펙트럼(Dual Spectrum)’으로 제시한다.

“캔버스에 채색작업을 한 다음 그 위에 씌운 견(絹)에 또 다른 작업을 해서 빛을 만들어낸다. 빛을 통해 나타나는 허상의 경계를 표현했다. (내 작품은) 캔버스 상 같은 프레임의 안에서 오는 공간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말처럼 나정조의 작품은 화상형성법이라는 방법을 통해 화면에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그것은 감광성분과 발색성분을 함께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시 작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빛은 감광의 기본으로, 그리고 채색은 발색의 기본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캔버스 위의 실재와 빛을 통해 나온 허상의 경계를, 혹은 캔버스 위에 같은 프레임의 다른 공간이 존재하는 실크 작품을 적용함으로써 같은 프레임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상이한 공간감을 보여주는 것이 나정조의 작품의 특징인 것이다.

이처럼 나정조의 작품은 형식상 두 개의 화면이 서로 다른 층위를 형성하며 실크가 갖는 화면의 반투과성에 의해 묘한 입체감과 깊이감을 자아낸다. 그러한 두 개의 화면에 각각 표현되는 색과 형태의 이미지들이 하나로 겹쳐짐으로써 화면은 완성되는데, 주로 베이스를 형성하는 캔버스 화면에는 추상표현주의적 채색이 화면을 거의 빈틈없이 가득 메우고 그 위에 겹쳐지는 실크 위에는 빈 화면에 캔버스 위의 색과 동일한 계열의 색상으로 그려진 원이나 직선, 또는 어떠한 생명체의 움직임의 흔적을 기록한 기호처럼 화면을 돌아다니는 곡선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나정조의 작품이 추상적인 성격을 갖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작품의 명제는 아주 구체적이다. , 등 우리에게 친근한 자연의 현상과 사물이 작품 제목으로 도입됨으로써 나정조가 작품 속에 담으려는 본질은 결국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자연 현상 같은 현실의 표정인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작품의 재료와 작가의 노력의 산술적 총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밀도와 무게감을 갖는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방법으로서 작가는 은유적인 추상형식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나정조의 작품은 미국 추상표현주의 미술에서 볼 수 있는 행위(action)가 감지되면서도 화면 전체적으로 볼 때 동일계열의 색상들이 농담(濃淡)의 변화를 통해 깊이감과 공간감을 형성함으로써 마치 3차원적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품의 제목을 통해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의 이미지가 구체적인 대상을 표현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정조의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마치 구름과 바람, 그리고 작은 별똥들이 총총히 채워진 우주공간을 부유하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나정조의 작품에 대한 또 하나의 가능한 해석은 작가가 언급한대로 캔버스 표면에 표현된 이미지를 과거의 이미지로 설정하고 그 위에 가해진 실크 위의 이미지를 현재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현재를 통과해서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떤 대상에 대한 추억, 회상, 그리움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우주와 같은 무한한 공간을 관통하며 상이한 시간대를 이동함으로써 우리 삶의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며 작가는 그 여행의 무대로서 무한한 상상과 초월성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정신적 영역을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셈인 것이다. 나정조의 작품이 이처럼 이중적인 이미지의 중첩과 공간의 변화에 관련되는 만큼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평면에서 입체적인 것으로, 또 정지된 이미지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로 확대시키는 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비록 이번 전시를 통해 소개되는 작품은 평면 회화에 그치고 있지만 작가는 미디어 아트를 통해 움직이는 작품, 관객과 개입에 의해 반응하는 인터랙티브한(interactive) 작품을 함께 구상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통해 나정조의 미디어 작품을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관람의 포인트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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