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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반│2017제주비엔날레의 거친 예술 실험과 그 후

김성호

 
2017제주비엔날레의 거친 예술 실험과 그 후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서론 속 결론 
《2017제주비엔날레》(이하 제주비엔날레)를 출범시킨 김준기 관장과 비엔날레를 총괄 실행한 김지연 예술감독을 비롯해서 비엔날레를 위해 고생한 사무국에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에 가까운 ‘병 주기’ 자체가 예의가 아님을 안다. 특히 큐레이팅의 초심과 실천에 대한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있는 ‘같은 기획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것은 무척 불편한 일이자. 선뜻 나서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필자는 그러기로 했다. 다만 글의 앞부분에서는 ‘병 주기’라는 이름으로 다른 분들의 비평적 시각을 옹호하고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담아내지만, 뒷부분에서는 ‘병 주고 약 주기’라는 소제목으로 필자의 어느 정도 긍정적인 시각을 최대한 담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이 글의 앞부분에서는 심판자의 ‘병 주기’의 태도가 역력하지만, 뒷부분에서는 동료 기획자의 ‘병 주고 약 주기’의 태도가 엿보일 것이다. 대안적 모색을 하는 결론에는, 어떤 면에서 처방전을 쓰기보다 아예 약 심부름을 하는 필자의 모습이 보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밝히는 결론의 분위기는 이것이다. 제주비엔날레는 지켜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성급하고도 욕심 많은 실패자의 모습이었지만, 제주도의 입장에서는 의미 있는 성공자의 첫 걸음이었다. 이상과 담론은 넘치지만 형식과 내용은 부족했던 이벤트였으나 하도 망쳐놔서 후속 행사에 대한 성공의 가능성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부터의 비평 홍수 속에서 엄청난 긍정의 씨앗을 발아시킨 행사였다. 
따라서 이 글은 처음에는 처절하게 때리고, 나중에는 위로의 술 한 잔을 건넨다. 처음부터 결론을 밝히는 까닭은 글 초반과 후반을 읽으면서 배신감을 느끼는 독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II. 병 주기 
이번 제주비엔날레는 행동미술, 공동체예술, 사회예술과 같은 이름으로 예술의 사회적 실천에 대해서 줄곧 천착해 왔던 한 기획자의 제주미술관장 취임으로 인해서 촉발된 예술 실험이자 욕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시작은, 제주미술관 설립 이후 행정공무원과 지역의 미술인이 관장을 맡아 운영해왔던 그간의 미술관 경영과 행정 방식에 제동을 걸고 비로소 전문가에 의한 전문적인 미술관 정책이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믿은 도민과 제주 예술가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거나 혹은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한국 땅에 미술관이 주관하는 새로운 비엔날레를 창설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쁘게 말해 미술관 운영을 잘 해달라고 관장을 뽑아놨더니 미술관 살림과 운영은 제쳐두고 미술관이 주관하는 또 다른 거대한 사업의 출발에 사람들 혼을 쑥 빼놓는 격이었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시작을 알리는 그의 예술 실험은 일견 무모하고, 거칠고, 막무가내처럼 보인다. “취임 1년 만에 뚝딱 ‘붕어빵’ 제주비엔날레”라는 비판적 내용을 싣고 있는 기사에서 보듯이 김준기 관장이 ‘재임 중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 충분한 논의 없이 밀어붙인 흔적’은 사방에 역력하다.
2016년 하반기에 개최한 '제주비엔날레 추진 제1차 토론회'에서 김 관장이 밝힌 비엔날레   처음에 해양예술에 관한 것이었다. 즉 ‘해양예술비엔날레’로 특성화된 비엔날레 구상으로부터 일반적인 비엔날레로 정리되었고, 주제 역시 해양에 관한 것으로부터 ‘더 소셜(The Social)로 변했고 더 나아가 ’투어리즘(Tourism)'로 변화를 거듭했다. 이러한 주제 도출은 도민과 예술인들과의 나름의 협의와 숙고로 다듬어진 결과일 테지만, 역으로 비엔날레 발의 당시에는 미술인들과 공유하는 비엔날레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숙의 자체가 부재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그 뿐인가? '(주최 측이) 제주비엔날레를 통해 알뜨르비행장이 다크투어리즘의 명소가 됐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사실은 제주비엔날레가 '알뜨르' 덕을 본 것'이라는 혹자의 평가가 오히려 정당해 보인다. 주지하듯이, 광주비엔날레가 이미 미술관이 아닌 장소들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오는 기획을 진행한 바 있지만, 근대의 피식민의 참담한 역사가 각인된 제주비엔날레의 알뜨르비행장과 같은 극적 공간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장소로 치자면 알뜨르비행장은 예술프로젝트로 구현하기에 매우 훌륭한 공간이다. 전체 8만 여 관객 중에서 알뜨르비행장 관객이 3만2037명으로 다른 장소보다 많았다는 점은 이러한 관객의 기대를 반증한다. 특히 현재의 농작지와 함께 어우러진 과거의 격납고는 지금, 여기에서 과거의 역사를 되묻는 다크투어리즘을 훌륭하게 성찰하게 만든다. 
이러한 장소 발견은 비엔날레가 가진 분명한 수확이었음에 틀림이 없지만, 외려 ‘비엔날레가 알뜨르 덕을 본 것’이라는 조롱조의 비판 자체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는 이미 2010년에 한 작가의 개인전 공간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공간 발굴이라고 우기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게다가 코스라는 이름의 총 5개의 전시 장소 중에서 코스3인 알뜨르비행장에서의 전시를 빼면 총체적 난국의 상황이 도처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겠다. 
총체적 난국은 사방에 있다. 과정도 그랬고, 결과도 그랬다. 제주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한 기획자의 눈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들로 인해 비엔날레가 불편하게 다가선다: “휴양차 제주비엔날레에 참여한다는 태평한 이들의 흰소리, 작품을 출품했는데 홍보자료에 이름이 실리지 않은 작가의 불만, 재료비를 책정하라고 해서 순수하게 본인의 인건비를 제외한 금액만 요청하고 꼬박 두 달여를 작품제작에 수고한 작가를 보는 안타까운 시선, 설치된 작품에 정확한 이름표를 못 받은 실망, 굳이 작품을 찾아 먼 길을 떠난 관객들이 불친절한 안내 탓에 겪은 불편, 수개월간 기획해 천천히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거대 행사의 이름으로 흡수해 판만 키우려는 불쾌한 제안을 받은 개인적 경험, 준비 부족으로 운영 중에 발생하는 무수한 사고 등” 현장 주위에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 은유의 표현이겠으나 가히 ‘비엔날레 보이콧’을 선언할 만해 보인다. 


2017제주비엔날레 코스1 제주도립미술관


2017제주비엔날레 코스2 제주현대미술관 저지리 일원


2017제주비엔날레 코스3 알뜨르비행장 일원


III. 병 주고 약 주기 
앞 장에서 다 살펴보지 못한 ‘총체적 난국’과 우리의 ‘병 주기’의 상황은 더 있다. 앞에서 보았던 이나연의 현실에 기반한 비평은 물론이고 손영옥의 비판적 기사와 같은 각종 잡지와 매체에서의 비판적 기사, 비평과 같은 ‘병 주기’는 스스로 약 처방을 하라는 타자의 경고이다. 
첫째, 필자의 비판은 ‘미술관 발(發) 비엔날레에 대한 우려’로부터 시작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비엔날레 전시관으로의 미술관의 실제적 사용 등의 이유로 미술관 스스로가 주관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일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서 미술관 안에 비엔날레 사무국을 운영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있지만, 미디어-시티 서울 1회 행사 이후, 당시 서울시 행사의 지속적 운영 주체에 대한 고민으로 인해 운영권을 넘겨받은 해결책의 결과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최근에는 이러한 국제 미술제의 운영 주체를 사단법인화하거나 재단으로 일원화하는 경우가 많아진 만큼, 당시 문화재단이 없었던 서울시의 상황과 현재의 제주를 동일시하려는 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제주비엔날레의 출발이야 제주도립미술관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한 이후에는, 사업 주체가 도립미술관이 아닌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총체적 예술 프로젝트 계획과 맞물려 진행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관점은 미술관이 미술관 고유의 역할을 충실하게 실행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데 보다 더 효율적이라 하겠다. 즉 전시뿐 아니라 ‘연구, 수집, 보존, 교육’과 같은 미술관 고유의 역할을 방기하지 않고 실천하는데 있어 좀 더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도립미술관이 ‘알뜨르비행장’에서의 다음 비엔날레를 준비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 공공미술 매입을 추진하는 ‘2018알뜨르프로젝트’처럼 ‘미술관 외부 사업에 미술관이 매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술관장의 개인적인 실험적인 추진력에 의해서 미술관의 고유한 기능과 역할이 침해당할 수 있다. 
둘째, 비엔날레는 예술감독이 참여 작가들과 함께 미술의 눈으로 ‘지금, 여기’의 문제의식을 진단하고 대안적 문제 제기를 주도하는 전위의 현장이다. 그런 면에서 투어리즘이라는 주제의식은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참여 작품의 구작 비율이 높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작가의 주제 해석에 대한 적극적 참여가 배제된 채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을 감독의 새로운 해석에 의해서 변형해 가져다 쓰는 꼴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해 출품작에 구작이 대다수인데도 마치 새로운 전시인 것처럼 개인전 횟수를 늘려나가는 꼴과 다르지 않다. 또한 그것은 과장되게 비유해서 말하면, 오래전부터 이리저리 팔려 다녀 중고품이 된 작품들을 경매에 등장시키기 전에 개최하는 프리뷰 전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미 거래된 것들은 다시 1차 시장인 갤러리에 내놓는 일이 없다. 경매와 같은 중고 시장인 2차 시장으로 갈 일이다. 하물며 미술관이 주도하는 비엔날레에 관객들이 이미 보았던 작품들이 너무 많다. 물론 비엔날레에 구작을 절대로 출품 못하는 것도 아니며, 신작으로만 구성될 당위성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비판받아 마땅하게도 참여 작품 중에 구작이 너무 많다. “16억원으로 제주비엔날레를 준비했는데, 예산과 인력 등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아쉬움은 행사 자체를 예산 대비 규모를 조절하지 못한 폐인일 수도 있다. 
물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일반적으로 비엔날레의 사업비 중 가장 주요한 항목으로 평가받는 ‘참여 작가 초대에 따른 작품 제작 지원비’는 현재의 규모로 본다면 불가능이다. 따라서 제작 지원비가 담당해야 하는 신작보다 운송비 위주로 지불하는 구작을 많이 초대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 년도 안 되는 기간을 몰아 쳤으니, 참여 작가들에게 신작 제작을 위한 기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비엔날레에 구작이 너무 많다. 
셋째, 참여 작가들과 협력 큐레이터들이 심할 정도로 많다. 전체 77명(팀)이 참여하고 있지만 각 팀(혹은 프로젝트)을 구성하는 참여 작가들 수가 천차만별로 다르다. 그런 이유로 전체 참여 작가 수를 주최 측에서 세부 항목별로 구분하고 통합해서 따로 계량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따져 묻는 일이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 또한 참여 작가명을 명징하게 통일하길 요청하는 것은 이번 비엔날레서 무리일 수도 있겠다. 각종 현재형 프로젝트와 이미 선보였던 과거의 프로젝트의 작품들이 현재의 비엔날레에 수렴되면서 프로젝트명, 팀명, 그룹명이 한꺼번에 사용되고 작품명이 참여 작가처럼 사용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번 비엔날레에 해외 참여 작가는 25명(팀)이었는데, 외국 작가의 참여 비율이 더 필요하다는 공무원 식의 평가 지침을 여기서는 따로 거론하지는 않겠다. 
게다가 지역에서의 국제 행사가 당면한 과제이고 문제의식인 만큼, 지역 작가의 많은 참여를 도모하기 위해 실행했던 ‘한라 살롱’은 기획자의 절묘하고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획자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국제전 큐레이팅이라는 위상으로부터 추락하게 만들기에 족했다고 하겠다. 좀 더 다른 방식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지역의 훌륭한 다수의 작품들을 ‘짧은 시기에 한꺼번에’ 모으면서 ‘도떼기시장’과 같은 결과에 이르게 하였다. ‘살롱’이라는 의미를 억지로 꿰어 맞춘 꼴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기획자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는 까닭에 마냥 비판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아쉬운 결과였다. 
협력 큐레이터들 역시 과도하다. 실제 비엔날레에서 더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이름을 과도하게 카탈로그에 전시 캡션에 밝혀 참여의 주체로 등장시켜야만 했을까? 이러한 방법은 전시 자체가 매우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 같은 효과는 유발하지만 예술 감독 고유의 기획력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물론 이번 비엔날레가 많은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예술을 지향하고 있는 까닭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것이 유의미한 일이다. 다만 보은 인사처럼 보이기조차 한 협력 큐레이팅을 이해하기에 는 어려운 지점이 있다. 특히 주제를 확장한 지점에서 간신히 만나는 과거의 프로젝트들을 수용한 까닭에 불필요할 수 있는 협력 큐레이터들의 등장이 가시화된 점이 없지 않다고 할 것이다.   
넷째, 지금은 ‘병 주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훗날 저절로 ‘약이 되는’ 긍정적 효과가 겹쳐 있는 이번 비엔날레의 딜레마에 관한 논의를 여기서 필히 해야만 하겠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섣불리 비엔날레를 출범시킨 것인가? 더 늦기 전에 조속한 시일 안에 그것을 추진했던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너무 섣부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비판이었다면 필자는 이것은 일에 욕심이 많은 김준기 관장의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역 미술인들의 많은 의견을 꼼꼼하게 수렴하고 장단점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는 라운드테이블을 무수히 가지고 행사에 반영하는 시간들을 넉넉하게 가졌다면 비엔날레는 결코 출범하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로서는 갑작스런 비엔날레 출범 자체가 거칠고 어설펐던 발의와 맞물린 것이었음에도 지역 자치단체장의 의지와 새로운 기관장의 의지가 맞물린 멋진 성과였다고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기차가 플랫폼을 지나서 달려 나가 많은 비판과 논쟁 사이에서 안전하게 마지막 종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도민의 세금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행사에 마땅히 점검되어야 할 민주적 절차를 논하는 단계에서는 부적격임에도 말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번 비엔날레에는 김지연 예술감독이 많이 보이기보다 김준기 관장의 그림자가 더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비판거리이나 위의 관점과 같은 차원에서 딜레마였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비엔날레를 출범시킨 관장의 의견에 수시로 반대하는 감독을 구했다면 분명 이번 비엔날레는 파행이 거듭되었을지 모른다. 여러 프로젝트에 같이 일했었고 큐레이팅 색도 유사한 김지연 감독을 위촉한 것은 관장의 입장에서 기획에 관한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좋은 선정이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외부의 비판이 있음에도 지속적으로 김준기 관장이 천착해 온 행동주의 미술, 사회예술, 공동체 예술, 공공미술, 예술의 사회적 참여와 같은 화두를 별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펼쳐 올 수 있었을 것이다. 거친 예술 실험이 뿌린 씨앗이다. 
 

2017제주비엔날레 코스1 제주도립미술관


2017제주비엔날레 코스2 제주현대미술관


2017제주비엔날레 코스3 알뜨르비행장 일원



IV. 에필로그 
‘2017제주비엔날레의 거친 예술 실험과 그 후’라는 제목의 필자의 ‘병 주고 약 주기’는 여기서 끝내자.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미디어에 자주 거론되고 지역 예술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세세한 비판거리들은 생략했다. 예를 들어 누구의 작품은 캡션이 아예 없고, 전시 공간 연출은 관람하기에 그다지 친절하지 않으며, 누구는 참여 작가로 출품하는 와중에 주최 측의 문제로 어려움에 봉착했으며 하는 따위의 언급은 주요하지만 여기서는 보다 본질적인 비평을 위해서 생략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잘잘못을 따져 묻는 일은 보다 비엔날레 이후를 예견하고 준비하는 거시적인 비평을 위해서는 사소한 지점일 수도 있겠다. 
이 글이 지향하는 논점을 따라가다 보면, 필자가 졸지에 악역을 자처한 듯하지만, 실상 필자의 본심은 전혀 그러하지 않다. 건강한 비판을 위해서 필자의 입장에서 비판의 언어들을 정리해 본 것일 따름이다. 제주를 위한 국제미술행사에 열과 성을 다한 김준기 관장과 김지연 감독 그리고 관계자 모두의 힘든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의도는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외부자의 시선으로 겁 없이 주절주절 이야기한 ‘이야기꺼리들’이 논의의 장에 긍정적인 방향에서 수렴이 되고 다시 논의됨으로써 제주비엔날레의 ‘그 후’의 행보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

출전 /

김성호, '2017제주비엔날레의 거친 예술 실험과 그 후', 제주비엔날레의 평가와 미래를 위한 제언 -제주미술포럼 4, (예술공간 이아, 2017. 11. 30 오후 6: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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