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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조은필 전 / 욕망하는 블루(Blue)의 현상학적 지각

김성호

욕망하는 블루(Blue)의 현상학적 지각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블루의 마술적 판타지   
작가 조은필은 초기작의 코발트블루(cobalt blue)로부터 최근의 울트라마린블루(ultramarine blue)에 이르기까지 블루로 대변되는 파란색에 대한 개인적 취향과 기호(嗜好)를 강박적으로 작품 속에 드러내 왔다. 아래, 그녀의 세 언술은 이러한 작품 세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유년기 시절의 감성에서 시작된 블루에 대한 막연한 욕구는 작가로서 작업을 하게 되면서부터 나 스스로를 나타내는 정체성의 색이 되고, ‘집착’이 되었다.” (2016, 작가노트) 
“나의 블루에 대한 집착은 강박에 가깝다. 내 공간을 그 색으로 메우고 싶다.” (2018. 작가노트) 
“나의 작업은 블루를 주된 조형 요소로 하여 일상적 소재를 초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전환하는 설치 작업이다.” (2016, 작가노트) 

즉, 작가의 작업은 ‘블루에 대한 체험적 감성의 출발 - 블루에 대한 집착 - 블루에 대한 강박 - 블루를 통한 공간 점유의 과정 - 블루를 통한 일상적 소재의 비일상적 공간으로의 전환의 결과’라는 단계별 진화로 펼쳐져 온 셈이다. 
여기서 블루는 실재를 감추는 가상의 색이자 마술적(magical) 이미지이며, 일상의 오브제로부터 초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미술품 더 나아가 판타지의 공간으로 위상을 변주시키는 마법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작가의 블루는 마술적 효과를 견인하는 주요 무기이다. 마술이 속임수의 기술을 통해서 실재를 위장하고 가상의 이미지를 드러내면서 판타지를 선사하는 것처럼, 그녀의 작업은 사물의 표면을 블루로 덮어 실재를 은폐, 위장하고 블루가 표상하는 가상의 이미지로 판타지의 세계를 드러낸다. 
보라! 재봉틀, 화분, 의자, 조화, 지구본, 새장 등 푸른색으로 뒤덮인 오브제가 푸른 방 안에 가득한 공간 설치 작품인 〈Mad Blue World〉(2006)에서 각 오브제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고유의 무늬나 텍스트를 지우고 블루 속에 숨겨진 채 욕망의 세계를 확장한다. 푸른색 문과 담벼락을 타고 자라난 푸른 꽃들이 가득한 〈Blue Popcorn〉(2006)이나 그것들이 마치 연극 무대 장치처럼 설치된 작품 또한 블루를 통해 일상의 오브제로부터 비일상의 미술의 세계로 자신의 몸을 확장한다. 의자, 장롱, 책상 등 폐기된 가구와 온갖 잡동사니 위에 이끼를 입히고 블루로 뒤덮은 거대한 조각적 구조물을 설치한 작품, 〈Blue moss- From reality to illusion〉(2017)은 또 어떠한가? 이것은 작품 제명처럼 ‘일상의 오브제’라는 실재를 가리고 ‘블루가 견인하는 환영의 미술’로 변주된다. 그녀의 개인전, 《Magical Approach》(노블레스, 콜렉션, 2017)에서 폐가구와 인공의 화분 등에 푸른색을 입힌 작품들 역시 이러한 ‘마술적 판타지’는 여실히 드러난다. 
생각해 보자. 마술은 현실계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속임수 등을 통해서 가상의 이미지로 실현하지만, 그 이미지란 결코 실재가 아니다. 마술의 세계에서 실재는 대부분 은폐되어 있으나, 마술의 최종 단계에서 그 은폐의 마법을 벗고 현실 속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이 때 관객은 환호한다. 그것이 마술이 의도하는 마지막 단계이다.  
조은필의 작업은 어떠한가? 작가는 모든 재료를 '청색화(buleing)'하는 방식으로 다종다양의 사물을 균질화함으로써 일상의 이미지를 비일상의 미술적 이미지로 전환한다. 이러한 그녀의 작업에서도 실재는 마법의 블루 밑에서 은폐된 채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작업이 마술과 다른 것은, 자신이 펼치는 마법의 이미지를 끝내 벗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무한히 확장시켜 나가면서, 현실과 마술의 이미지를 한꺼번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녀의 작업은 모든 것을 뒤덮은 가상의 블루 이미지로 가시화되지만, 이내 관객으로 하여금 블루의 마법에 걸린 사물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블루잉’이라고 하는 단순한 행위가 초래하는 ‘블루의 마술적 판타지’가 지닌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다.   


조은필, 〈Blue moss- From reality to illusion〉(2017)



II. 블루의 강박적 욕망으로부터   
작가 조은필에게 있어서, ‘블루’는 유년기부터 좋아하는 색으로 소유와 집착의 대상이었다. 블루에 대한 강박적 욕망이 훗날 그녀의 예술의 장에서 ‘가장 자기다운 예술’을 펼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즉, 작가 조은필에게서 ‘블루’란 “판타지, 욕망의 끝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적합한 수단이자 방편”(2018, 인터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블루에 대한 집착은 작업 속에서 전체의 이미지를 이끌고 가는 ‘강박’의 코드인 동시에, 일탈의 한 변주”(2016, 작가노트)라 할 것이다.  
그녀의 ‘블루에 대한 강박적 욕망’은 푸른색이 있는 사물을 모으는 방식으로부터 점차 여러 사물을 자신의 블루로 빈틈없이 덮는 확장의 방식으로 변모해 왔다. 즉 ‘동색(同色)의 푸른 오브제의 채집과 병치’의 방식으로부터 ‘이형이색(異形異色)의 오브제 채집과 블루를 덮은 해체적 설치’의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전개시켜 나간 것이다. 그것이 ‘발견된 오브제’인지 ‘만들어진 오브제’인지는 주요하지 않다. 블루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매개체’로서의 의미가 주요할 따름이다. 예를 들어, 작가 조은필은 루이스(C. S. Lewis)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1950-56)에서 현실과 판타지의 세계를 연결하는 ‘옷장’과 같은 매개체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자신의 2017년 개인전에 등장한 가구 설치 작업에 부여한다. 즉 블루와 마찬가지로, 이 가구 오브제들이 관객들을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자신의 예술 공간으로 이동하게 만드는 매개적 존재가 되길 기대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 조은필은 매개체로서의 의미를 펼칠 수 있는 재료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신의 작업 안으로 끌어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블루가 칠해지는 다종다기한 일상의 오브제로부터 원자재, 부품, 가구와 같은 산업재는 물론이고, 조화, 인조 이끼, 건조 이끼, 인조 나무, 그리고 최근의 자연목에 이르기까지 그 진폭은 넓었다.   
한편, 작가 조은필에게 있어, 이러한 블루의 확장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도입된 다양한 조형의 개입은 그녀의 블루를 ‘물리적 공간의 확장’으로부터 ‘심리적 공간의 확장’으로 변주하게 만들기도 한다. 즉 강박적인 블루의 욕망을 일탈시켜 다수의 욕망의 지점들을 만들면서 변주를 시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리즈 작품 〈Bring the space〉(2016)의 경우에서처럼, 천장, 바닥, 벽 등에 설치된 무수한 작은 깃털 형상과 더불어 작품 〈푸른 깃털〉(2015-16)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미술관에서 선보인 소수의 거대한 깃털은 물리적 공간 너머 심리적 공간을 넘나든다. 한편, 작품 〈Dye the space blue〉(2015)이나 〈푸른 새들〉(2015)의 경우에처럼 조형물 또는 새와 같은 동물 형상들은 푸른색을 입은 채, 푸른색 아닌 공간을 향하여 자라며 시각적 확장과 점유를 시도한다. 한편, 우울, 평정, 희망의 사이에서 관객의 심리적 공간마저 확장시킨다. 
여기에 덧붙여 작품 〈Blue beyond the blueⅡ〉(2016)의 경우에서처럼, 조각의 질료, 회화의 지지대와 같은 역할을 견지하는 ‘털실’과 같은 소재는 작가의 ‘블루에 대한 강박적 욕망’을 ‘씨줄과 날줄’, ‘추상과 구상’,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 사이에서 다양하게 확장하고 변주시킨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인지 골과 마루가 겹쳐진 산인지 에너지 가득한 추상의 형상인지 확인할 길 없는, 털실로 된 ‘거대한 설치물’은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또한 블루의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물감에 대한 연구는 또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의 완벽한 블루를 찾기 위해, ‘털실 작업’의 경우 광기의 의미를 담고 있는 보라색을 더 강화시키기 위해 공장에서 특별 염색을 시도한다거나, 인조 이끼 작업의 경우, 염색약으로 물들인 후, 다시 페인트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블루의 도색에 대한 여러 실험을 거쳤다. 가히 블루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확장하는 실험이라 하겠다. 

 


조은필, 〈일렁이는 궁전 II〉, 그물, 철사, 송도해수욕장, 부산, 2013



III. 블루의 현상학적 지각으로   
푸른 자연목을 설치한 이번 개인전, 《내 방의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에서도 작가 조은필의 블루에 대한 ‘강박적 욕망’과 ‘심리적 확장’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마술적 효과’는 정도가 다를 뿐, 여전히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서, 전시장 천장에 매달린 묵직한 자연목들의 피부 위에 뒤덮인 파란색의 물감은 나무의 자연색을 은폐하고 자연물의 존재적 위상마저 탈각해 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이 어디선가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생존했었던 자연의 생명체였음을 말이다. 이처럼, 너무도 생생한 자연물의 유기적 형태와 나무의 원형적 이미지는 우리의 시각 앞에서 끝내 은폐되지 않는다.  
작가 조은필은 이번 전시에서 ‘확장하는 블루의 욕망’이 맞닥뜨린 어떠한 ‘미끄러짐’을 경험하면서, “자연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언술은 이번 개인전에 그녀가 내리는 결론이자 우리가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읽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일견 패배감 가득한 이 말이, 블루로 확장하는 그녀의 창작 세계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하나의 ‘변곡점’ 혹은 ‘터닝 포인트’로서 새롭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그것을 ‘블루의(에 대한) 현상학적 지각’으로 정의한다. 이 말은 필자의 새로운 작명이기보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저작인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1945)으로부터 가져와 ‘현상학적 관점의 지각’을 강조하기 위해 변형한 말이다. 
여기서 현상(phénomène)이란, “인간이 알아서 깨달을 수 있는,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라는 사전적 정의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 모든 활동의 총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온도, 통증, 소리, 색, 크기와 같은 인간의 오감으로 수용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모든 현상은 인간 주체의 주관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천둥소리는 ‘대기 중의 방전에 따른 진동에 의해 생긴 음파’라는 객관적 실재이지만, 수용자의 귀청에 전달될 때 비로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듯이, 조은필의 블루 역시 ‘빛의 반사에 의해 나타난 물리적 결과’이지만, ‘빛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감각 작용’이 발생할 때 비로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메를로 퐁티의 철학에서 현상이란 객관과 주관과 통합적 결과인 셈이다. 
조은필의 작업이 창출하는 ‘블루’라는 ‘(색의) 현상’은, 오늘날 의미에서의 현상학의 출발을 알린 후설(E. Husserl)의 철학적 언어로 말하면,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ät) 안에서’ 즉 관객의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일상의 오브제를 블루라는 단일색으로 뒤덮어 비일상적인 모습으로 만든 그녀의 마술적 이미지는, 관객의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에 따라 ‘숭고/공포의 블루’로, ‘희망/우울의 상징’으로 혹자는 ‘미술의 은유/기호’로 또 다른 이는 ‘낯선/무의미한 판타지’로 각기 달리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은필, 〈Blue beyond the blue II〉, 경남도립미술관, 창원, 2016


그런데, 자연목을 블루로 뒤덮은 설치 작품을 선보인 이번 전시는, 이러한 관객의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을 고려하기 이전에 이미 작가 조은필에게 있어 심각한 하나의 도전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작가 조은필에게 있어, 깊은 위안과 강력한 충족의 도구였던 ‘블루’가 더 이상의 ‘마술적 판타지의 실행’이라는 추동력을 잃고 침잠의 나락으로 작가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블루’로 자신(만)의 미술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가 조은필의 그간의 강력한 의지와 기대가 ‘생명력으로 가득한 자연물’을 만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허물어진 셈이다. 올해의 개인전은 이 사건의 핵심이자 중심이다. 
작가 조은필은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언급하는 '지각(perception)'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인다. 지각은 ‘현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의식의 지향성’과 같은 의미의 다른 말로, ‘살(chair)’이라는 이름의 ‘삶의 체험이 축적된 몸'으로 받아들이는 총체적인 활동이다. 그녀는 ‘블루의 강박적 욕망’이 만드는 강력한 시각적 효과조차 자연물 앞에서는 너무나 유약한 존재가 되고 마는 현실을 살과 같은 총체적 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그녀는 블루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나무라는 생명 그 자체를 극복하기에 너무나 약한 것’임을 ‘현상학적 지각’의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 전시가 ‘블루로 강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방과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임을 선언한다. 《내 방의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이라는 이번 개인전의 전시명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조은필, 〈내 방의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 (2018.07.28.Sat. - 09.19.Wed. 프로젝트 B6, 부산)





IV. 에필로그 
작가 조은필은 이번 개인전을 자신의 작업에서 터닝 포인트 혹은 변곡점으로 맞이한다. ‘블루의 강박적 욕망’으로부터 ‘블루의 마술적 판타지’를 창출하던 그간의 작업들로부터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점검의 장을 마련한 셈이다. 필자로서는 그녀의 이후의 작업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다른 방향에서 블루의 마술적 판타지를 극대화시킬지, 아니면 숭고한 자연의 존재 앞에서 무력화된 블루를 소생시켜 자연과 동행하는 새로운 작품으로 전환시킬지, 혹은 블루가 아닌 다른 색의 개입을 견인하면서 변곡점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작동시킬지 모를 일이다.  
다만, 우리는 그녀의 작업에서 새롭게 엿보이는 ‘사물에 대한 현상학적 지각’의 철학적 방법론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를 해볼 수 있겠다. 먼저 그것은 과거에 종속되는 결과물인 '말해진 말'(parole parlée)로서가 아니라 현재적 미래를 살아 숨쉬는 '말하는 말'(parole parlante)로서 펼쳐질 것임은 물론이다. 나아가, 퐁티의 현상학에서 지각의 주체인 총체적 몸으로서의 ‘살’의 개념은 인간의 몸을 넘어서 모든 존재자의 총체적 몸으로 확장된다. 이제 작가 조은필의 작업에서 ‘블루’는 퐁티의 현상학에 나타난 ‘살’의 개념을 계승하고 확장한다. 그녀에게 ‘블루’는 일상 사물, 작가 그리고 관객 사이에서 매개의 삶을 부단히 살고 있는 ‘나의 살’이자 ‘세계의 살’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출전 /
김성호, 『욕망하는 블루(Blue)의 현상학적 지각』, 카탈로그 서문, 《조은필 개인전 - 내 방의 존재하는 사물들과는 다른 것》 (2018.07.28.Sat. - 09.19.Wed. 프로젝트 B6,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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