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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김학두 /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상상정경(想像情景)

김성호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상상정경(想像情景)’


김성호(미술평론가) 



몸의 눈과 마음의 눈
심미안(審美眼)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름다움을 살펴 찾는 안목’이라는 한자 뜻풀이 외에도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별(分別)하여 살피는 마음의 눈’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것은 ‘대상에 대한 육안(肉眼)의 판별력’ 보다는 심안(心眼)의 판별력’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말이다. 미적 판단에 관한 한, ‘몸의 눈’ 보다는 ‘마음의 눈’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대면하는 몸의 눈은 조형적 완결미와 형식미라는 ‘외양(外樣)’을 부단히 좇지만, 마음의 눈은 ‘내면과 범상한 것, 심지어 추한 것’에 이르기까지 ‘외양’ 너머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상으로부터 미적대상과 그 가치를 발견해내고 이것을 조형언어로 다듬어내는 김학두 화백의 작품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마음의 눈’은 주요한 키워드가 된다. 심산유곡의 빼어난 절경이 아니어도 광활한 대지와 드넓은 바다의 넉넉한 자연의 품이 아니어도 화가 김학두는 논과 밭이 있고 잡풀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우리 주변의 하찮고 소소한 일상의 자연을 찾아가 그곳으로부터 ‘절세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고 이것의 미적 가치를 극대화시켜낸다. 팔순이 넘는 원로 화백이 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가 ‘마음의 눈’이라는 ‘심미안’을 통해 일상 혹은 일상의 자연이라는 미적 대상과 부지런히 교감하고 대화해온 까닭이다.    
김학두 화백의 블로그(http://blog.naver.com/khd525) 안부게시판에는 그로부터 학창시절 미술교육을 받았던 한 방문자의 추억어린 메시지가 다음처럼 남겨져 있다.

“1963년 중학교 입학하고 첫 번째 미술시간에 / 오늘 아침 학교 오는 길을 그리라고 하셨는데, 그 때의 당혹감이라니.... / 동서남북을 떠올리며 집과 학교의 거리를 측정하려 했던 그 소녀는/ 이제 59세가 되어 선생님의 유의미한 말씀을 알아듣습니다. / 지금 생각하면 /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기쁜 날들이었던 것을... / 그 기분, 그 마음을 그리라 하신 것을 이제야 압니다.”

그의 옛 제자의 추억을 간접경험하며 한번 생각해보자. ‘몸의 눈’은 대상을 분석하고 해부해서 발가벗겨 내는데 집중하지만, ‘마음의 눈’은 대상과 교감하고 대화하는데 골몰한다. 새로운 학교에 입학한 ‘들뜬 기분과 설레는 마음으로 사물을 대면하는 눈’은 ‘건조하고 차가운 몸의 눈’과 달리 대상에 감정이입하고 그것을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화가 김학두가 대상에 감정이입하는 ‘마음의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마저 꿰뚫어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우주의 소리마저 섬세하게 듣게 한다.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마저 포착하게 하고 바람 불고 비오는 소리마저 화폭에 담아내게 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둘러보자. 화가 김학두의 작품 안에는 현실을 대면하는 육안(肉眼)의 사생(寫生)의지를 어르고 다독이며 심안(心眼)의 비사생(非寫生) 의지를 넘실대게 하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소리들로 가득하다. 버드나무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새싹이 자라는 소리가, 꽃들이 피어나는 소리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이웃의 아낙들이 옹기종기 모여 나누는 수다스러운 대화소리가 말이다.



 

상상으로 대면하는 자연-‘상상정경(想像情景)’
‘몸의 눈’은 빛에 따라 변화를 받는 물질을 함유한 시세포(視細胞)의 작용에 의해 시시각각 변모한다. 더욱이, 그것은 두 눈으로 함께 대상을 바라보아야 하며 점차 노화로 접어들면서 그 기능에 신뢰를 주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어 지극히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존재이다. 더러 ‘몸의 눈’은 교통사고나 범죄자를 가리며 진실을 규명하는 증거로 내세워지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착시나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주위환경에 의해 흔들리고 마는, 그리 믿음직하지 못한 존재이다. 그런 탓에 ‘몸의 눈’에 익숙한 화가로서는 자연의 외양적 변화무쌍함을 포착해낼 수는 있지만, 그 변화의 본질을 쉬이 캐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외양의 이면, 즉 내면을 주시하는 ‘마음의 눈’에 훈련된 화가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화가가 자연이라는 대상에 부여하는 감정이입의 결과 때문이다. ‘감정이나 정신을 대상에 이입시켜 자신과 그 대상물과의 친밀한 융화를 꾀하는 정신작용’을 감정이입이라 할 때, 화가 김학두가 자연에 침투시키는 감정이입의 전략은 자연이라는 대상과 끈끈한 교감과 친밀한 대화를 모색하고자 시도하는 다분히 순수의 차원을 지향한다. 즉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주시하고 그들과 대화하고자 시도하는 화가의 열정과 집념 자체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볼 것은, 대상에 감정이입하는 마음의 눈은 상상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상상은 현실에 있는 기존의 구조와 질서를 해체시키는 관성을 지니고 있어, 일견 화가 김학두의 상상으로 대면하는 자연은 비현실의 세계로 탈주하려는 듯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실상은 현실을 도피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1920년대 ‘초(超)현실주의’ 맥락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자연은 현실에 기반한 채 불러들이는 초현실, 비현실의 세계라 할 것이다.
그가 초현실의 세계에 손짓을 하면서 감정이입과 상상으로 대면하는 자연은 가히 ‘상상정경’이라 불릴만하다. 현실에 비현실을, 실재에 비실재를 사생에 비사생을 불러들이는 그의 상상정경은 자연의 개별체들 사이의 관계항을 놀랍도록 새롭게 정초시킨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호수가의 버드나무, 꽃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나비, 사람과 집과 같은 익숙한 관계지형에서조차 그의 작품은 빈번하게 새로운 관계항들을 설정한다. 예를 들면, 과일들은 나뭇가지로부터 떨어져 매달려 있고 꽃잎들은 천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꽃잎의 크기는 자연의 풍경들을 넘어서기도 하면서 근경과 원경의 개념을 전복한다. 오밀조밀 그려진 자연의 풍경과 인접해서 확대된 버드나무 가지가 각각 하나의 화면에 중첩되어 있는가 하면,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선박과 또 다른 화면으로 등장하는 갈매기 등 하나의 화면에 시점(視點)이 다른 시공간이 병렬, 중첩되어 있기도 하다. 꽃잎과 함께 날아다니고 있는 새의 비상, 수면 위로 몸을 드러낸 물고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새의 모습 또한 그의 ‘상상정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정겨운 풍경들이다. 현실을 토대로 하고 있으나 그것을 무화시키고 배반하는 예술정신처럼 그의 상상정경들은 현실로부터 비현실과 초현실의 세계를 불러들여 자칫 단순해지고 식상해질 수 있는 자연풍경을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하고 있다. 






순수 동심의 ‘이상현실(理想現實)’
김학두 화백의 ‘상상정경’은 현실에 기반을 둔 채 비현실의 세계를 불러들인다. 그런 점에서 그가 화폭에 담아내는 자연은 현실 속에서 찾아나서는 그의 낙원이자 이상향이 된다. 그의 작품에 대한 우리의 작명, ‘상상정경’에 덧붙여 부름직한 또 다른 작명은 ‘이상현실’이 될 듯하다. 감정이입하는 마음의 눈과 상상작용을 통해서 화가 김학두는 그의 상상정경 혹은 이상현실을 순수 동심의 세계로 인도한다. 
김학두 화백과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글들에서 ‘한국의 샤갈’, ‘꿈꾸는 어린 왕자’라는 별칭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동화적 감성과 동심으로 가득하다. 특히 붉은 땅과 노란 하늘처럼 강렬한 원색이 주도하는 화려한 화면과 더불어 녹색과 붉은 색이 인접한 화면 안에서 자주 교차하는 보색대비 그리고 분홍과 같은 색의 빈번한 사용은 그의 작품을 경쾌하고 생기발랄한 분위기로 이끌어낸다. 원색이 전면(全面)에 다양하게 배치되고 그 사이를 여러 무채색이 가로지르며 질주를 거듭하는 화면은 자연의 정수에서 뽑아 올린 색들로 직조해놓은 한편의 동화책 같이 여겨진다.  
아동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중앙집중식의 화면구도와 더불어 모든 개별체의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진 혼성의 전략은 그의 작품을 이상현실의 것으로 만들기에 족하다. 산이 있으면 들이 있고 그 들녘에는 가로수들이 서 있고 숲이 한 자리를 차지하며 그 숲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길게 나뭇가지를 늘어뜨리고 있고 주변은 흩날리는 꽃잎으로 가득한 혼성의 전략이 그것이다. 호수가 있으면 오리가 등장하고 물고기가 뛰어놀며 호수에 되비치는 자연의 반영, 그리고 하늘을 나는 몇 마리의 새들과 그 위에 빛나고 있는 태양...
이렇듯 일견 상투적이고 관성적인 김학두 화백의 혼성전략은 기실 산수화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동양화적 감성을 서양화의 화폭에 옮겨놓으려는 시도가 된다. 즉, 자연의 개별체들이 음양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자연 본성에 대한 동양적 사유를 조형언어를 통해 실천하려는 것이다. 서양의 풍경화처럼 자연 위에 군림하는 인물상들과 달리 화가 김학두의 풍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자연 속에 융화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듯이 작은 크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원근법의 해체나 시점의 분해는 물론이거니와 물감을 붓으로 찍어 바르듯이 그려간 조형방식도 자연 개체들의 특성들을 전체 자연 풍경 속에 무화시켜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게 만들기에 족하다. 서로 다른 개체들을 놀라운 방식으로 관계 맺어주는 것은 결국 작가의 상상작용으로부터 기인한다. 상상작용이 넘실대는 그의 작품에서 평화, 동심, 자연, 심원, 사랑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원로화백 김학두의 작품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에는 간결한 선들이 함축된 선화와 같은 작품경향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듯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인 변모를 거듭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작가란 늘 변모를 거듭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오랜 시간을 미술교육의 현장에 몸담으면서 작품창작에 관한 자신만의 사적 세계를 오늘날까지 일관되게 지속해올 수 있었던 것을 되새겨볼 때 적어도 몇 가지만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 신뢰가 있다. ‘마음의 눈으로 대면하는 자연’, ‘순수 동심의 자율성’, ‘무한한 상상에의 의지’와 같은 것들이다. ■ 


전 /
김성호,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상상정경(想像情景)’ (김학두 전, 2008. 10. 14-20, 수원미술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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