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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박태화 / 포스트 단색화로 탐구하는 ‘관계와 만남의 미시적 서사’

김성호

포스트 단색화로 탐구하는 ‘관계와 만남의 미시적 서사’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추상은 어렵다. 이 ‘어려움’이란, 추상의 창작을 권유하던 모더니즘 시대에서는 대개 ‘감상에서의 난해함’을 가리키지만, 21세기 동시대의 추상에 있어서는 ‘창작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데 할애된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추상의 조형 언어가 나올 것이 이미 다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새로운 추상’을 위한 ‘다른 조형 태도’를 견지하려고 애쓰고, 또 다른 이는 ‘낯선 추상’을 위해 또 다른 질료와 미디어를 찾아 ‘새로운 조형 언어’로 변화를 시도하지만, 그 조형 세계의 뿌리는 대개 20세기 추상의 거장들이 만들어 놓은 그늘 안에 포섭되기 십상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성서의 빛바랜 아포리즘은 오늘날에도 빛을 발한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많은 미술가들이 추상의 언어에 천착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추상미술은 여전히 건재하는가? 


Relationship-사랑, 91 × 116.2cm, Mixed media on canvas, 2018 


I. 다원주의 추상 이후 포스트 단색화의 이념 
작가 박태화는 추상회화에 골몰한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추상의 가치가 살아 있고, 이전과는 다른 추상의 매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추상 종말의 시대에 추상에 매진하고 회화 종말의 시대에 회화에 천착하는 작가들은 이전의 추상과 이전의 회화와는 다른 지점에서 조형 실험을 거듭하면서 ‘천형(天刑)과도 같은 심대한 창작의 고통’과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창작의 희열’을 오간다. 작가 박태화의 창작 세계에서 양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박태화의 작업은 외형상 ‘포스트 단색화(Post Dansaekhwa)’류의 작품처럼 보인다. 단색의 물감과 한지의 어우러짐, 미세한 선의 변주로 드러내는 마티에르, 반복적인 요철로 이루어진 균질적인 물성, 물질 이면에 드러내는 비물질의 정신성, 채움과 비움의 조형 언어, 반복과 수행의 창작 과정, 화면 속 내재율과 관계의 미학 등 그녀의 작품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1970년대의 한국적 모노크롬 페인팅의 전통적 미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당시의 화풍을 단색화로 지칭하고 이러한 미학을 계승하는 오늘날 50-60대의 작가들을 포스트 단색화로 지칭하는 일이 빈번해지는 상황 속에서 그녀의 작품을 ‘포스트 단색화’로 지칭하는데 있어 무리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그녀의 작품이 일련의 ‘포스트 단색화’ 작가들과 공유하는 지점이 무엇이며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 한국 단색화의 통시적 상황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박태화의 작품이 현재 위치하고 있는 ‘다원주의 추상 이후 포스트 단색화’의 이념이 무엇인지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1950년대 예술을 매체의 특성으로 결정하는 변별의 기준을 만들고, 이것을 준수하는 추상표현주의 경향의 미술을 '비대중적 아방가르드(non-popular avant-garde)' 또는 ‘좋은 미술’로 지칭하고 매체의 특성을 배반하는 비추상 계열의 미술을 ‘대중적 아방가르드(Popular avant-garde)’ 혹은 ‘나쁜 미술’로 치부하던 ‘형식주의 비평’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1960년대 일본의 모노파(物派)나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 전통의 추상은 회화의 비물리적 속성인 정신의 세계에 보다 더 집중하면서 서구가 아닌 동양이 주도하는 추상미술을 새로 쓰고자 했다. 당시의 한국적 추상은 서구 모더니즘의 추상 형식을 물려받으면서도 내용은 전혀 다른 한국 전통의 미감이나 내적인 존재 의식 탐구에 골몰하면서 추상의 끈을 잇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단색화라는 것이 1950년대 말-60년대의 앵포르멜 회화를 실험하던 젊은 아방가르디스트들이 1970년대 탈앵포르멜을 외치면서 ‘자기 변신’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아서라! ‘자기 배반’과 ‘자기 변신’의 시대도 이제 저물고,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추상미술은 바야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중문화와 키치의 영향으로, 탈(脫)장르, 탈엘리트 미술, 탈이데올로기의 미술을 표방한다. 오늘날에는 ‘전위미술=추상미술=모더니즘=실험미술이라는 등식’을 거부하면서 형식과 내용도 제각각인 이른바 ‘다원주의 추상’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다원주의 시대에는 ‘새로운 장르의 미술’을 찾는 집단적 실험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미시적 세계로 천착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 단색화’는 한편으로는 1970년대 단색화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을 지속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 추상 운동과는 달리 지극히 개별적인 추상을 실천하겠다는 ‘결별’의 의지마저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좌) Relationship-핑크빛 인연, 162.5 × 130cm, Mixed media on canvas, 2018 
(우) Relations–연꽃 만나는 바람같이, 162.5 × 130cm,  Mixed media on canvas, 2018

II. 만남의 관계와 시지각의 조형 심리 
박태화의 '포스트 단색화'에 이르는 통시적 변화는 그녀의 작업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맥락이 된다. 20세기 미술이 늘 모색했던 ‘새로운 것(new things)’은 오늘날 더 이상 미술에서의 독창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익히 알려진 조형 언어를 가지고서라도 얼마나 진솔한 작업을 펼치는가에 따라 좋은 작품, 좋은 작가로 평가받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미술의 언어를 바꾸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도 미술가들은 회화, 추상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내팽개치지 않는다. 더욱이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의 ‘다원주의 추상’이란 형식의 파격이나 새 것이 아닌 개별 작가의 ‘미시적 세계 탐구’와 같은 내용의 진정성을 요청한다. 
박태화는 비교적 익숙한 추상의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독특한 자신의 조형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해 나간다. 그 하나는 바로 ‘만남의 관계와 시지각의 조형 심리’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의식이다. 외형적으로도 작품 속에서 이러한 주제의식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두 개의 패널이 하나의 몸을 이룬 채, 회화의 장(場)을 확장하는 ‘쉐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가 대표적이다. 각 패널의 세로면 한쪽 끝에 자리한 화려한 색색의 추상 이미지들은 두 패널이 결합하는 ‘세로면의 좌우 접촉 지대’에서 ‘살짝 어긋나게’ 부딪힘으로써 이러한 ‘만남의 관계’를 조형적으로 더욱 명징하게 만든다. 또한 다수의 정방형 캔버스를 격자무늬로 모은 사각형의 ‘멀티플 작품’(multiple art)은 각 모나드(monad)를 모아 하나의 모듈(module)로 만들면서 ‘만남의 관계’라는 메시지를 조형적으로 뚜렷하게 전한다. 화면의 내부에서도 이러한 만남의 관계라는 화두는 읽힌다. 몇 개의 커다란 동심원들이 퍼져나가면서 각자의 파동과 서로 만나는 형상을 추상화한 평면 작품들은 마치 물결이나 소리라는 비언어가 서로 만나는 거대한 에너지의 울림처럼 보인다. 
이처럼, 박태화의 작품에서 모나드와 모나드, 모나드와 모듈이 서로 만나 창출하는 조형의 하모니는 ‘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의 게스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의 관점을 계승한 아른하임(Rudolf Arnheim, 1904-2007)의 ‘좋은 형상(Good Gestalt)’의 모델처럼 간주될 수 있다. 즉 그녀의 작업은, 복잡한 이미지를 요약하는 ‘단순화 (Simplicity)’, 이미지를 전체로 지각하는 ‘완결성(Closure)’, 근접한 것과 유사한 것들을 공동 범주화하는 ‘집단화(Grouping)’, 그리고 이미지를 주요소와 부차적인 요소로 나누는 ‘형상과 배경(Figure & Background)’과 같은 게스탈트 법칙을 통해서 “요소들의 조합을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상으로 종합”하기 때문이다. 
박태화의 추상회화에서 나타나는 모나드로 칭할 만한 요소들은 많다. 선, 면, 입체(요철의 마티에르가 만드는 부조)가 그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화면 속에 숨어 있는 1차원으로서의 ‘선(곡선과 직선)’은 작업의 출발점이자, 궁극의 조형적 정수가 된다. 미디엄과 물감을 섞은 ‘회화의 질료’를 마르기 전까지 캔버스 위에 끌고 다니며 긋고, 밀치는 과정에서 그녀의 ‘선’은 그려진다. 즉 물감 층을 작은 스쿼시로 밀어내면서 비워지는 공간의 물감들이 옆으로 쌓이면서 만들어진 ‘요철(凹凸)’, 더 정확히는 ‘철’의 흔적이 바로 ‘선’인 것이다. 비움의 행위가 만들어내는 채움의 미학이 그곳에 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바탕 위에서 바탕과 구분되면서 그려지는 선’과 달리 그녀의 작업에서 ‘선’이란 처음부터 ‘바탕 위에서 바탕과 한 덩어리로 움직이다가 최종적으로 바탕으로부터 분화되는 것’이다. 박태화의 회화에서 선이 가지는 주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선이 중첩되면서 만드는 2차원적 ‘면(원, 반원, 삼각, 사각)’의 형태도 그녀의 회화에서 주요한 모나드이다. 
박태화의 회화에서 직선과 곡선의 반복적 집적을 통해서 화면을 패턴화하는 경향은 ‘형상과 배경’의 문제를 쉽게 해소할 뿐만 아니라 ‘단순화, 완결성, 집단화’와 같은 게스탈트 심리학과 아른하임의 지각의 심리학의 과제를 어렵지 않게 실천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전체의 작품은 하나의 ‘의미 있는 덩어리’ 혹은 ‘조직된 덩어리’가 되는 셈이다. 
 

Relationship-소통하는 세상, 260 × 194cm, Mixed media on canvas, 2018


III. 관계와 만남의 미시적 서사 
한편, 박태화의 작업에서 주요한 지점은, 이러한 단순한 형식에 지각적 심리학의 문제만 연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만남에 관한 성찰의 메시지’를 숨겨두는 일이다. 이것은 그녀의 작업을 여타의 ‘포스트 단색화’의 조형적 공통분모로부터 이탈시켜 ‘박태화의 추상회화’로 자리매김하는 지점이다. 
그녀는 관계와 만남에 관한 체험적 내러티브를 추상미술의 형식 안에 녹인다. 그녀의 작업노트를 보자: “내 작업의 반복적인 ‘선’은 사람과 사물, 자연에서의 / 관계성을 이야기하지만  수직과 수평이 수없이 교차하면서 / 만나서 공간을 이루고 / 그 만남은 또 ‘인연’을 말한다. 작가의 의도적인 표현과 우연의 효과가 맞물려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 수없이 비워내고 채워지는 반복성은 자아 성찰의 과정이며 / 결국, ‘단색화’로 ‘채움과 비움의 미학’을 깨닫게 한다.” (박태화, 작가노트, 2018)
그녀의 주제의식이란 ‘관계와 만남의 미시적 서사’라는 화두가 그것이다. 남자/여자, 친구/애인, 선생/제자, 시모/며느리 등과 같은 무수한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것이 야기한 만남/이별, 해후/별리와 같은 일들이 그녀의 추상회화 속에서 복합적으로 꿈틀댄다. 아울러 타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애정/애증, 시샘/시기, 경쟁/갈등과 같은 분별하기 어려운 감정뿐 아니라 비교적 분명한 감정이 이끄는 ‘희로애락’의 삶 또한 그녀의 작품 속에 담긴다. 박태화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은 그녀의 비언어로서의 말없는 회화가 실상 무수한 메시지를 지닌 언어적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박태화의 작품이 시도하는 비언어적 소통(nonverbal communication)에 몰입하는 관객이 감정이입하면서 얻게 되는 언어적 소통(verbal communication)의 효과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만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모호할 수밖에 없는 추상 이미지에 캡션이란 언어 장치를 통해 최소한의 작품의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관계(Relationship)’라는 제목 아래 하이픈으로 연결된 ‘도시(city), 공간I, 공간II, 대칭적 조화’와 같은 소제목을 달거나 ‘삶의 흔적, 소통하는 세상, 핑크빛 인연, 연꽃 만나는 바람같이, 사랑’과 같은 또 다른 소제목을 달아놓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제명은 바르트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미지의 다의성을 고정(ancrage)하거나 중계(relais)하는 텍스트의 역할’로서 고려된 것이다. 즉 바르트는 모든 이미지의 기의는 ‘떠도는 사슬고리(une chain flottante)’처럼 다의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의 의미의 유동성을 안정시킬 장치가 필요한데 바로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작품 밑에 붙어 있는 캡션은 이미지라는 기표에 대한 적절한 기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가 된다. 
관객은 작가 박태화가 마련한 이러한 ‘이미지와 텍스트’라는 두 장치를 통해서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격자무늬로 가득한 작품은 제목처럼 ‘공간’에 대한 관심에 다름 아니며, 황금빛이 방사형 문양으로 가득한 작품 ‘소통하는 세상’ 앞에서는 타자와의 소통의 문제에 대한 관심임을 알게 된다. 또한 관객은 크고 작은 동심원들이 만나는 작품 앞에서 자신이 했던/하고 있는 ‘누군가와의 사랑’에 대한 감정을 떠올리거나, 커다란 반원의 부분이 클로즈업된 핑크빛 작품 앞에서는 ‘누군가와 로맨스를 펼쳤던 핑크빛 인연’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커다란 반원이 대각선으로 누운 직선들과 서로 만나는 하늘색 가득한 작품 앞에서는 ‘연꽃 만나는 바람같이’라는 서정주 시인의 시 제목처럼 지나간 인연에 대한 아쉬움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뿐인가? 두 개의 패널이 긴장감 있게 마주하고 있는 앞에서 스스로의 고단한 직장 내의 삶을 상기해 보거나, 커다란 동심원이 화폭에 자리한 모노크롬 앞에서 자신의 화목한 가정의 일상을 상기해 볼 수도 있다. 작가 박태화가 추상의 언어 속에 숨겨둔 개인의 내밀하고도 미시적인 내러티브가 ‘이미지와 텍스트의 만남’을 통해서 관객에게 자신의 미시적 서사로 소환되는 까닭이다. 
한편 작가 박태화는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조형적 전략으로 추상적 이미지 안에 이러한 메시지를 함유한 상징 장치를 곳곳에 마련했다. 예를 들어 그녀의 작품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실은 색채도 이러한 장치이다. 그리고 단순한 도형은 사물과 개념의 정수만을 추출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또한 작품에서 자주 선보이는 ‘원형’은 사회적 공동체, 마을 소집단, 반복, 순환되는 일상과 같은 의미를 중복적으로 암시한다. 그런 면에서 밑바탕의 화려한 색상들이 엿보이게 한 ‘비워진 원형의 중심’은 그것의 핵(核)이다. 한편 ‘중첩’은 일련의 이미지의 반복이 다른 반복과 겹칠 때 발생한다. 이것은 이미지들 사이의 뚜렷한 병치를 피하는 방식으로, 다 내부/외부, 위/아래, 동적/정적인 상태의 심리적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작품 속 화면의 깊이를 강조하고, 형식에 침투한 언어적 메시지를 풍성하게 만드는 계기를 이루기도 한다. 


Relationship-대칭적 조화, 162.5 × 260cm, Mixed media on canvas, 2018



IV. 에필로그
박태화는 포스트 단색화의 유형으로 만남과 관계의 미학을 탐구한다. 관객과의 관계와 소통의 차원에서 ‘지각’, ‘인식’은 여전히 논의를 지속해야 될 화두이다. 아른하임의 지각을 넘어서는 지점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의 지각론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봄(seeing, vision)’과 ‘지각(perception)’의 유일한 주체가 아니다. 그 주체는 자연이거나 사물이기도 하다. 퐁티의 철학에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서로 역전하여, 누가 보는지 누가 보이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처럼 지각의 주체는 신체이며 그것은 ‘인간의 살(la chair)’이자 ‘사물들의 살’이기도 하다는 퐁티의 주장은 ‘작가-작품-관객’ 그리고 ‘텍스트-이미지’ 사이의 만남과 관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박태화는 다른 추상을 기대한다. 그녀의 추상회화가 지향하는 궁극 지점이란 물질만 덜렁 남는 평면성의 매체적 속성에 집착하는 서구의 추상과 달리, 재료의 새로운 조형적 탐구에 집중하면서 포스트 단색화의 시장성을 개척하는 일군의 추상작가들과 달리, 형식 안에 내용을 담는데 충실하고자 한다. 그 내용이란 관계와 만남에 대한 성찰을 언어화하고 추상의 언어 속에서 미시적 서사를 투영하면서 그것을 미학적으로 성찰하는 ‘의식이 현현하는 추상’이라 부름직하다.  ●



서문 /

김성호, 「포스트 단색화로 탐구하는 관계와 만남의 미시적 서사」, 전시 카탈로그, (박태화 전, 2018, 10. 8-12, G아르체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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