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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이병호 / 시간 지우기 - 카이로스의 시간을 재맥락화하는 조각

김성호

시간 지우기 - 카이로스의 시간을 재맥락화하는 조각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시간을 되돌리거나 지울 수 있을까? 시간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기나 햇빛처럼 대우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크로노스(kronos)’라는 객관적인 시간은 인간이 되돌리거나 지울 수 없는 불가항력의 ‘무엇’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존재는 시간 앞에 무력하다. 
다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지금이라는 현재에서 ‘카이로스(kairos)’라는 주관적 시간에 천착하는 일뿐이다. 그것은 나에게만 허락된 시간으로 나의 선택에 의해 특별한 존재 의미가 부여되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이다. 죽음이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보이던 시간의 재구성은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가능해진다. 과거를 망각 속에 묻어 두거나, 기억 속 과거를 소환하여 현재의 시간 안에 걷게 하는 일이 말이다. 또한 시간을 경영하여 자신만의 카이로스적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믿음마저 가능하게 한다. 예술은 크로노스의 시간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상상력의 이름으로 시간의 맥락을 해체하고 재조합함으로써,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유유히 횡단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이병호의 작품 세계는 이러한 시간성의 화두 속에 놓여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탈맥락화(decontextualize)’한 결과물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재맥락화(recontextualize)’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카이로스의 미시적 시간 안에서 크로노스의 거시적 시간의 의미를 성찰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3개의 방 안에 각각 3개의 소주제에 해당하는 전시를 펼친다. 한 방에는 초기작에 속하는 실리콘 조각의 외형을 변형시키는 일련의 〈Vanitas Bust〉와 연동되는 작품들을, 또 한 방에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인체 측정(Antropometry)〉 연작을, 마지막 방에는 신작인 〈Seated Figure〉을 선보인다. ‘방 1’로부터 ‘방 3’까지 번호를 매겨, 각 작품들에서 시간의 탈맥락화/재맥락화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를 살펴보자. 



이병호가 참여한 부산시립미술관 기획전 포스터



방 1_ 삶과 죽음 사이의 바니타스
먼저 첫째 방에는 오래전부터 선보여 왔던 흉상 연작과 누워 있는 여인상이 전시된다. 이것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조각체의 외피가 공기의 흡입과 배출을 거듭하는 모터의 작용에 의해 점차 쭈그러지고 다시 회복하기를 거듭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위해서 작가는 흙으로 빚은 흉상의 외피를 실리콘으로 얇게 떠내고, 해부학적 골격이나 노화된 주름과 같은 단단한 FRP 재질의 내피를 만든다. 여기에 주입되는 공기를 조절하여 외피와 내피를 압착시키거나 이격시키기를 거듭하는 모터 장치와 센서를 부가해서 실감나는 키네틱 조각을 만든다.
〈Vanitas Bust〉 시리즈에서 소녀상은 천천히 노파가 되었다가 되돌아오고, 소년은 서서히 해골의 모습으로 변모했다가 되돌아오기를 거듭한다. 옆으로 누워 있는 젊은 여인상을 형상화한 작품 〈Deep Breathing〉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해골이 앙상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파괴의 본능을 동반하는 ‘타나토스(Thanatos)’라 불리는 죽음의 본능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자학과 가학을 통해 약동하는 생명으로부터 파괴와 파멸을 이끌어 내어 없음의 존재로 환원하고자 한다. 타나노스는 끊임없이 자기 보존과 성적 본능인 ‘에로스(Eros)’와 대립하고 투쟁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치열한 쟁투가 가시적으로 펼쳐지는 인체 조각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짧은 시간 안에 응축해서 보여 주는 그의 작품은 충격적인 조형 언어로 누구에게나 주어진 ‘크로노스’라는 시간의 본질을 일깨우면서 인간 존재론의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에는 이러한 보존과 파괴의 대립 속에서 상실, 소멸의 허무한 그림자가 언제나 드리워져 있지 않던가? 이병호가 작품명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하는 라틴어 ‘바니타스’를 제시한 까닭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공기’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실리콘 피부와 FRP 해골 또는 근육 사이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시화한다. 공기를 흡착하는 ‘삶 → 죽음’의 과정은 공기를 주입하면서 비대해지는 성기나, 가슴, 근육들을 통해 ‘죽음 → 삶’의 과정 옆에서 작동한다. 등신대의 작은 인체 조각이 삶과 죽음에 관한 버거운 문제의식을 한 덩어리로 끌어안는 셈이다. 한 주체의 희로애락이 또 다른 주체인 타자의 생로병사의 역사 속에서 함께 작동하는 것이 인간 존재론인 것처럼 말이다. 


이병호, Vanitas Bust


이병호, Deep Breathing


방 2_ 해체와 재구성을 잇는 안토로포메트리
둘째 방에는 최근에 골몰하고 있는 작품 〈Antropometry〉 연작이 선보인다. 이 방에는 열 개의 인체 형상이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다. 이브 클라인(Yves Klein)의 1960년 작품명에서 가져온 이 작품은 ‘기존의 재현이 아닌 방식’으로 형상을 드러내는 클라인의 미학을 공유한다. 즉 모델링(modelling)이나 카빙(carving)이 아닌 모듈이 되는 ‘복수의 인체 조각’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서 조각에서의 새로운 의미의 ‘형상 구축’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작품을 위해서 이병호는 먼저 ‘편히 서기(easy stance)’와 같은 전형적인 자세를 한 실제 인체의 캐스팅을 거친 후, 이것을 단일한 원형 틀로 삼아 폴리우레탄 재질의 인체 조각을 무수히 복제 생산한다. 이어서 인체 조각들을 부분별로 절단하여 그 파편들을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포즈의 조각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포즈의 조각이란, 미켈란젤로, 카미유 클로델, 로댕 등 미술사 속 거장 조각가들의 군상 작품에 나타난 인물의 포즈를 참조하여, 변형, 재생산한 것이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에서 예수를 성모 마리아로부터 떼어 내고, 예수상의 포즈를 변형, 변주하여 공중에 매다는 ‘조각적 설치’의 방식을 구사함으로써, 비슷해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조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병호의 작품은 거장으로부터 비롯된 카이로스의 시간을 해체(탈맥락화)하는 동시에 재구성(재맥락화)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이 그의 완성된 조각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은 파편들을 이어 붙인 그의 인체 조형이 선보이는 조형력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조각이 지닌 표현주의의 거친 분위기와 질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하는 바이다. 그는 무한 복제된 인체 조각을 절단하여 얻은 파편들을 이어 붙이면서 만들어진 접합면 사이의 빈 공간을 마치 칼날에 베인 흔적처럼 고의로 남겨두거나 그 사이에 폴리우레탄을 주입하여 고름 혹은 상흔처럼 부풀어 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변주한다. 폴리우레탄 조각체 위에 석고를 얇게 입혀 조각의 전체 피부를 만드는 마지막 과정에서도 어떤 작품에는 석고를 의도적으로 불균일하게 도포함으로써 우레탄 표면이 드문드문 드러나게 하는 조형 방식도 이러한 작품 변주에 일조한다. 이러한 결과 그의 조각은 거칠고도 매끈한 마티에르가 공존함으로써 마치 표현주의 계열의 작품처럼 보이게 된다.
주도면밀한 관객이라면, 그의 작품이 표현주의의 조형 기술 안에 해체와 재구성, 즉 탈맥락화와 재맥락이라는 미학적 장치를 숨겨두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의 작품을 참조하여 자신의 작품 안으로 가져오되, 변형, 변주를 통해 전통적 재현의 맥락을 지우고, 개념적 추상을 지향함으로써 무의미를 지향한다. ‘형상 안에서의 무의미’라니? 그것은 그가 참조하는 조각의 시대적, 상황적 맥락을 지우고 새로운 양상으로 현재화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가 재료로 사용하는 실물 캐스팅 인체 조각의 파편을 그저 ‘건조한 조립체의 모듈’처럼 탈맥락화하고 있기 때문에 기인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구상과 추상 그리고 미니멀 양상의 어떤 지점을 오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 그는 ‘가능한 모든 맥락’을 지움으로써 무의미를 낳는 깊은 ‘시간의 바다’에 잠입하고자 한다. 즉 타자의 카이로스의 시간을 탈맥락화하고, 재맥락화하여 ‘자신만의 시간 미학’을 깊이 탐구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병호,〈Antropometry〉 연작의 전시 전경 



방 3_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시와 카이로스의 시간 
마지막 방에 선보이고 있는 신작인 〈Seated Figure〉는 어떠한가? 이 작품은 의미심장하다. 어두움으로 가득 찬 커다란 방 안에서 홀로 빛을 받고 있는 인체 조각상 한 점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마치 기념비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색 물로 가득 찬 수조로 만들어진 좌대 위에 누운 듯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하얀 인체상은 느린 동작으로 숨을 쉰다. 부드러운 실리콘 피부가 모터에 의해 해부학적 근육의 FRP 내피와 맞물리기까지 공기를 서서히 흡착하고 다시 공기를 주입하면서 서로의 간극을 이완시키기를 거듭하는 인체상은 마치 온몸으로 들숨과 날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얀 피부가 깡마른 근육에 맞닿고 떨어지기를 거듭하는 동안 모터의 진동이 수조 안에 파동을 일으키고 수면 위에 잔잔한 파장을 만들어 낸다. 
보라! 죽음과 삶이 납작하게 맞붙은 이 곳에서 작은 생명은 죽음마저 껴안는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어둠의 공간을 살려 내는 빛, 고요한 정적을 깨우는 인체 조각의 느린 움직임과 잔잔한 모터 소리, 그리고 먹물로 가득 채운 수조의 잔잔한 파장이 풍기는 짙은 묵향!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인체 조각을 삶에 번민하는 인간으로 육화(肉化)시킨다. 
그런데 작가 이병호는 왜 이 넓은 전시장에, 비교적 작은 규모의 작품 한 점만을 출품하고 있는 것일까? 작은 작품 한 점으로도 넓은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는 공간 연출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인가? 관객이 갖게 되는 이러한 의문점은 작가가 이미 간파한 것이다. 따라서 ‘방 3’에서의 이러한 형식의 전시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생각해 보자. 어떠한 작가에게나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은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탈맥락화와 재맥락화를 실험하는 공간이다. 작가마다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붙잡아 둔 카이로스의 시간을 전시라는 이름으로 펼쳐 보이는 공간인 것이다. 그것을 극대화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가 있을 따름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병호는 다수의 작가처럼 후자에 속한다. 그가 조각에 충실한 채, 간헐적으로 조각적 설치를 실천해 왔던 것처럼,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 전체를 재맥락화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 자체에 골몰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앞서 두 개의 방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작품 외부의 공간’보다 ‘작품 자체’에 집중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의 경우와 달리, 작가 이병호가 이 ‘방 3’에서의 전시를 위해 작품이자 공간 연출이기 되기도 하는 일련의 프레임의 형식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체 조각을 싸고 있는 직육면체 프레임과 좌대를 포함해 전체를 덮고 있는 또 다른 프레임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것은 직각의 프레임이기보다 원근의 시점을 고려한 변형각을 지닌 육면체이다. 이병호에게 이 육면체의 텅빈 프레임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분절하는 레이어’인 동시에 전시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끌어들여 ‘작품의 규모를 전시 공간 전체로 확장하게 만드는 일련의 장치’인 셈이다. 
‘밝음 속 인체 조각’, ‘어둠 속 전시 공간’의 사이에 위치한 육면체 프레임은 공기와도 같은 ‘보이지 않는 매개체’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의 작품에서 ‘공기’가 실리콘 피부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크로노스’라는 생로병사의 객관적 시간을 성찰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방 3’의 전시에서 ‘육면체 프레임’은 빛과 어둠을 가시적으로 명확히 분절할 수 없는 우리의 삶 속 ‘3차원 공간’이라는 것이 결국 시간이 함께 맞물려 있는 ‘4차원 시공간’임을 성찰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의 육면체 프레임은 실제로는 가시적 공간을 분절하지 못하지는 무력한 존재이지만, 외려 보이지 않는 공간을 분절하고 확장하는 상징적인 매개체로 자리를 잡는다. 예술이 만드는 역설이다.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시를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늘 고민해 온 결과라 하겠다.  




이병호,〈Seated Figure〉


에필로그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온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지울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이 현재적 삶 속에서 작동시키는 ‘카이로스’의 시간 안에서 과거를 현재화하는 기억과 미래를 앞당기는 상상과 같은 일들로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더욱이 예술 창작은 이러한 카이로스의 시간을 이끄는 힘이다. 작가 이병호는 타자의 카이로스로서의 시간을 지운다. 과거의 역사적 맥락을 지우고 재구성한 인체 조각 속에서 형상의 맥락을 지우고, 모든 맥락으로부터 탈주하는 무의미를 만든 상태에서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오늘도 그것을 여전히 찾고 있는 중이다. ●

출전/
김성호, 「시간 지우기 - 카이로스의 시간을 재맥락화하는 조각」, 이병호 작가론, 『반복과 차이-시간에 관하여展』, 전시 카탈로그 게재, 2019, 
(반복과 차이-시간에 관하여 전, 부산시립미술관, 2019. 3. 15 - 6. 23, 참여 작가: Miyanaga Aiko, Miyajima Tatsuo, 박선기, 오용석, 이병호, 이진용, 조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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