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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일반│독창성 없는 미술

김성호

독창성 없는 미술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1. 작가 안태만과 작가 허투루 
작가 ‘안태만’는 최근 무력감에 빠졌다. 감정이 폭발한 후에 찾아온 슬럼프였다. 작업실에 박혀서 죽어라 창작에 매진해 온 지 어언 삼 년째 되던 날,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동료 작가 ‘허투루’가 잊지 못할 막말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누구의 그림을 닮았다는 말은 참을 만했다. 보기에 따라 달리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작업을 하고 있으니,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이나 조안 미첼(Joan Mitchell)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그들의 작업과 자신의 작업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물감의 드리핑(dripping)이나 붓의 스트로크(stroke)가 주요한 조형 언어인 반면, 자신의 작품은 ‘몸의 붓질’이 화두이니까 말이다. 
몇 년 동안 안태만은 캔버스 위에 몸을 던져 스스로 붓이 되는 과정을 실험해 오고 있다. 안태만에게 그것은 나신의 여성 모델을 동원해서 만들었던 이브 클랭(Yves Klein)의 재기발랄한 퍼포먼스 페인팅 작업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작업이었다. 클랭의 작품이 개념적인 ‘잔머리 굴리기’의 차원이었다면, 자신의 작업은 온몸으로 직면한 예술 실천의 차원이었으니까 말이다. 몸 전체로 화면과 대화를 펼치는 그의 작업은 손과 팔, 또는 상반신 심지어 머리에 온통 물감을 묻히면서 사투를 벌이는 과정 속에서 잉태한다. 그래서일까? 안태만이 작업을 마칠 즈음에는 늘 기진맥진의 상황에 처한다. 바로 이 때 작업실을 방문했던 작가 허투루가 안태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1955년 구타이 그룹(Gutai Group)의 카즈오 시라가(Kazuo Shiraga)가 진흙탕 속에서 벌였던 퍼포먼스와 안태만의 작업이 재료만 다를 뿐 형식이나 내용이 똑같다고 한 것! 안태만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소리를 치며 항변했다. “형식도, 내용도, 주제도, 창작의 태도도 다른데 무슨 헛소리냐”고 말이다. 허투루가 답한다. 
“그럼 뭐해? 결과가 같은데! 그리고 너는 틀렸어. 독창성이 없잖아. 독창성이.” 
최악의 말이었다. 미술에 목숨을 거는 마음으로 그 잘나가던 미술 학원을 후배한테 떠넘기고 창작에만 매달려 왔던 그의 절박한 상황을 잘 알면서, 허투루가 그런 식으로 함부로 지껄일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독창성이 없다니! 어쩌면 그 말은 작업을 위해 목숨을 건 안태만으로서는 죽기까지 잊지 못할 말이 될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안태만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작업은 물론 아무런 일도 해 나갈 힘을 찾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2. 작가 안태만과 미술평론가 노진정 
그 와중에 어제 만난 미술평론가 ‘노진정’이 안태만에게 위로라고 해 준 진정성 없는 말이 외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독창성이 없다’는 말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위로를 해 주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노진정의 말의 요지는 “오늘날 독창성 있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독창성이란 개념 자체가 사라진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고 이제 독창성은 창의성이라는 개념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작품 속 창의성의 존재 여부에 대한 판단만이 중요하다는 것. 그러니 화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위로의 기조였다. 그래서 안태만이 노진정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 작업에 독창성은 없지만 창의성이 있다는 건가요?” 노진정은 ‘독자적 예술가의 독창성’, ‘집단적 독창성’, ‘보편적 창의성’ ‘재편되는 창의성’과 같은 용어들에 힘을 주어 말하면서 무슨 말인가 계속 쏟아냈지만, 입심 좋은 그의 말 속에서 안태만이 원하는 대답은 끝내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화술 속에 숨은 뜻을 대략 파악하건대 “창의성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크게 보면 다 거기서 거기지. 그저 자신에게 솔직한 채 작업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는 정도의 메시지였던 것으로 기억할 뿐이다. 아이고! 안태만으로서는 노진정의 애매모호한 이 말이 자신의 작업이 후지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막말처럼 들렸다. ‘오늘날 모든 미술가의 작업 자체’를 싸잡아서 가치 없고, 창의적이지 않다는 평가로 들렸기 때문이다. 노진정의 입심을 따라갈 재주가 없어서 언쟁은 포기하고 그저 기분이 상한 상태에서 계속 듣고 있을 뿐이었던 안태만은 급작스럽게 피로를 호소하면서 자리를 파해야만 했다. 안 그랬으면 분명코 탁자 몇 개는 던져져 부서졌을 테니까. 
그는 노진정이 떠난 작업실에 남아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다. “독창성이라는 말 자체가 오늘날 무용지물이라면 적어도 창의성은 분명히 내 작업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20세기 초반에 태어났더라면, 분명히 독창적인 작가라고 불렸을 텐데.”
뜬눈으로 새벽까지 잠을 설쳤던 안태만은 오늘 아침 녘에 노진정으로부터 링크가 걸린 문자 메시지 하나를 스마트폰으로 받았다. 메시지는 “어제 제가 말했던 내용을 정리한 글이니까 한 번 읽어 봐 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안태만은, 죽을 만큼 읽기 싫은 기분이지만, 혹시 이 글에 어제 했던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링크를 열어서 천천히 글을 읽기 시작한다. 마치 의무처럼. 


3. 노진정의 미술평론      
오늘날 ‘독창성(獨創性, originality)’이란 없다. 이미 ‘창의성(創意性, creativity)’으로 변모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그 변모의 과정은 어떠했는가? 
독창성이란 루지에로(G. Ruggiero)에 따르면 예술의 개념이 본격화된 르네상스 이후 20세기 이전까지는 ‘천재를 중심으로 한 창의적 세계’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는 이 독창성이란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독창성이란 ‘어느 것과도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고 특별하고도 흥미로운 질적 가치’와 같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렇다. 이 독창성은 르네상스 시대에 천재와 같은 ‘뛰어난 개인의 예술가가 지닌 창조적 특징’으로 이해되는 과거의 것이다.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치는 예술가’ 즉 ‘독창적 예술가’의 개념과 같은 것 말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독창성의 개념을 처음으로 정의한 것은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영(Edward Young, 1683~1765)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 『독창적 구성에 대한 추측(Conjectures on Original Composition』(1759)에서, 독창성을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지닌 채 실행하는 “새로움(newness) 그리고 관찰 또는 발명의 진실”이라고 정의했다. ‘독창적(original)’인 것을 여전히 미메시스에 기초한 예술과 연관된 것으로 보면서도 다른 예술가들과 차별되는 새롭고도 독자적인 예술을 지향하는 예술가가 지닌 특성으로 고찰한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E. Kant)는? 그는 독창성을 예술적 천재의 개념과 연동되는 것으로 바라보았다. 헤겔(G. W. F. Hegel) 또한 독창성을 ‘천재의 영감’과 관련한 것으로 설명한다. 헤겔은 “만약 예술의 독창성이 사소한 모든 특징을 삼켜버린다면, 그것은 예술가가 ‘천재적 영감의 도약’을 온전히 추종하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천재성과 객관성의 두 차원이 결합된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독창성은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라는 두 범주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즉 독창성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천재적 예술가’ 외에도 ‘천재적 예술가의 유일한 진짜 작품’으로 이해된 것이다. 그러니까 독창성의 개념 안에는 예술 작품의 유일성(唯一性, Uniqueness), 원본성(原本性, originality), 진품성(眞品性, authenticity)의 의미가 주요하게 자리한 것이었다.    
개념은 지속적으로 변한다. 영국의 극작가인 엘리엇(T. S. Eliot)의 견해처럼, 독창성이란 20세기에 더 이상 한 개인의 천재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에게서 독창성이란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예술’로서가 아닌 통시적 역사와 공시적 맥락 속에서 ‘상속 받은 자신의 능력이나 천재를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20세기에 독창성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을 주창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미술운동을 견인하는 ‘집단적 독창성’이었다. 모방과 재현을 거부하는 인상주의로부터 촉발된 20세기의 미술은 늘 그룹 차원에서 새로움을 찾아 야수주의, 입체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집단의 미술 운동의 차원에서 독창성을 재편하였다. 그렇다. 20세기 이후 ‘재편되는 독창성’은 이전 미술 운동과는 선을 긋고 새로운 예술, 새로운 미술 운동을 모색하는 ‘집단적 독창성’이었다. 20세기가 열어젖힌 이러한 미술 창작 태도는 천재와 같은 예술가의 개념을 탈각시키고 새로운 유형의 미술을 추구하는 예술적 태도를 의미하게 되면서 ‘독창성’의 개념으로부터 ‘창의성’의 개념으로 변형, 확장되기 시작한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시대를 반추해 보라. 대중문화가 팽배했던 1960년대 팝아트 이후에는 그린버그(C. Greenberg)의 주장처럼, 더 이상의 새로운 것도 더 이상의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오늘날 미술에서는 ‘집단적 독창성’의 개념은 거의 소멸하고 ‘일반적인 창의성’의 개념으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독창성이 지닌 원본성 개념은 20세기 이래 판화, 캐스팅에 의한 조각, 디지털 아트 등 에디션을 전제로 한 일명 에디션 아트가 확산된 지 오래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벤야민(W. Benjamin)은 이러한 오늘날 상황을 일찍이 예견했다. 그는 1930년대 중반 사진과 필름을 예로 들면서, 독창성과 유일성(uniqueness)의 개념을 훼손하는 상황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는 ‘가짜(fake)’ 또는 ‘사본(copy)’이 ‘독창적인(original)’ 그리고 ‘진품의(authentic)’ 미술 작품을 대신하는 ‘기계 복제의 시대의 예술 작품’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다. 
바르트(R. Barthes)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지칭하는 “텍스트는 인용들의 짜임”이라고 언급했다. 즉 오늘날 언어나 예술의 세계에서 ‘완전한 독창성’이란 의미의 오리지널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 가능해진다. 세상에는 그저 인용들만이 난무할 따름이다. 현대에 이르러 독창성의 개념은 이제 패러디(parody), 혼성모방(pastiche)으로도 성취가 가능해졌다. 타자의 것들을 인용하고 그것을 변형, 재편해서 이전 것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는 노력들로 평가받게 된 것이다. 즉 ‘독창성’의 개념은 이제 ‘보편적 창의성’의 개념으로 전환되고 확장된다.  
현실을 보라!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사에서 창의성은 이제 더 이상 ‘독자적 예술가의 독창성’뿐 아니라 ‘집단적 독창성’의 개념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오늘날의 창의성은 이미 독창성이란 용어의 성을 허물고 재편되었다. 독창성은 이제, 경계 너머의 것들을 가져오는 윌슨(E. O. Wilson)의 통섭(Consilience)과 같은 융복합의 논리 속에서, 기존을 것들을 패러디와 혼성모방과 같은 것들로 변형된다. 창의성은 이러한 변형 속에서 모색되고 재편된다.   

  

<도 1> Marcel Duchamp,  L.H.O.O.Q, 1919 
<도 2> Fernando Botero, Mona Lisa, 1977 
<도 3> Andy Warhol, Mona Lisa, 1963.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불멸의 미로서의 아이콘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패러디와 혼성 모방으로 재편된다. 뒤샹, 보테로, 워홀의 작품을 보라! 그들에게서 모나리자는 원본성의 의미를 비틀면서 해체, 변형, 변주된다. 새로운 시대의 창의성은 인용 혹은 사본으로부터 실현한다. 가히 재편되는 새로움, 다시 써지는 새로움 또는 ‘재편되는 창의성’이라 할 만하다. 오늘날에는, 시대를 구분하는 거시적 담론으로서의 새로움이란 없다. 그것을 지탱케 하는 ‘독자적 예술가의 독창성’이나 ‘집단적 독창성’으로서의 창의성은 이미 소멸되었다. 다만, 개별 예술가들에 대한 미시적 담론으로서의 새로움과 그것의 가치를 의미하거나, 예술 교육의 주요 가치로 간주되는 ‘보편적 창의성’ 혹은 ‘재편되는 창의성’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이러한 관점들은 다분히 오늘날 단토(A. Danto)의 예술종말론 이후 정의된 다원주의 미술이 위치하고 있는 존재론과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의식과 연동된다. 즉 ‘미메시스 시기- 이데올로기 시기 - 역사후기(post-historical) 시기’로 전개된 미술 종말 이후의 미술인 다원주의 미술의 시대에는 더 이상 그린버그의 ‘훈련된 눈’으로 가능했던 예술과 일상의 구분은 아서 단토의 철학에 이르러 불가능해졌다. 이제는 일상과 예술 작품 사이의 ‘식별불가능성(indiscernibility)’을 통해 일상과 미술, 즉 일상과 예술의 경계 자체가 사라진 짬뽕 혹은 융합의 시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에게서 일상과 예술의 융합은 또 어떠한가? 그는 일상과 결합한 현대 미술을 “진부함, 쓰레기, 보잘것없음에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부여하고 적용시키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현대미술에서 ‘무가치하고 또 무가치함’을 확인한다. 그에게서는 ‘독자적 예술가의 독창성’이나 ‘집단적 독창성’으로서의 창의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다만 ‘보편적 창의성’ 혹은 ‘재편되는 창의성’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보편적 창의성’ 혹은 ‘재편되는 창의성’에 관한 논의는 이제 인공지능(AI)이 ‘딥러닝’과 ‘딥러닝 연산’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이미지에도 적용된다. 보라! 초기의 구글의 ‘딥드림(Deep Dream)’이나 이미지를 유명 화가의 화풍으로 변형하는 트위터의 ‘딥포저(Deep Forger)’를 거쳐, 이제는 미술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스타일로 그림을 그린다고 천명한 페이스북의 ‘캔(CAN)’이 등장했다. 인공지능이 딥러닝을 통해 창의성을 논하는 예술 담론에 들어온 것이다. 즉 ‘재편되는 창의성’의 개념은 인간만이 지니던 고유한 특성이었던 독창성의 개념을 소멸시키고, 빅데이터의 연산과 딥러닝이 지닌 융합(복수성, 네트워크, 가변성)의 존재론과 긴밀히 공유하면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차원으로 변모해 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을 사는 미술가들이여! 이러한 상황에서 창작에서의 독창성이란 개념에 목을 매지 마시라! 이미 독창성이란 해 아래 씨가 말랐고, 그저 ‘재편되는 창의성’의 개념만이 불씨처럼 존재하고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남들과 차별화되는 조형 언어의 새로움을 찾으려 굳이 애쓰지 말라. 그래봤자 남들이 이미 다 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대를 사는 모든 미술가들은 남들이 이미 했던 조형 언어를 빌려 와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답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그러니 당신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창작하라! 독창성과 창의성을 갈구하는 오늘의 미술가들이여! 프랭크 스텔라 (Frank Stella)의 언명을 기억하는가? 그의 말 속 단어를 바꾸어 여러분께 드린다. “당신이 창작하는 것이 당신이 창작하는 것이다(What you create is what you create).” ●


출전 /
김성호, 「독창성 없는 미술」, 미술평론가 김성호의 미술현장 씹어 읽기 ➀, Thewebdaily, 2019. 3. 22.
http://news.webdaily.co.kr/view.php?ud=2019032217233784666a6b374224_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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