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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욜로 - 오- 작가여! 전 / 양방향 아트프로젝트 - 생태적 네트워크와 창의적 작가주의

김성호

‘욜로’의 양방향 아트프로젝트 - 생태적 네트워크와 창의적 작가주의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이 글1)은 《욜로, 오-작가여!(You Only Live Once)》전(이하 ‘욜로’전)에 관한 전시평이다. 대구예술발전소에 따르면 이 전시는 “현대미술의 동향을 소개하고 작가들 간 활발한 교류를 도모하고자 매년 개최되는 실험적인 기획전”이다. 
이 기획전은 두 가지 목표점을 설정한다. 하나의 목표는 이 전시가 2017년의 《대구예술생태보감》전2)의 연장선에서 비롯되었고 《2018대구예술생태조성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3), ‘대구 예술의 생태적 네트워크 조성 및 구축’에 연동된다. 또 하나의 목표는 올해 기획전 주제로 내세운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의미의 '욜로(YOLO)'라는 신조어로부터 출발한다. 즉 주최 측은 이 신조어를 한 번뿐인 인생을 값지게 하기 위해서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미술 속에 굴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펼쳐 나가는 작가주의”4)로 번안해서 제시하고 있는 만큼, 또 하나의 목표는 제도권의 흐름을 결코 답습하지 않는 ‘창의적 작가주의’에 연동된다. 
따라서 필자는 이 전시를 ‘대구 예술의 생태적 네트워크 조성 및 구축’ 및 ‘창의적 작가주의’라는 두 개의 범주 속에서 살펴보면서, 전시 주제의 의미와 출품작들의 작품 세계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고자 한다.  





I. 대구예술발전소의 양방향 목표와 ‘욜로’전의 양방향 프로젝트  
주지하듯이, 대구예술발전소의 첫 출발은 2008년 10월 정부의 ‘지역 근대 산업유산을 활용한 문화 예술 창작 벨트 조성 계획’의 지원 사업으로 선정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국내 산업 시대의 유산이었던 대구 중구 수창동 소재의 연초 제초장 별관 창고를 리모델링하여 낙후된 구도심 지역에 ‘예술 창조 공간’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애초의 기획 취지에 덧붙여 대구 미술인들의 희망 사항을 수렴하여 최근에 대구예술발전소가 대외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큰 방향성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험적 예술 창작 인프라 확충’이고 또 하나는 ‘창의적 작가 양성 기반 구축’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방향성은  《욜로》전의 기획 취지에서 우리가 추출하는 두 가지의 두 개의 범주, 즉 ‘대구 예술의 생태적 네트워크 조성 및 구축’과 ‘창의적 작가주의’와 차례로 연동된다고 하겠다. 논의의 한계가 있음에도 이 관계를 풀어보면 ‘실험적 예술 창작 인프라 확충 = 대구 예술의 생태적 네트워크 조성 및 구축’와 ‘창의적 작가 양성 기반 구축 = 창의적 작가주의 독려’로 얼추 정리될 수 있겠다. 
유념할 것은 전자에서 ‘창작 인프라(infra)’는 ‘창작 플랫폼(platform)’과 관계한다. 인프라가 ‘생산의 기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구조물’을 가리키는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의 줄임말이듯이, 창작 인프라는 ‘예술가들이 오가는 집결지’ 또는 ‘예술 창작의 기반으로서의 플랫폼’을 의미한다. 이 플랫폼으로부터 창작의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대구예술발전소라는 플랫폼을 중심에 둔 채, 시각미술가-예술가, 예술가-예술가, 예술가-관객, 예술가-예술행정가, 예술가-예술기관 사이의 만남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어 후자에서 ‘창의적 작가 양성 기반’이란 ‘창의적 작가주의’와 만나면서 개별 창작가들의 창의적 예술 생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독려함으로써 대구 지역 더 나아가 국내 예술 창작 활동을 활성화시키고 진작시키려는 목표를 달성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전자와 후자의 근본적인 목표는, 대구예술발전소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는 다음과 같은,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들과 상호 작용할 때 응당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것이다. 즉  ‘기성 작가를 위한 활발한 창작 활동 지원’, ‘신진 작가를 위한 창작 등용문으로서의 역할’, ‘시민의 참여와 시민 예술가 육성’과 같은 대상에 따른 세부적인 목표가 실천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창의적 작가주의를 독려하고 지원하는 ‘창작 인프라’ 또는 ‘창작 플랫폼’을 구축함으로써 ‘창조적 예술 활동과 문화산업의 연계’, 그리고 ‘새로운 실험과 융합의 장을 통한 문화 선도’와 같은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세부 목표 또한 조만간 성취해낼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II. ‘욜로’전의 예술 생태적 네트워크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전시는 2017년의 《대구예술생태보감》전의 연장선에서 비롯되었고 《2018대구예술생태조성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대구 예술의 생태’가 왜 ‘대구 예술의 생태적 네트워크’로 풀이되는지에 대한 우리의 자문자답을 성찰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전시의 주최 측은 왜 ‘예술의 환경’ 또는 ‘예술의 맥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하지 않고 ‘예술 생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논의에서 이 ‘예술 생태’라는 용어에 어떠한 이유로 ‘네트워크라’는 용어가 부가적으로 따라오는가? 
생태(生態, ecology)는 사전적 정의로 “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 식으로 간략히 정의되지만, 확장적인 정의로, “생물 집단 내 개체 간의 상호관계뿐만 아니라, 외부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지는 생물 집단의 생활상태’라는 의미를 함유한다. 더 나아가 이 생물 집단은 자연 집단으로부터 인간의 집단을 포함하게 되면서 자연의 내, 외부로부터 사회의 내, 외부 환경의 문제로 확장하면서 “자연과 문화의 상호침투의 흔적”5)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즉 생태라는 자연에 국한된 것이기 보다 자연-문화의 지속적인 교류의 문제로 확장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술에서 생태 담론이란 다분히 재귀적, 환경적, 사회적 활동을 도모’6)하는 것들로 확장된다.   
따라서 생태 담론은, 전문 이론가들에 따르면, “다양성의 복합적 연관성(a complex interrelationship of diversities)”7)으로서의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다양성의 생태학적 가치를 주목한다. 즉 생태담론은 “자연과 더불어 인간, 인간의 거주지와 같은 문화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것들이 관계의 다양한 시스템들과 무한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아이디어에 불가분적으로 연동시킨다.”8) 따라서 오늘날 생태 담론은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ity)와 교차학문성(transdisciplinarity)”9)으로 정리한다. 
이러한 인용들은 작년의 《대구예술생태보감》전과 《욜로》전이 표방하는 ‘대구 예술 생태 조성 프로젝트’와 우리의 논의인 ‘대구 예술의 생태적 네트워크’와 연동된다. 따라서 ‘예술 생태’는 예술을 중심으로 가능한 모든 학문의 제 영역뿐 아니라 예술 아닌 모든 것들과 네트워킹을 이룬다. 
먼저 《욜로》전의 전신 격인 작년의 《대구예술생태보감》전의 기획 취지를 살피면 이러한 네트워킹의 취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시는 “개별 작가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대구의 지형에 따라 방천시장, 북성로 일대, 대명동 아티스트, 테트라포드 연합 준비팀, 그룹 6·7 등으로 크게 나누고, 대구 지형에 빗댄 상상의 예술지도”10) 그리기를 시도했다. “대구예술발전소 전관을 빈 여백이나 캔버스, 텅 빈 공간으로 여겨, 그곳에서 작가들이 협업을 하며 고유한 예술지도를 형성해가는 협업과 놀이공간으로 만들고, 그 장소에서 여러 심성의 화학작용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구성된 전시”11)라는 것이 그 취지이다. 그러니까 협업을 키워드로 “장르 간, 동료 간의 벽을 넘어 시대의 상상력에 질문을 던지는 열린 형식의 전시'12)였던 셈이다.
한편, 《욜로》전도 다를 바 없다. 이 전시 또한 대구예술발전소 내외부의 예술 생태계와 네트워킹을 펼친다. 2013년 대구예술발전소 개관 이래 시작된 입주 작가 프로그램은 2018년 현재 8기에 이르고 있는데, 이들 중 9인의 작가를 선정해서, 대구예술발전소 입주 이후의 활동을 조망한다. 입주 프로그램을 거쳐 간 9인의 참여 작가들은 김승현(1기, 5기 참여), 김형철(1기 참여), 류은지(3기 참여), 박난주(5기 참여), 백수연(1기 참여), 서상희(4기 참여), 신경철(1기 참여), 심규리(4기 참여), 조규빈(1기 참여)이다. 이들은 한 때, 대구예술발전소 레지던시의 내부 구성원이었고 이제는 외부의 작가이지만 대구예술발전소 입장에서 이들은 여전히 가족처럼 인식되는 구성원들이다. 마치 본가에서 분가한 삼촌, 딸, 아들과 같은 가족으로서 말이다. 
또 다른 한편,  《욜로》전은 대구예술발전소 외부의 작가들을 초청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레지던시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지역에 연고를 둔 채, 확고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작가들뿐 아니라, 타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들을 함께 초대했다. “입주 작가의 활동이 동시대의 흐름과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지 보다 넓은 맥락에서 조명하기 위함”이었다. 구동수, 전지인, 김지아나, 이채은, 윤종주 총 5인의 작가들이 그들이다. 
여기에 덧붙여  《욜로》전은 특별히 <그때 2030> 섹션을 마련해서, 대구에서 70년대 후반부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해왔지만 현재는 행방불명이 된 작가 김기동(Kim, Ki-Dong)의 청년 시대(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의 미공개 작품들을 소개한다. 70-80년대의 한 청년 작가의 실험 정신이 오늘날 어떠한 시대정신으로 현 세대에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작가로서의 롤모델을 선보였던 대구 지역의 한 미술 선배들의 그간의 창작 활동에 경외와 찬사를 보냄과 동시에, 오늘을 사는 후배 세대로서의 남다른 각오를 스스로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시는 총 15인의 참여 작가(전 입주 작가 9인, 외부 작가 5인, 김기동 1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욜로》전 표방하는 네트워킹의 의미를 한층 더했다. 대구예술발전소 관계자의 다음과 같은 인터뷰는 그것을 반증한다. '앞으로도 입주작가 프로그램을 마친 작가들의 입주 이후의 후속 작업에 대한 점검과 소개, 타 지역 청년작가들과 교류, 세대 간 청년들의 열정과 역량의 비교를 통해 꿈틀대는 예술계 생태 네트워킹의 현장을 대구예술발전소에 펼쳐보이고자 한다.' 13)
올해의 《욜로》전은 작년의 《대구예술생태보감》전의 규모보다 다소 축소되었고, ‘협업, 놀이공간, 예술지도 그리기, 열린 형식’과 같은 다양한 키워들로부터 대구예술발전소 ‘레지던시 내, 외부 작가들의 네트워크’라는 키워드로 축약된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욜로》전에서 예술 생태 네트워킹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작년과는 다른 방향에서 ‘예술 생태’를 조성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즉 작년 전시가 공시적이고 수평적인 네트워킹을 시도했다고 한다면, 올해는 통시적인 관점에서의 네트워킹을 병행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예술 생태 조성 및 구축의 노력이 지극히 개인적인 ‘창의적 작가주의 개념’을 연동하는데서 발현되고 있다는 점에 있겠다.  


이채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2017.




III. ‘욜로’전의 창의적 작가주의 
우리는 이 글의 서두에서, 《욜로》전이 표방하는 “인생은 한 번뿐이야”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즉, 이 말에는 제도권에 편입하기 쉽지 않은 신진 세대들의 ‘자조 섞인 체념’과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에 대한 자기만족적 합리화’라는 부정적 시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예술발전소는 이것을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미술 속에 굴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펼쳐 나가는 작가주의”이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으로 치환해서 바라본다.  
우리는 간단히 그것을 ‘창의적 작가주의’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이것은 ‘예술 생태의 네트워크’를 개별적인 작가의 내, 외적 관계는 물론, 선후배 세대의 관계를 묻는 통시적 접근을 병행함으로서, 이전과는 다른 방향에서 시도된다. 특히 《욜로》전은 ‘창작의 과정을 살펴보는 프로그램’을 마련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창의적 작가주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하고 그것이 어떻게 ‘예술 생태의 네트워크’를 조성하는데 일조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입주 작가였던 백수연(Baek, Soo-Yeoun)의 〈라이브 드로잉(Live Drawing)〉(2018)이라는 이름의 퍼포먼스는 그 중 하나이다. 3월 24일, 4월에는 7일과 21일, 5월에는 5일과 12일 등 총 6회에 걸쳐 펼쳐진 이 퍼포먼스에는 백수연뿐 아니라, 전동진, 오영지, 유진규, 션 오 골만(Sean O’Gordmann poet, 캐나다) 등이 참여했다. 또한 흥미롭게도 부부 작가 있다(itta, 한국)와 마르키도(Marquido, 일본)는 그의 7세 아들인 라이(LAAI, 일본계 한국인)와 함께 이 퍼포먼스에 참여했다. 
무엇보다 이 퍼포먼스의 주인공은 백수연이었지만 6회의 퍼포먼스에 빠짐없이 콜라보로 참여한 전동진도 매우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공연장 가운데서 백수연이 물, 목탄 가루, 밀가루풀, 해초풀을 재료로 삼아 커다란 삼합 디아본 위에 검은 선을 지속적으로 그리는 중에, 한쪽 끝에서 전동진이 분필로 바닥에 연신 선을 긋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바닥에 분필 가루를 갈아내는 작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이 퍼포먼스는 이미지와 소리 그리고 그것의 생산과 소멸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 두 작가의 작업 모두 이미지 생산 속에 소리가 개입한다. 간헐적인 소음처럼 시작된 소리는 창작의 과정 속에서 균질한 소리로 변하고 그것은 이내 같은 진폭을 지니게 됨으로써, 결국 ‘소리 아닌 소리’로 소멸된 듯이 존재한다. 한편, 백수연의 검은 선을 그리는 ‘생산의 조형 행위’는 결국 짙은 혼돈의 검정 속으로 선이 사리지는 ‘소멸의 조형 행위’로 변주된다. 또한 전동진의 하얀 분필로 선을 긋는 ‘생산의 조형 행위’는 동시에 분필을 갈아내는 ‘소멸의 조형 행위’와 맞물린다. 
이처럼 이미지 속에 소리가 개입하고 이내 소멸하는 퍼포먼스 그리고 생산으로부터 소멸로 변주되고 생산과 소멸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관객은 예술 창작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묻고 성찰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한 화가가 캔버스에 물감을 올린 후 다시 모두 긁어내는 매우 비효율적인 생산 행위를 바라보면서 화면의 깊이를 탐구하는 일련의 ‘예술 창작’ 행위로 비로소 이해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라 하겠다. 
물론, 대다수의 관객이 ‘예술가’와 ‘그들의 창작 행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리의 예단은 무모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퍼포먼스는 관객으로 하여금 예술 창작과 예술가의 작가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도모하는 장치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백수연, 〈Line...and the Sound 'Living Drawing〉, 2018.

또 다른 작가 구동수(Koo, Dong-Soo)의 라틴어로 작명된 작품 〈변화(conversio)〉(2018)도 흥미롭다. 그는 미술과 건축 디자인을 전공하고 미술, 무대미술, 건축, 인테리어 등 다양한 장에서 활동해 왔던 경험을 이번 출품작에 녹여내었다. 높이가 사람 상반신에 육박하는 크기의 삼각기둥 형태의 무수한 사면체 오브제들이 전시장 바닥에 4열로 놓여 있는데 관객은 그 사이를 배회하듯이 움직이면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나아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작품을 이리저리 옮겨 볼 수도 있다. 관객과 상호작용을 염두에 둔 설치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장유경무용단’의 창작 무용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미술을 통해서 표현한 경험이 녹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러 무용수에 의해 작품이 이리 저리 옮겨지고 원래의 질서가 재구축되는 과정에 대한 경험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전시 중 무용수에 의한 퍼포먼스가 펼쳐지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퍼포먼스를 통해서 작품의 개별체들이 이동하고 중첩된다고 할지라도, 마치 리좀(Rhizome)의 메타포처럼 보이지 않는 ‘연성의 선들’에 의해서 연결되어, 작품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우리의 논의인 ‘창의적 작가주의’가 왜 네트워크를 통해서 보다 더 공고해지고 활성화될 수 있는지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구동수, 〈변형_Coversion〉, 합판, 고무줄, 가변 크기, 2018.



IV. 창의적 작가주의와 창의성의 전후  
주지하듯이, 예술가의 ‘창작 행위’와 ‘작가주의’는 ‘창의성’으로부터 근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창의적 작가주의’를 설명하는 이 대목에서 이 창의성(創意性, creativity)이라는 것이 독창성(獨創性, originality)으로부터 출발해서 변화해 온 개념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각해 보라! 창의성은 순수의 미술 개념이 생성된 르네상스 이후 20세기 이전까지는 천재를 중심으로 한 독창성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14) 18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독창성’이란 용어는 '어느 것과도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고 특별하고도 흥미로운 질적 가치'를 의미해 왔다. 이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에 천재와 같은 ‘뛰어난 개인의 예술가가 지닌 창조적 특징’으로 이해되면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치는 예술가’ 즉 ‘독창적 예술가’의 개념을 잉태시켰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독창성을 더 나아가 예술적 천재의 개념과 연동되는 것으로 바라보았고15) 헤겔(G. W. Friedrich Hegel, 1770-1831) 또한 독창성을 ‘천재의 영감’과 관련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만약 예술의 독창성이 사소한 모든 특징을 삼켜버린다면, 그것은 예술가가 ‘천재적 영감의 도약(l'élan de son inspiration de génie)’을 온전히 추종하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6) 따라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천재성과 객관성의 두 차원이 결합된 것’이다.17) 이러한 차원에서 독창성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이라는 두 범주를 모두 포함하면서 미학의 주요 개념으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즉 독창성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천재적 예술가’ 외에도 ‘천재적 예술가의 유일한 진짜 작품’으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즉 예술 작품의 유일성(唯一性, Uniqueness ,) 원본성(原本性, originality), 진품성(眞品性, authenticity)의 의미가 주요하게 대두된 것이다.  
독창성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을 주창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면서 20세기 미술운동의 주요 모토로 자리 잡게 되었고, 점차 ‘독창성(originality)’은 ‘창의성(creativity)’의 개념으로 변형, 확장된 채 이해되어 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의 극작가인 T. S. 엘리엇(T. S. Eliot, 1888~1965)의 견해처럼, 독창성이란 더 이상 한 개인의 천재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에게서 독창성이란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예술’로서가 아닌 통시적 역사와 공시적 맥락 속에서 ‘상속 받은 자신의 능력이나 천재를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18)
모방과 재현을 거부하는 인상주의로부터 촉발된 20세기의 미술은 늘 그룹 차원에서 새로움을 찾아 야수주의, 입체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집단의 미술운동의 차원에서 독창성이 재편되었다. 20세기 이후 ‘재편되는 독창성’은 이전 미술 운동과는 선을 긋고 새로운 예술, 새로운 미술 운동을 모색하는 ‘집단적 독창성’이었다. 20세기가 열어젖힌 이러한 미술 창작 태도는 천재와 같은 예술가의 개념을 탈각시키고 새로운 유형의 미술을 추구하는 예술적 태도를 의미하게 되면서 '독창성'의 개념으로부터 '창의성'의 개념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한다.19)
특히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의 헤게모니가 이전된 1945년 이후, 추상표현주의의 ‘집단적 독창성’ 찾기의 시대가 끝나고, 대중문화가 팽배해졌던 1960년대 이후로 특정되는 20세기 중반의 팝아트 이후에는 그린버그의 주장처럼, 더 이상의 새로운 것도 “더 이상의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20)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제 ‘집단적 독창성’의 개념은 ‘일반적인 창의성’의 개념으로 이해하기에 이른다. 
독창성이 지닌 원본성 개념은 20세기 이래 판화, 캐스팅에 의한 조각, 디지털 아트 등 에디션을 전제로 한 일명 에디션 아트가 확산된 지 오래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러한 오늘날 상황을 일찍이 사진과 필름을 예로 들면서, 독창성(originality)과 유일성(uniqueness)의 개념을 훼손하는 상황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21) 그는 '가짜(fake)' 또는 '사본(copy)'이 '독창적인(original)' 그리고 '진품의(authentic)' 미술 작품을 대신하는 ‘기계 복제의 시대의 예술 작품’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다.22)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지칭하는 “텍스트란 인용들의 짜임”23)이라고 했는데, 그런 만큼, 오늘날 언어나 예술의 세계에서 독창성이란 의미의 오리지널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독창성은 이제 패러디, 혼성모방의 경우처럼, 타자의 것들을 인용하고 그것을 변형, 재편해서 이전 것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는 노력들로 이어지게 된다. 즉 ‘독창성’의 개념은 이제 ‘보편적 창의성’의 개념으로 확장되어 온 것이다. 
달리 말해,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사에서 창의성은 이제 더 이상 ‘독자적 예술가의 독창성’뿐 아니라 ‘집단적 독창성’의 개념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창의성은 이제 독창성이란 용어의 성을 허물고 재편된다. 경계를 허물고 경계 너머의 것들과 서로 통합하고 융합하는 최근의 통섭의 논리 속에서24) 기존을 것들을 새롭게 재편하는 패러디와 혼성모방과 같은 것들로 변형되는 오늘날 미술에도 ‘창의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재편되는 새로움과 다시 써지는 새로움을 지향하는 창의성, 즉 ‘재편되는 창의성’의 개념을 만든다. 
오늘날에는, 시대를 구분하는 거시적 담론으로서의 새로움과 그것을 지탱케 하는 ‘독자적 예술가의 독창성’이나 ‘집단적 독창성’으로서의 창의성은 소멸되었다. 다만, 개별 예술가들에 대한 미시적 담론으로서의 새로움과 그것의 가치를 의미하거나, 예술 교육의 주요 가치로 간주되는 ‘보편적 창의성’ 혹은 ‘재편되는 창의성’으로 존재할 따름이다.25) 


김형철, 〈Buy the Sun〉, 4분, 2018.


김지아나, 〈Black in side Black〉, 2018, 




V. ‘욜로’전의 출품작 분석 
《욜로》전의 참여 작가들이 선보이는 ‘창의성’ 혹은 ‘창의적 작가주의’ 또한 위의 논의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할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일상 언어에서 독창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개념적으로는 ‘보편적 창의성’ 혹은 ‘재편되는 창의성’으로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III장에서 ‘욜로’전의 창의적 작가주의의 사례로 이미 소개했던 백수연, 구동수를 포함해서 총 15인의 출품작들을 여기서 새로운 범주로 구분하여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즉 《욜로》전의 엽서나 리플릿에서 ‘가나다순’으로 소개되고 있는 참여 작가 목록을 여기서는 출품작들의 조형 언어적 특성에 따라 4가지 범주로 간략히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욜로’전의 출품작 분석 

위의 도표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욜로》전의 참여 작가들의 출품작에 대한 분석은 대략적이다. 더욱이 15인의 참여 작가들의 위상이 위의 도표에서 나눈 범주화와 공통 키워드 그리고 작품 설명에 부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작품 설명 역시 모두 적합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출품 작품에 관한 필자 나름의 객관적인 분석을 제기하려고 ‘1. 개념적 회화, 2. 혼성적 회화, 3. 연극적 설치와 내러티브, 4. 영상 설치’와 같은 범주화를 시도하였다. 또한 각 범주화에 따른 공통 키워드는 논의의 한계가 있으나 출품 작가들이 공유하는 일반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1. 개념적 회화’의 범주 안에서 언급하고 있는 ‘회화/물성, 회화/노동, 집적/흔적, 선/이미지...’와 같은 공통의 키워드는 ‘창의적 작가주의’나 ‘창의성’의 개념과는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욜로》전이 표방하고 있는 ‘대구 예술의 생태적 네트워크’와 ‘창의적 작가주의’와 관련된 담론에서 건져낼 수 있는 개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을 우리는 ‘창발성’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그 가능성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채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2017.



서상희, 〈가상정원〉,, 식물, 폴리카보네이트, 가변 크기, 2017



VI. 에필로그: 창발성의 네트워크를 지향하며  
창발성(emergent properties, 創發性)(Forester, 1998)’은 우리가 논구해 온 ‘재편되는 창의성’, ‘창의적 작가주의’와 연동된다. 창발성이란 용어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영국에서 활동한 브로드(C. D. Broad)와 사무엘 알렉산더(Samuel Alexander)와 같은 창발론자들로부터 기원한다.26) 국내에선 1990년도 전후부터 생태학과 인지과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후에 사회학에 도입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창발성은 ‘불시에 솟아나는 특성(emergent property)’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창발이란 ‘원초적이고 높은 수준의 인과적 상호작용이 기초적 하위층위가 아닌 다른 층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즉 ‘하위 층위의 개별 요소에서는 특성이 별반 없던 것이 집단을 이루면서 상위 층위의 전체 구조에서 폭발적으로 어떠한 현상을 발생시키는 것’을 지칭한다.27) 이때 개별 요소들로 구성된 복잡한 전체 구조는 ‘개별 요소들의 합 이상의 존재’로 드러난다. 가히 폭발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창발성으로 인해 복잡성이 늘어나는 각 층위는 고유한 법칙을 지니면서 그 속성은 하위 층위로 환원되지 않는다. 즉 창발성이란 존재론적 측면에서 하위 층위가 아닌 층위에서 발생하고, 그 자체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면서 그것이 근본적인 하위 층위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 ‘환원 불가능성(irreducibility)’을 그 특징으로 한다.28) 
이러한 논의에 근거할 때, 대구예술발전소를 플랫폼으로 한 ‘생태적 네트워크로서의 창의성’은 이러한 창발성을 기조로 한 채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힘이 아니라 여럿의 힘, 네트워크로서의 힘이 그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창발성을 견지하게 될 때, 비로소 지극히 개인적인 ‘작가주의적 창의성’ 역시 발현되기에 수월할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러한 창발성에 대한 예들은 예술 현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무수히 많다. 물의 경우처럼 원자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성질이 분자의 단계로 통합되면서 나타나는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개미나, 꿀벌이 개체 수준에서 보이지 않던 역동성을 집단성으로 확장되면서 드러내는 현상도 창발성과 관계한다.29) 개미탑을 쌓거나 벽을 허물수도 있는 집단의 힘, 그것은 개체 단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더욱이 그 창발성의 정도나 규모 역시 가늠할 수 없다. 
이러한 창발성은, 대구예술발전소를 중심으로 한 ‘예술생태적 네트워크’의 값진 보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지역 미술의 네트워크가 창출하는 선뜻 예측할 수 없는 창발성의 위력이 대구예술발전소를 중심으로 만개하길 기대한다. 
‘독자적 예술가의 독창성’이나 ‘집단적 독창성’으로서의 창의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대 미술의 세계에서 ‘창의적 작가주의’를 모든 작가에게 일일이 따져 묻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개별 작가들에 대한 창작 세계를 미시적인 비평의 눈으로 평가하는 어렵지만 의미 있는 노력들이 주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관건이라면, 대구예술발전소라는 플랫폼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창의성’과 ‘창의적 작가주의’에 대해서 논의할 때, 이제는 ‘개별적 창의성’으로부터 네트워크로서의 집단적 창의성 즉 ‘창발성’의 효력을 기대할 일이다. 그것이 어떤 파급력으로 생산되고 지속될 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다만 대구예술발전소 내, 외부에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여러 구성원들의 부단한 노력들이 힘을 합해 파급력 있는 ‘창발성’으로 생산되길 기대할 일이다. ●

***주석 생략

출전/
김성호, 「‘욜로’의 양방향 아트프로젝트 - 생태적 네트워크와 창의적 작가주의」 , 『욜로, 오- 작가여』 전시 카탈로그, 2018, pp. 2-15. 
《욜로, 오 - 작가여!》전 (2018. 3. 13-5. 13, 대구예술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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