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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산수심원기전 / 소환되고 완성되는 산수심원기

김성호


소환되고 완성되는 산수심원기 

-3부 전시에 부쳐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I. 다시 다산 - 소환되는 산수심원기
주지하듯이, 서호미술관의 특별기획전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동명의 글 한 편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그러니까 다산이 한강 일대를 두루 답사한 후 남긴 한 편의 「산수심원기」가 이번 전시의 참조점이 된 셈이다. 여기서 ‘산수’는 ‘산곡(山谷)의 물’로부터 온 북한강을 지칭한다. 글자대로라면 ‘산수심원기’는 다산의 고향인 ‘소내 앞으로 모여드는 북한강의 물길에 대한 근원적 고찰’인 셈이다. 
이 전시는 왜 다산의 산수를 다시 소환해서 산수심원기를 검토하려는가? 다산이 1918년 강진유배에서 풀려나 지금은 남양주시인 고향 마현(馬峴)으로 돌아온 뒤에 춘천 일대를 1820년, 1823년 두 차례를 여행하면서 한강을 탐사하면서 기록했듯이, 북한강에 위치한 서호미술관 또한 2001년 개관한 이래 어느덧 17주년을 맞이한 한강에서의 여정을 차분히 정리하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사회적 맥락이라는 공간을 검토하면서 산수심원기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다. 
이 기획전에서, 야외 설치를 포함한 복합 장르로 펼쳐지는 마지막 3부 전시에 대한 비평적 접근으로는, 1부(판화와 드로잉), 2부(조각과 입체)의 장르적 개념을 잇고 확장하는 가운데 ‘융합, 생성, 순환’이라는 자연의 본원적 미학을 다시 되새기는 방식으로 전시를 분석하고 출품작을 해설하고자 한다.   



II. 되새김 - 융합, 생성, 순환의 자연 미학

조명식 / 그의 작업은 회화로부터 출발하되 회화의 결과물에 이르게 하는 창작 행위의 모든 경험들과 공유한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회화의 결과물 이전의 모든 과정들을 창작으로 용인하는 융합의 되새김인 셈이다. 그것은 숲(林, 森)이라는 자연의 실존적 미학과 얼추 닮아 있다. ‘나’로서가 아닌 ‘우리’라는 복수로서의 숲의 존재는 나의 주체됨을 인정하는 동시에 내 옆 타자의 주체됨을 함께 인식한다. 그것도 마치 사회적 인간처럼 집단의 공동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조명식의 작업에는 그가 작업노트에서 말하듯 다름의 존재들이 하나의 집단 주체의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어떠한 격(格)을 입은 담지체(擔持體)로서 회화적 시간들(작업 과정의 의도를 반영한 모든 몸짓의 결과들)로부터 다름과 정체성이 형성된다. 물성을 다루는 태도에 기인한 시간성의 겹과 상존(常存), 그리고 지속은 의식의 흐름과의 연속성으로, 작업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거와 현재를 경험과 물리적 조율을 통하여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표현주의적 추상의 조형 언어로 자연의 결이 한껏 표현되어 있는 회화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가능케 했던 회화 생산 주체인 작가의 작업복 상하 한 벌이 부드러운 조각이 되어 벽에 걸려 있다. 캐스팅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누군가의 다리 조각은 또 어떠한가? 그것은 화가의 신체에 대한 한 은유처럼 보인다. 그것들 모두는 〈FIELD〉라는 제목 아래 융합의 자연 미학을 수렴하는 하나의 조화로운 실존이다.


조명식, The FIELD, installation view, 2017


김정헌 / 그의 작업은 회화로 출발하고 다른 것들과 뒤섞이면서도 결국은 회화로 도착한다. 정치적 비판의 색깔과 사회적 비판의 메시지가 뻔해 엿보이는 회화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해석적 감상을 위해 그의 창작 의도와 비판적 메시지의 정수(精髓)를 선명하게 뽑아 올리는 일은 쉽지 않다. 언어(verbal) 메시지가 자음과 모음으로 제대로 분절될 틈도 없이 그의 풍부한 비언어(non-verbal) 메시지 덩어리 안에는 한데 뒤엉켜 있는 까닭이다. 
거기다가 김정헌식 위트와 유머가 한몫 거들고 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과 같은 야릇한 제목처럼, 그의 작품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촌철살인의 해학은 기실 그의 세대에서 선보이는 유형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현실 속 젊은 세대의 유머와도 맞닿아 있지 않은 이상야릇하고 기기묘묘한 것들이다. 이러한 결과들은 그가 유머의 방식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생(生)과 사(死), 생성과 소멸 사이를 매개하고 이어주는 샤먼 식의 원격 현전(tele-presence)을 감행하고 있기 때문에 발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작업 안에서 직접 무당이 되는 그의 회화는 현실의 지평에서 정치적, 사회적 사건으로부터 비화된 타자들의 죽음을 껴안고 ‘고풀이’를 한다. 시신을 결박했던 매듭인 ‘고’를 풀고 자연과 우주의 섭리 안에 타자의 주검들을 되돌려주려 한다. 영혼을 위무하는 굿은 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살아남아서 앞으로의 삶을 이어갈 우리를 위한 굿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달빛이 우리를 구하다’라는 그의 작품 제명처럼 초자연적 현상과 우주의 원리에 우리를 의탁하고 온몸과 맘을 다해 구원을 갈망하는 일만이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정헌_이승과 저승-시원소주 


임은희 / 그녀의 작업은 평면이다. 학부 졸업 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회화를 전공한 만큼, 그녀의 작업에서 회화는 주요한 장르로 등장해 왔다. 아쉽게도 작가가 40대 중후반, 심하게 앓고 난 후, 어렵게 의식을 회복해 작업을 시작할 즈음에는 머리 통증으로 인해 쉽사리 회화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퀼트의 세계를 알게 되어 빠져들기에 이르렀고 퀼트는 지금까지 자신의 작업에 있어 주요한 조형 언어가 되기에 이르렀다. 
임은희는 이번 전시를 위해서 아크릴 물감의 바탕 위에 얇은 퀼트천을 콜라주의 방식으로 화면에 부착해서 표현한 풍경화를 선보인다. 그것은 물감의 거칠거나 자잘한 질료감 그리고 느슨하거나 빽빽한 칠하기의 흔적과 시간의 과정들을 선보이는 전통적 회화와 궤를 달리 하지만, 2차원 평면 속 콜라주의 방식으로 재현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확실한 풍경화이다. ‘사계(四季)’라는 작품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하는 4개의 작품들은 하나의 시리즈로 묶인다. 이것들은 봄-여름-가을-겨울에 이르는 자연 지속의 과정들을 생성소멸과 순환이라는 논리 속에서 반복적으로 되새김한다. 보라! 그것들은 난색과 한색이 보색으로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자연의 순환, 생성의 과정들이다. 물론 그것들은 자연 속에서 같은 것 하나 없는 ‘차이들의 반복’일 따름이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에 있는, 당시 수몰 위기에 놓였던 수령 700년이 된 한 은행나무를 찍은 사진들은 일상의 소소한 차이들을 선보이는 스냅 사진처럼 우리에게 펼쳐진다. 그것이 구사일생 구출기(救出記)에 해당하는 엄청난 이야기들을 숨겨놓고 있지만, 자연 안에는 그러한 극적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음을 우리는 안다. 


임은희, 사계,  33 x 24cm x 2ea, 27 x 22 x 2ea, 캔버스에 아크릴, 퀼트천,  2010


전원길 / 그의 작업은 회화로부터 시작하지만, 때로는 조각, 때로는 설치의 이름으로 변주한다. 이러한 장르의 변주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인간과 상호 소통하는 상생의 자연 미학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의 작업을 자연미학의 변주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그런데 그가 가까이 하는 자연미학이란 기실 식물성의 것이다. 때로는 연약하고 때로는 보살핌이 필요할 듯 보이나 억척스럽게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식물들은 그의 작업에 있어서 주인공들이다. 그는 이러한 식물성의 자연을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살펴보면서 그들을 팔 벌려 한 품에 껴안아 보듬는다. 낙엽, 호박잎, 풀잎 등 식물성의 자연을 캔버스의 표면 위에 직접 올려 물감과 함께 섞어 캔버스의 숨겨진 피부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캔버스의 표면 밖으로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씨앗이 자신의 몸이 부패되는 인고의 세월을 거친 후, 비로소 땅 밖으로 싹을 틔워 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캔버스 위에 흔적을 남기고 또 흔적을 남기는 무수한 드로잉들이 실제의 하늘과 똑같은 파란색 사이에서 만날 때, 그의 식물성 자연은 비로소 싹을 틔운다.   
야외에서 펼쳐지는 전원길의 드로잉 같은 자연미술은 어떠한가? 대지미술과 달리 자연의 소소한 변화와 움직임에 반응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자연미술은 그의 작업에 있어서 주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실제의 식물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들의 생성, 소멸의 변화를 느린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운데 작업이 되는 것임을 그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의 작품 〈백초를 기다리며〉는 “철재로 만든 테이블 모양의 틀에 작업실 주변에서 모은 흙을 담고 콘크리트로 덮은 다음 콘크리트가 마르기 전에 구멍을 뚫어 손가락 모양의 패턴을 만든” 후부터 시작되는 기다리는 과정 자체가 작업이 된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그 100개의 구멍 사이로 분명히 있을, 흙 속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설치된 테이블을 ‘생태적 회화’로 변형시키면서 성장하게 될, 알 수 없는 풀들을 기다리는 작업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인생과 같은 응축된 기다림의 시간들을 필요로 한다. 


전원길, 백초를 기다리며, 201x84x70(h) 2015


김용민 / 그의 작업은 바깥으로 상정되는 야외의 자연 자체가 캔버스이다. 땅에 흔적을 남겨 회화라 칭하고 땅에 골을 남기고 무엇인가를 쌓아올려 조각이라 칭하기를 여러 차례, 그는 자연 속에서 미술하기를 통해 자연의 환경 속 자연미술과 인공의 환경 속 공공미술의 차이와 그 경계를 고민해 왔다. 그가 화이트큐브와 같은 공간으로 잠입할 때 가지고 오는 자연의 환경 속 테마들이 그렇게 그의 관심들을 확장해 나갔다고 할 것이다. 나무의 모서리와 일부분을 집중적으로 깎아내어 목심(木心)의 속살과 나이테를 고스란히 드러낸 작가의 자연 속 침투는 작가의 평소의 관심과 애정을 거꾸로 드러낸 사건처럼 보인다. 작은 나무라는 자연에 가한 그의 폭력과 같은 카빙(carving)의 언어가 낯설어 보이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역전의 조형 방식과 태도로 기인한 것임을 우리는 안다. 즉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폭압과 만행을 자연미술의 조형 언어를 넘어서는 도발적인 조형 언어를 통해서 비판적으로 고발한 것이라 하겠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큰 새〉는 커다란 깃털 하나를 몸통으로 삼고 외다리로 위태롭게 자신의 무게 중심을 잡고 고목 둥치 위에 앉아 있는 ‘새 아닌 새’이다. 실제로 자라섬 느티나무 숲에 서식했던 큰 독수리를 작가가 직접 만났던 경험과 함께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지금까지의 경험이 혼재되어 나타난 이 작품은 문명화된 자연, 오염된 자연이라는 생태적 문제의식을 미술의 언어를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기한다.  

김용민, 네모 목(木), 45X45X120㎝, 35X35X35㎝, 나무, 혼합재료, 2015



정혜령 / 그녀의 작업 역시 자연 환경과 인공 환경의 접경을 오간다. 그녀의 작업에는 죽음의 끝에서 피어 올리는 ‘생명 의지’가 엿보인다. 그녀는 사람들이 쓰다 버린 많은 사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숯과 재를 만들어 냄으로써 일종의 번제(燔祭)와 같은 의식을 행한다. 이러한 주술적 행위는 태워지는 것들(사물)이 기인했던 원래의 자연이 함유하는 본유적 생명의 의미를 일깨운다. 사물에 각인된 사용자 주체의 흔적을 지우는 태우기의 행위는 결국 나무로 만들어진 사물들의 고유한 기능을 모두 제거하고 나무라는 원 질료의 가장 환원적인 양태 즉, 검디검은 숯을 만들면서 종료된다. 
숯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커멓게 타 죽은 ‘나무의 주검’이다. 숯은 죽음의 끝인가? 그렇지 않다. 숯은 주검의 가슴 안에 오랫동안 불(火)을 품어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는 영계(靈界)의 발화점이다. 그래서 미학적으로는 다분히 죽음과 삶,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샤먼의 그림자가 일렁이지만, 그녀의 작품은 보다 더 현실적인 측면에서 읽히길 원한다. 즉 버려지고 소멸해 버리는 마지막 단계에서 소망하는 생명과 소생에 대한 희망이다. 그녀는 페교에서 수집한 버려진 물건들을 일부 태우고 남긴 나무 책상 밑으로 긴 ‘나무 책상의 그림자’를 그들의 타고 남은 검은 숯가루들로 만들어 준다. 한 켤레의 실내화 뒤로는 누군가 그것을 신었을 옛 주인이 이끌고 간 발길을 따라 검은 숯가루들이 긴 흔적을 그림자처럼 남기고 있다. 그 숯가루들 사이에는 무씨들이 심겨져 있다. 오랜 전시 기간 동안 무씨들은 생존을 위한 싹을 틔우는데 이르고 결국 숯가루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현현(顯現)시킨다. 아! 검디검은 숯가루들 사이에서 파릇하게 자라나는 그것은 죽음과 소멸함, 비루함과 망각, 그리고 소멸과 절망 사이에서 그것들을 뚫고 자라는 희망의 씨앗이자 벅찬 감격의 눈물이다.    


정혜령,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기도, 폐교에서 수집한 버려진 물건과 그것을 태운 재, 무씨
, 오시마, 일본, 2012


조광희 / 그는 자연의 융복합적 미학을 자신의 작업으로 따르고 실천한다. 자연이란 풀이고, 동물이며, 물이고, 바위이며, 햇빛이니 모두 섞여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정체성인 ‘융복합의 자연’을 기대한다. 거기에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강한 자에게 자신을 희생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란 이름의 먹이사슬이라는 무섭고도 엄연한 자연의 질서가 존재한다. 
단순한 선묘가 자연 질서라는 핵심의 내러티브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그의 애니메이션 〈가마우지와 블루길〉은 그러한 질서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매우 위트 있는 해학 속에서 삐딱하게 태어난 것이다, 생각해 보라! 가마우지는 두물머리를 중심으로 북한강과 남한강 일대에서 서식하는 조류로서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기후에 따라 서식처를 이주하는 철새이다. 블루길은 매해 초여름 알에서 깬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치어(稚魚) 시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아 식욕이 좋은 천적인 가마우지의 먹이가 되는 물고기이다. 그렇다. 가마우지에게 어린 치어로서 블루길은 딱 한 입으로 처리가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블루길은 두어 달 지나면서 덩치를 엄청나게 키우면서 모습이 완전히 달라진다. 블루길에게는 유일한 천적인 ‘가마우지’이지만 워낙 커버린 탓에 다 삼키지 못해 다시 입 밖으로 뱉어내고 만다. 블루길을 습관처럼 다시 낚아 삼키지만, 이내 다시 뱉어내는 행동은 거듭된다. 이러한 약육강식의 섬뜩한 이야기들을 익살 가득한 위트로 풀어 만든 그의 애니메이션은 가볍고 흥미롭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사회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자연의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 오늘도 그물을 드리우는 어부들의 이야기들은 어떠할까? 그가 2016년 경기문화재단의 지역예술프로젝트로 진행했던 《어부의 속사정》은 남한강 일대의 어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들의 삶을 위협했던 여러 사건들을 함께 되새김한다. 팔당댐 준공, 대홍수, 4대강 사업 등의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어부들의 이야기를 간추린 수채화, 서예, 컴퓨터 리터칭 등으로 구성된 작품과 자료들은 하나의 거대한 아카이빙이다. 어부와의 실제 인터뷰를 포스터로 만든 그림과 함께 쓰여 있는 “친절한 홍씨, 10년 후 남한강은 어떨까?”라는 텍스트는 강에 물이 가득해서 강이 살아있는 남한강을 기대하면서 매일 강을 오르는 강치의 꿈을 꾸고 있다는 한 어부의 꿈과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전시 계획, 
조광희, 어부의 속사정, 가변크기, 수채화, 서예, 컴퓨터 리터칭, 2016
조광희, 가마우지와 블루길, 애니메이션, 2016




III. 부유의 운동 - 완성되는 산수심원기
“하늘은 큰 터(太虛)로 뜨고 지구는 조그만 덩이(礨空)로 떠서 만물을 싣고 억조창생을 실으니, 이렇게 보면 천하에 뜨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위의 다산의 언술처럼, 그의 사유에는 물 위의 쉼터인 ‘부가범택(浮家泛宅)’이나 책 「부암기(浮菴記)」에 드러나고 있는 핵심어 ‘뜬 세상’이란 의미의 ‘부세(浮世)’가 도처에 가득하다. 필자는 이미 1부의 출품작들을 부세 혹은 '부유(浮游)의 존재와 미학으로 해석한 바 있다. 2부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3부에서는 ‘산곡(山谷)의 물’로서 ‘산수’와 다산의 ‘산수심원기’를 소환하고, 자연에 나타난 운동성의 자연미학 안에서 ‘산수심원기’가 표방하고 있는 ‘부세, 부유의 철학’을 되새김했다. ‘인간-예술-자연’ 안에서 함께 더하고(융합), 자라고(생성), 되풀이(생성)되는 한없이 자유로운 ‘부유의 운동’으로서 말이다. ●
  
출전 / 
김성호, 「소환하고 완성되는 산수심원기」, 카탈로그 서문, 《산수심원기전》 3부, (서호미술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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