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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황혜정展 / 끝없는 숨바꼭질

김성호

끝없는 숨바꼭질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I. 프롤로그 
드로잉, 페인팅, 만들어진 오브제와 설치가 오가는 작가 황혜정의 작업은 그간 주체와 타자, 욕망의 드러냄과 감춤, 아름다운 것과 이상한 것 등 경계 사이에 함유된 문제의식을 작품화하는데 골몰해 왔다. 그것은 다양한 제목의 시리즈 작품들로 선보여 왔다. 영어로만 표기된 그녀의 작품 제목을 한글과 병행해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위안(solace)〉(2014~ ), 〈결핍(absence)〉(2014~ ), 〈무의식의 것들(things of the unconscious)〉(2016- ), 〈반항아(rebellious child)〉(2017~ ), 〈모호한 경계들〈ambiguous lines)〉(2017~ ), 〈도피(an escape)〉(2018~ ), 〈숨바꼭질(hide and seek)〉(2018~ ), 〈같이 꼭; 콩팥(kidney)〉(2018~ ), 〈쉼(a rest)〉(2018~ ). 
작가 황혜정이 이번 개인전에서 내세운 주제는 ‘숨바꼭질(Hide and Seek)'이다. 하나의 시리즈 작품이 개인전의 전면에 나서면서 다수의 신작들이 출품되었다. 이 주제는 기존에 발표된 다른 시리즈 작품들에도 적용될 만큼, 그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된다. 이 글은 ’숨바꼭질‘이라는 주제가 그녀의 작품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듬어 보면서 그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것을 위해서 이번 개인전의 주제인 ’숨바꼭질‘을 중심으로 논의의 순차적인 소제목들을 배열하고 최근작과 이전 시리즈의 작품들을 오가면서 작가 황혜정의 전반적인 작품 세계를 살펴본다.        


ambiguous lines,2128x1000(mm),pencil on paper,2017



II. 숨바꼭질의 심리  
그녀의 개인전에는 다음과 같은 익숙한 노래 소리가 주문처럼 일렁인다. 
“꼭꼭 숨어라. / 머리카락 보일라(인다). / 꼭꼭 숨어라...” 
숨바꼭질! 그것은 어린 시절, 모두가 해보았을 흥미진진한 놀이이다. 그것은 한 주체가 자기 생존을 위한 전략을 배우고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는 훈련을 거듭하는 ‘자가 학습의 장’이자, 주체가 ‘타자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사회화의 장’이었다. 그것은 주체와 타자를 나누고 타자를 대상화하는 훈련을 거듭하는 ‘술래잡기’를 변주하는 한판의 게임이자, 타자와의 만남을 제도화하는 성인의 역할극을 미리 체험해 보는 ‘소꿉장난’의 변형된 가상극(假想劇)이기도 하다. 혹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주문을 수십 번 외쳐도 귀신처럼 스멀스멀 다가오는 타자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거듭하는 ‘귀신 놀이’에 대한 예행연습이기도 하다.  
작가 황혜정은 숨바꼭질이 함유한 이 엄청난 사회학적 담론의 무게 속에서 자신의 몸을 숨기기보다 먼저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숨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숨바꼭질에서 머리카락은 숨겨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숨바꼭질〉 시리즈 작품들에는 커다란 털옷 속으로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인물들과 마치 ‘동물로 위장된 것’처럼 온몸에 털이 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작품 〈모호한 경계들〉에서는 물론이고, 〈무의식의 것들〉이나 〈도피〉의 경우처럼, 다른 시리즈 작품들에서도 이처럼 유사한 양상은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렇다! 술래로부터 도망가 몸을 숨길 곳은 두 범주 속에서 도처에 뿌려져 있다. 하나는 은폐물이며 또 하나는 위장물이다. 전자는 대개 건물이거나 몸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사물들이며, 후자는 자신의 몸뚱이를 가리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주변의 상황과 유사하게 스스로를 몸을 위장하는 사물들이다.  
그것이 은폐물이든 위장물이든, 숨는 자에게는 피난의 안식을 제공한다. 그것은 원시 시대 유목민들이 비바람이나 추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풀이나 동굴에서 찾던 피난처로서의 ‘셸터(shelter)’로 훌륭히 기능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셸터의 공간은 임시 거주자에게 또 다른 감각을 불러온다. 사회의 모든 맥락으로부터 이격된 듯한 강렬한 소외감, 폐쇄된 공간으로부터 서서히 밀려오는 폐쇄공포증, 더불어 언제 발각될 것인지를 모르는 두려움과 증폭되는 불안감을 안겨 주는 것이다. 숨바꼭질의 놀이 안에는 이와 같은 이질적 심리학과 사회학이 자리한다. ‘편안/압박’을 오가는 심리학의 질병의 각종 증후군(症候群)이, ‘도주/체포’, ‘은폐/고발’과 연관된 사회학적 담론이 공존하는 것이다. 



Ambiguous lines, mixed media, 700x1000(mm),2018



III. 숨바꼭질에 거하는 정서적 양가성 
숨바꼭질에서 우리는 ‘양가성(ambivalence)의 공존’을 발견한다. ‘양가성’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동시적으로 상반되는 반응, 감정을 갖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긍정적, 부정적 가치를 지닌 어떤 것, 누군가를 향한 혼종의 태도를 취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인 브로일러(E. Bleuler)의 연구에 기대어 볼 때, 숨바꼭질이 드러내는 대표적인 양가성은 ‘정서적(emotional) 양가성’으로 고찰된다. 물론 이것은 블로일러가 언급하는 3가지 양가성의 다른 차원인 ‘의지적(volitional) 양가성’과 ‘지적(intellectual) 양가성’과 연동되어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숨바꼭질은, 도망자의 도피/체포와 같은 이중적 욕망과 도피처에서의 편안함/압박감과 같은 양가적 감성이 혼종되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정서적 양가성’과 먼저 관계한다. 프로이트(S. Freud) 식으로 말해, 그것은 자기 보존과 성적 충동을 포함하는 ‘삶의 본능인 에로스(Eros)’와 공격적인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Thanatos)’와 맞물린 상태와 유사하다. 정서적 양가성은 또한 ‘가학적인 사디즘’과 ‘피학적인 마조히즘’ 그리고 ‘금기와 욕망’이 공동으로 작동하면서 ‘양가적인 것의 공존’을 견인한다. 
이러한 정서적 양가성은 황혜정이 언급하는 “숨막히는 편안함” 혹은 “온몸을 짓누르는 육중한 안정감”이란 어절에서 발현되는 무엇이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면, 조금의 틈새도 없이 얼굴 전체에 압박되는 숨막히는 편안함. 두툼한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면, 온몸을 짓누르는 육중한 안정감.” 이러한 그녀의 숨바꼭질은 편안함 속에 한없이 거주하려는 욕망과 갑갑함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욕망이 부딪힌다. 즉 ‘숨기’의 행위로부터 술래에게 ‘발각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녀의 작품들에는 자신의 몸을 숨기는 동시에 발각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숨바꼭질 놀이에 내재한 ‘아이들의 이중 심리’가 잘 담겨 있다. 
보라! 그녀의 〈숨바꼭질〉 시리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몸을 잔뜩 구부리고 타자들의 몸속으로, 털 뭉치 속으로, 자신의 얼굴을 은폐하기를 시도하는 인물들은 한편으로 발견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듯, 자신의 몸을 배경 위로 훤하게 드러낸다. 연필로 정밀하게 묘사된 인물과 가죽으로 덮인 인공의 은폐물이라는 대비는 실재로서의 인간의 육체적 존재와 양가성을 공존시키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존재를 대립적으로 가시화한다. 들뢰즈(G. Deleuze)가 언급하듯이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에 가까운 혼돈의 심리 상태는 오늘날 현대인의 초상이다. 부정/긍정, 과거/현재, 현실/비현실이 혼재된 그것은 어떤 면에서 상대주의적 가치관이 팽배한 채 가치 판별의 객관성을 터부시하며 살아왔던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대가로 받은 형벌이다. 



hide and seek, mixed media,120x73cm,2018



IV. 숨바꼭질이 견인하는 또 다른 양가성들
그녀의 숨바꼭질에는 대개 ‘정서적 양가성’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또 다른 양가성들, 즉 ‘의지적 양가성’과 ‘지적 양가성’ 또한 미약하나마 함께 작동한다.  
먼저 ‘의지적 양가성’은 ‘정서적 양가성’이 견인하는 또 다른 변형의 형식이다. 그녀의 다른 시리즈 작품 〈도피〉에 표현된 인물들을 보라! 무릎을 접어 꿇어앉아 있는 인물은 커다란 양모피를 뒤집어쓰고 어떠한 위험으로부터 탈주하여 안전하게 피신한 상태로 보이는 한편, 거대한 외피가 짓누르는 중압감으로 인해 불안한 분위기가 병존한다. 탈주를 마치게 한 피신처가 또 다른 탈주를 감행해야 할 감옥처럼 인식되는 셈이다.   
한편, 작가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한 인물이 양모로 뒤덮인 희뿌연 표면 너머로 관객을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그 헐거운 안전망 속에서 유희를 즐기거나 심지어 유혹하는 듯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작품 〈도피〉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더 이상 ‘도피’가 아님(니었음)을 반증하는 듯이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피신을 향한 탈주의 욕망’이 아니라, ‘탈주를 포기하고 속박되길 원하는 욕망’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an escape, mixed media, 455x379(mm), 2016


an escape, mixed media, 각각 209x200(mm), 2016


달리 말해, 그녀의 작업 〈숨바꼭질〉은 술래로부터의 ‘도피의 욕망’과 술래로부터의 ‘발각의 욕망’ 사이에서 어떠한 결정도 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의지적 양가성’을 실감나게 가시화한다. 아하! 그녀의 작업에서 나신들이 얼굴을 파묻고 은폐와 위장을 의탁하는 타자 혹은 사물인 털 뭉치들이 너트(nut)로 만들어진 ‘눈’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만하다. 나신의 주체들은 '숨기'의 능동과 '발각'의 피동 사이에서 종일 분주하게 오간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꼭꼭 숨겼음에도 자신의 몸뚱이에 피어난 털들을 가리지 않는 이중성은 이러한 ‘결정 불가능’의 주체를 드러내는 ‘의지적 차원의 양가성’을 작동시킨다. 
그녀는 말한다. “두려우면 숨다가도 발각되면 발각되는 대로의 짜릿함을 즐긴다. 나는 내면의 욕망들을 숨겼다가 보여 주기를 반복하며 현실의 나와 숨바꼭질하고 있다.” 이와 같이, 탈주/포획, 숨김/드러남, 도피/만남의 사이에서 무엇도 ‘결정하지 못하는 의지적 양가성’과 더불어 그 사이의 ‘불안한 정신분열증적 주체’는 그녀의 〈숨바꼭질〉 및 〈도피〉 시리즈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이러한 ‘의지적 양가성’은 다음의 작가의 언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불안하거나 우울할 때 스스로의 눈썹을 만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중략) 눈썹을 결대로 부드럽게 만지다가도 절대자인 마냥 무자비하게 털들을 결 반대 방향으로 쓸어 올리며 그 촉각적 쾌감에 흡족해 한다. (중략) 한참을 만지고 나면 피부가 쓰라렸고 군데군데 잘려진 눈썹들은 속상하고 수치심마저 들게 했지만 좀처럼 이 습관을 그만둘 수 없다.”
눈썹을 만지는 유아기적 습관은 성인이 된 그녀에게 “어릴 적 충만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상기시키는” 여전한 ‘위안’임과 동시에 “정서적으로 결핍된 미성숙한 사람으로 보일 거 같은 두려움”을 동시에 갖게 만든다. 즉 눈썹 만지기는 그녀에게 편안함을 주는 ‘좋은 습관’임과 동시에 성인인 그녀가 그만 두어야 할 ‘나쁜 습관’이기도 하다. 그것은 E. 브로일러가 언급하고 있듯이 ‘정서적 양가성’외에도 ‘의지적 측면의 양가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즉 어떠한 행동의 실천에 있어서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優柔不斷)” 속에서 헤매는 상태를 드러낸다. 그것은 쾌락과 고통을 오가는 관성적인 감각 놀이의 공존을 한쪽으로 정리하지 못하는 ‘의지적 차원의 양가성’, 즉 ‘의지적 양가성’인 것이다.   
E. 브로일러의 분석을 빌려 우리가 숨바꼭질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양가성은 ‘지적 양가성’이다. 즉 ‘상호 모순되는 전제를 모두 받아들이는 차원’의 양가성인 것이다. 눈썹을 만지는 습관은 그녀의 창작을 작동시키는 근원이다. “눈썹은(눈썹을 만지는 행위는) 성인으로서의 현재의 나를 위협하는 동시에 한편 정말 솔직한 날것의 나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버려야 하고 버려도 괜찮은 ‘나’(라는 존재)가 있지만 문득 그래도 같이, 함께 있고 싶다”고 고백한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음’으로 잔존시켜 서로를 모두 수용하는 ‘지적 양가성’의 존재 혹은 ‘양 갈래의 욕망’이 그의 작업 전반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렇듯 양가성은 그녀의 작업을 지속시키는 근원적 힘이다. 


hide and seek, mixed media,803x803(mm),2018


hide and seek, mixed media,1168x910(mm),2018



V. 숨겨진 것들 - 콩팥 혹은 껍데기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작가 황혜정이 사소하고 구차할 뿐 아니라 매우 비루한 존재로부터 이러한 양가성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버려야 하고 버려도 괜찮은 ‘나’가 있지만”이라고 전제했던 그것은 실제로 ‘콩팥’을 조형화하면서 기록했던 황혜정의 작가 노트에서 나온 말이다. '눈썹' 혹은 '눈썹을 만지는 행위'도 그러하지만, '콩팥' 또는 '콩팥에 대한 연민'은 사소하고 비루한 것에 대한 관심이다. 하나의 털 뭉치 속에 얼굴을 함께 묻고 손을 마주 잡은 채, 쌍생아처럼, 똑같은 포즈로 마주보고 있는 나신 한 쌍을 선보이는 시리즈 작품 〈같이 꼭; kidney〉(2018)는 제목처럼 ‘콩팥’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은 누추하고도 비루한 존재로 간주된다. “작고 볼품없는 콩 모양을 해서는 한국에서도 콩팥, 영어 이름까지 강낭콩이다. 뇌나 심장만큼의 권위는 없다. 하필 배설에 관한 일을 하고 있으며 그마저 등 뒤쪽에 숨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비루한 존재에 대한 자신의 지대한 관심을 다음처럼 밝힌다. “둘 중에 하나만 있어도 된다고 하지만 나는 둘은 꼭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을 끌어안고는 살 수 없기에 버리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버려야 하고 버려도 괜찮은 ‘나’가 있지만 문득 그래도 같이, 함께 있고 싶다.” 
그렇다. 생긴 것도 작고 볼품없어 콩팥은 하나쯤 버려도 괜찮은 존재처럼 간주된다. ‘반항아’를 형상화한 작품 〈rebellious child)〉(2017)에서도 작가 황혜정은 개미의 더듬이를 가진 그로테스크한 생물체가 가슴에 가득 안고 있는 심장과 대비되도록 뒤편 양쪽에 자그마한 콩팥 한 쌍을 반쯤 숨겨두고 있다. 그것은 배설과 관계한 누추한 일을 도맡은 허섭스레기 같은 존재이다. 마치 버려진 껍질처럼 말이다. 그녀는 이러한 보잘 것 없는 콩팥과 벗겨진 껍질의 존재에 안식을 주고자 한다. 보라! 작품 〈쉼(a rest)〉에는, 껍질만 남은 양모피와 털을 듬성듬성 새겨 넣은 우피(牛皮)가 피곤에 지친 몸을 의자에 누인 채 안식을 취하고 있다. 작가 황혜정이, 차별받고 학대를 당해 버림받은 지 오래된 것인지도 모를 미천하고 비루한 껍데기에, 자신의 따스한 연민과 간절한 위무의 마음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같이 꼭; kidney, mixed media,1303x970(mm),2018




VI. 에필로그 
관객은 이번 전시에서 작가 황혜정이 ‘숨바꼭질’을 통해서 전하는 ‘양가성의 심리’를 엿보게 된다. 그것은 숨겨진 것들을 꽁꽁 묶어 두었다가 터뜨리는 작가의 조형 언어에서 자연스럽게 귀결된 지점이다. 관건은 숨바꼭질에서 주인공처럼 간주되는 ‘술래’의 위상은 이번 전시에서 어디에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술래’라는 단수의 주체에게는 숨는 자, 도망자로서의 다수의 타자들의 심리를 엿볼 여유조차 없었을 텐데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번 전시에서 작가 황혜정은 그 ‘술래’의 역할을 다수의 관객에게 맡기고자 한다. 작품 〈solace(위안)〉(2014)에서 그녀의 자소성(自塑像)이었음에 분명한 인물이 커다란 곰의 형상을 끌어안고 아예 하나의 몸이 되었던 경험을 이번에는 관객에게 투사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술래’가 되어 보는 역할 놀이를 선택하거나, 그녀의 시리즈 작품 〈모호한 경계〉들에서 펼쳐지는 ‘숨는 자’ 혹은 ‘도망자’의 놀이에 함께 참여하는 일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그녀의 ‘끝없는 숨바꼭질’에서 ‘술래’가 되든지, ‘숨는 자 혹은 도망자’가 되든지 선택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작가 황혜정의 숨바꼭질은 오늘도 지속될 테니까 말이다. ●  


solace (위안)wool, 650x1070x700(mm),2014


출전 /
김성호, 「끝없는 숨바꼭질」, 『황혜정-Hide and Seek』, 개인전 리플렛 서문, 2018. 
(황혜정 전, 카라스 갤러리, 2018. 11. 28-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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