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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김결수/ 오브제에 각인된 흔적의 사건을 재전유하는 제의적 진혹곡

김성호

오브제에 각인된 흔적의 사건을 재전유하는 제의적 진혹곡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김결수의 작업은 세월의 흔적을 흠뻑 안고 있는 오브제들을 발견하고 그것에 각인된 세월의 레이어를 탐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작가로부터 ‘발견된 오브제(objets trouvés)’가 함유하고 있는 흔적의 ‘원(原)사건’을 추론하고 해체,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자신만의 해석과 내러티브를 써내려가는 것이다. 그것은 다분히 원사건을 재전유하는 작가 김결수가 미술의 언어로 연주하는 제의적 진혼곡이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발견된 오브제와 흔적의 사건 
주지하듯이, 미술에서 '오브제(objet)'란 ‘사물의 일반적 개념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 의미가 부여된 물체’를 의미한다. 즉 ‘미술이 된 사물’인 것이다. 20세기 초반 피카소의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와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made)’를 필두로 우리에게 변형되어 온 콜라주, 오브제, 앗상블라주와 같은 오브제 미술은 재현의 대안, 전위의 상징, 반미학과 같은 모토 아래 기존 미술이 당면했던 표현의 경직성을 넘어서며 현대미술의 주요 전략으로 각광을 받아왔다.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오늘날 미술에서 오브제는 창작 주체의 사유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기에 제격인 셈이다. 
작기 김결수의 오브제들은 ‘세상으로부터 세상에 버려지고 던져진 것들’이다. 즉 그것은 발견된 오브제라고 하는 ‘피투(被投)의 존재들’로 그에 의해서 마치 신으로부터 피조(被造)된 존재들처럼 존재의 주체로 간주된다. 김결수의 오브제란 대상(object)이 아닌 또 다른 주체(subject)처럼 간주되는 셈이다.  
작가 김결수는 이와 같은 ‘발견된 오브제’로부터 세월의 흔적과 어떠한 사건의 내러티브를 읽어낸다. 칼집이 무수하게 각인되어 있는, 한 포장마차로부터 발견된, ‘나무 도마’로부터 그는 그것의 원소유주가 일상처럼 벌였던 반복된 칼질의 흔적을 대면하면서 그 소유주의 삶을 읽고 그 오브제를 둘러싼 소유주의 처연한 삶의 내러티브를 전해 듣는다. ‘나무 도마’의 피부 위에 새겨진 흔적들이 전하는 무언의 발화 행위와 그것의 내러티브! 김결수는 발견된 오브제를 ‘만들어진 오브제(objets créés)’로 변형, 변주하는 자신의 조형 언어 안에 그것을 한데 껴안는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이러한 작업 과정 속에서 작가 김결수만의 해체와 재전유의 방식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의 조형 언어를 전유(appropriation)가 아닌 재전유(re-appropriation)로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유의 어원적 의미는 ‘무언가를 가져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행위’이다. 이것은 오늘날 문화 연구에서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인수하여 그 문화자본의 원(元)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가리킨다. 김결수가 취하는 실천은 “혼자 독차지하여 가짐”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전유’로 결코 귀결되지 않는다. 오브제의 원소유자의 이야기를 해체하고 재구성하지만 그것의 본래적 의미를 은폐하거나 소멸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오브제의 원래적 의미를 가져오는 전유로부터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지만, 그것을 다시(re)라는 접두어로 접속시켜 원전의 의미를 재고(再考)하는 재전유를 귀결점으로 삼는다. 
보라! 전시의 현장으로 이동시킨 ‘나무 도마’로부터 포장마차 주인의 이야기가 해체되고 일상으로부터 예술의 언어로 재전유된다. 철거된 옛집에서 전시장으로 가져온 ‘150여 개의 구들장’이나 오래된 ‘대들보’는 또 어떠한가? 그것들로부터 그 옛집 주인의 이야기가 해체되고 재구성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원전을 은폐하거나 소멸시키는 전유가 아닌 원전의 오브제의의미를 확장하는 재전유의 의미로 전개된다. 거기(그곳)에는 의미에 대한 ‘재의미 작용(re-signification)’이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작가 김결수가 오브제에 각인된 특정한 흔적의 사건들을 폐기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그것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예술적 경험을 지속적으로 투사하기 때문이다.  





오브제의 내면을 재전유하는 지난한 노동과 설치의 진혼곡 
오브제의 ‘밖’에서 살펴지는 이미지란 본디 허망한 시뮬라크르의 존재일 따름이다. 그 지점을 잘 알고 있는 작가 김결수는 따라서 오브제의 ‘안’에 집중한다. 오브제가 지닌 시간과 공간 그것이 주체로서 목격한 사건의 현장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언을 신뢰하듯이 발견된 오브제의 ‘안’을 탐구하면서 ‘질료가 품은 이미지’와 ‘질료가 낳은 형상’을 탐구한다. 즉 ‘안(질료 혹은 실재)’에서 ‘밖(이미지)’으로 모색되는 조형 언어에 천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브제에 투여하는 무모하리만치 지난한 노동의 과정들로 집적되고 발현된다. 그가 작가노트에서 언급하는 ‘노동과 노동 효과(Labor and Effectiveness)’란 오브제의 안, 즉 질료의 세계에 투여하는 노동이자 그것이 발현되는 효과이다. 그것은 눈에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폐목의 피부 위에 흰색 안료와 물질로 띠를 둘러낸 결과물은 실제로는 엄청난 시간의 투여한 노동들이 미세하게 층을 이루며 집적되어 발현된 것이다. 도시 건설 현장의 폐기물인 고철이나 들보와 같은 ‘발견된 오브제’에 지난한 노동을 투여해서 창출하는 김결수의 ‘만들어진 오브제’는 마치 장인의 그것과 비견할 만하다. 그것은 물질의 안으로부터 밖으로 스멀스멀 배어나오는 오브제의 세월만큼이나 길고도 지난한 노동의 결과물이다. 
현대사회에서 노동이란 ‘경제활동을 통한 재화 창출’을 지향점으로 한다. 즉 보수를 대가로 하는 행위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노동은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일뿐만 아니라 무모하기조차 하다. 이러한 노동은 김결수의 작품을 읽어내는 양준호의 비평에서 인용한 ‘시지푸스 신화’의 주인공의 것처럼 무모한 자기 형벌의 행위를 닮아있다. 효율적 노동의 결과와는 차원이 다른 무모한 예술적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김결수의 작품이 의미하는 ‘노동의 효과’이다. 마치 예술가로서의 삶을 천형(天刑)처럼 받아들인 이 땅의 많은 예술가들처럼 김결수 또한 ‘무모한 예술 노동’이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바위를 올리고 또 올린다. 
보라! 그가 천형처럼 받아들인 예술 행위로서의 무모한 노동은 그의 작품 도처에 있다. 폐목의 상처 난 피부를 미세하게 다듬고 치유한 하얀 띠무늬 속에, 옛집에서 가져온 ‘150여 개의 구들장’의 아귀들을 일일이 재구성해 원형으로 맞춰 나가는 재전유의 행위 속에, 화재로 전소된 주택의 목재들을 마치 인간의 뼈대처럼 집의 형상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조형 언어 속에, 나무의 속살을 미세하게 쪼아내 상처를 드러낸 대들보의 피부 속에 그의 지난한고도 무모한 예술적 노동은 살아 꿈틀거린다.       
오브제의 질료 위에 투여하는 지난한 노동과 더불어 그것을 변형, 변주하는 김결수의 조형 언어는 아날로그의 자연적 질료 위에 철제 구조와, 네온, LED조명과 같은 인공의 색채를 덧입힘으로써 오브제를 대상에 머물게 하지 않고 또 다른 주체로 부활시킨다. 나무 도마, 폐가의 폐목, 그리고 구들장과 같은 ‘발견된 자연적 오브제들’을 작가 김결수는 인간 주체의 심성을 건드리는 아날로그적 따뜻한 미디어들로 감싸 안으면서 그들에게 호흡을 불어 넣는다. 그의 이러한 예술적 행위를 통해서 ‘발견된 자연적 오브제들’은 그에게서 ‘대상’이 아닌 ‘또 다른 주체’로 되살아난다. 마치 그의 사물들이 인격 주체로 호명되는 것처럼 말이다. 즉 사물에 정령을 입히고, 대상에 생령을 불어 넣어 모든 사물들을 물활론(物活論, animism)으로 불러냄으로써 사물들을 그저 죽어 있는 물적 대상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 주체로 변환하여 등극시키려는 것처럼 말이다. 
보라! 시메트리(symmetry) 혹은 중앙 집중형으로 집적되는 그의 조형적 설치 언어는 마치 제의적 모뉴먼트처럼 구축된다. 원형으로 재구축되는 구들장, 투과체 구조물에 매달린 대들보는 물론이고 원형 탑처럼 구축된 아날로그적 미디어가 함께 설치된 다양한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제의적 모뉴먼트의 분위기는 발견된다. 방사형 가지들을 펼친 서낭나무 혹은 서낭당처럼 설치된 구조물, 버닝 프로젝트에 출품한 커다란 새둥지를 품은 제단과 같은 설치, 격자형 가설 철봉에 매달린 투과형 철제 육면체들이 그것들이다. 이와 같은 재전유의 조형 언어와 형식도 그러하지만, 붉거나 푸른 조명 역시 그의 작품에서 제의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조형적 결과물은 그가 자신의 미학의 본질을 이미지 표층의 껍데기가 아닌 오브제의 심층 혹은 질료적 내면으로부터 발견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동양적 선문답(禪問答)에 가까운 조형적 태도로부터 기인한다. 달리 말해 그의 작품은 ‘오브제의 내면을 재전유하는 지난한 육체적/정신적 노동’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작가 김결수를 가히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잇는 샤먼(shaman) 혹은 발견된 오브제로부터 만물 속에 잠자던 정령을 깨우는 ‘예술적 영매(靈媒)’라 부를 만하다. 아울러 그가 창출하는 작품들은 발견된 오브제를 만들어진 오브제로 변환하는 영매의 기술을 통해서 지금과 과거를 매개하고 ‘사물로서가 아닌 또 다른 주체’로서의 오브제와 그것의 ‘옛 존재’로서의 삶을 위무하는 현대의 제의적 진혼곡이라 할 만하다. ●

출전/ 
김성호, 「오브제에 각인된 흔적의 사건을 재전유하는 제의적 진혹곡」, 김결수 작가론, 대구문화재단,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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