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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변선영 / 선(線)으로부터 모색하는 선(腺)의 미학

김성호

선(線)으로부터 모색하는 선(腺)의 미학
- 향기 나는 삶의 에너지 

김성호 Kim, Sung-Ho (미술평론가)

필자는 작가 변선영의 최근작을 ‘선(線)을 통해서 선(腺)을 탐구’하는 것으로 해설한다. 주지하듯이, 전자의 ‘선’은 “그어 놓은 금이나 줄”을 지칭하는 명사이며, 후자의 ‘선’은 갑상선이나 소화선처럼 “몸속에서 물질을 분비하고 생산하는 원천적인 곳”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실제로 변선영은 최근작에서 '노끈'이라는 단순한 재료를 사용해서 '어떠한 것의 원천'을 심층 깊이 탐구한다. 즉 ‘선(線: 줄, 끈)’을 통해서 ‘선(腺: 샘, ~샘)’의 미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I. 선(線)으로부터 - 선의 변주 
변선영의 최근작은 선(線)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노끈’이라는 물리적 형태의 ‘줄’을 사용해서 가장 기초적인 조형 요소의 하나인 ‘선’을 탐구한다. 주지하듯이, 미술의 매체적 속성을 결정짓고 장르적 유형을 가늠하게 만드는 기초적인 조형 요소는 ‘점(0차원) → 선(1차원) → 면(2차원) → 입체(3차원)’의 차원으로 확장해 나간다. 그 중의 하나인 ‘선’은 “한 점이 연속적으로 움직여 이루어진 자취이며, 점 다음으로 단순한 도형의 구성 요소로서, 길이와 위치는 있으나 넓이와 두께는 없는” 1차원으로서의 존재이다. 
그렇지만, 변선영의 작품에 등장하는 ‘선’이 1차원의 존재라고 단정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다. 변선영의 그것은 개념적으로는 1차원의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1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각적으로 노끈이 품은 자그마한 넓이(xy)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2차원이며, 물리적으로 노끈의 굵기를 의미하는 넓이(xy)와 두께(z)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3차원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선’은 꽈배기 혹은 넝쿨의 모양처럼 한쪽으로 꼬이면서 두께를 가지도록 만들어진 ‘노끈(노내끈)’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3차원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변선영의 ‘선’은 언제나 변주하는 것이라 하겠다. 개념적-시각적-물리적 속성들 사이에서 그리고 1차원-2차원-3차원 사이에서 그녀의 ‘선’은 순차적이거나 급진적으로 자신의 몸을 변주한다. 그녀의 작가 노트를 잠시 보자. “이번 작품은 노끈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풀어서 표현의 재료로 적극 활용했다. (중략) 선들은 형태를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 무엇이든지 표현해 낼 수 있었다. 방향을 주는 것만으로도 표현을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었고,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을 보면, 노끈을 가지런히 배열해서 마치 밭고랑처럼 보이거나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숲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노끈의 끝 부분을 풀어서 곱슬머리처럼 만들어 마치 나무줄기로부터 자라난 무성한 잎 혹은 뿌리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또는 노끈을 커다란 곡선으로 배치하고 노끈이 만든 경계의 색을 달리 해서 마치 굽이쳐 흐르는 강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노끈을 방사형으로 펼쳐놓아 마치 촉수를 뻗으며 자라나는 이름 모를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변선영이 노끈(들)을 가지고 만든 것은 일차적으로 곡선과 직선이 집적된 단순한 ‘추상적 이미지’이지만, 그것은 작가가 만들어낸 ‘미묘한 선들의 변주’를 통해서 생동감 있게 변화한다. 때로는 관객 모두에게 낯익은 자연의 풍경으로, 때로는 관객들마다 각기 다른 개별 주체의 심상(心像)인 이미저리(imagery)로 변화하는 것이다.  





II. 선(腺)으로 - 샘의 변성과 운동
작가 변선영은 패널 위에 노끈으로 드로잉을 하면서 작업을 시작한다. 이후 노끈들을 단단히 접착하고 그 위를 한지로 덮어서 두들겨 부착시킨다. 다시 그 위에 아크릴로 색을 칠하고, 바니쉬로 도포하면서 작업을 마감한다. 마치 우리의 몸이 '뼈' 위에 '피부'로 덮여 있는 것처럼, 변선영은 한지로 자신만의 '회화적 피부'를 만들어 준 셈이다.    
그런데 변선영이 노끈이라는 선(線)을 변주하면서 추구하는 ‘선(腺)’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갑상선이나 소화선 혹은 점액선을 갑상샘, 소화샘, 점액샘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처럼, ‘선’은 우리 몸속의 분비하는 물질을 생산하는 원천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업으로부터 필자가 언급하려는 ‘선(샘)’의 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몸속’의 어떠한 ‘물질의 생산 원천’이기보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 어디엔가 자리한 ‘비물질의 생산 원천’으로서의 샘을 지향하는 무엇이다. 변선영은 작가 노트에서 그 비물질을 ‘마음 상태’ 혹은 ‘에너지’라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나의 최근작은) 순간 떠오르는 느낌의 감정들을 풀어놓아 마음 상태를 집중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외부의 자극이나 충격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하고 있는 단호한 거부이거나 내 안에 자생되어지는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행복해 지고 싶은 본능적 욕망을 갈구하며 제작해낸 것이다”  

그렇다. 일렬로 가지런히 정렬되거나 방사형으로 활짝 펼쳐진 노끈들의 배치가 만드는 직선의 정제된 미와 조화를 이루는 구불구불 휘어지게 배치된 노끈들의 생명력 있는 곡선의 역동적 미는 모두 작가의 심경(心境) 혹은 심상(心狀)으로부터 출발한 것들로 그녀의 마음속에서 생성되는 일종의 에너지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의 언술에서 드러나듯이, 그것은 외부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방어의 기제(機制)로서의 심상이거나 내부로부터 자생되어 표출되는 본능적 욕망이 함께 연동된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말할 때, 그녀의 작업은 우리의 ‘몸속’에서 물질들을 생산하던 ‘선(샘)’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에너지라는 비물질을 생산하는 운동으로 변화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즉 ‘몸속의 물질 → 마음속의 비물질’로 자리 이동한 ‘선(샘)의 변성과 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III. 향기 나는 삶의 에너지
그녀의 작업이 함유하는 ‘선(腺)의 미학’으로부터 우리가 유념할 것은, 명사로서의 ‘선’과 더불어 접미사로서의 ‘선’의 변성과 운동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갑상선, 소화선, 점액선처럼 자신의 존재를 변형시키는 선(샘)처럼, 변선영의 작업은 회화, 조각, 설치를 자유롭게 횡단하면서  다양한 조형 언어로 변주되고 변성된다. ‘만들어진 오브제(objets créés)’ 콜라주(collage), 앗상블라주(assemblage),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제시(presentation) 등이 그것이다. 물론 명사로서의 ‘선’처럼, 그것은 주체와 타자, 만남, 동행과 같은 인간 존재론과 연관된 일관된 주제의식 속에서의 다양함을 전제한다.     
변선영의 작업이 함유하는 ‘선(샘)’의 미학은 ‘에너지라는 비물질을 생산하는 과정’에 집중된다. 패널 위에 노끈과 한지 그리고 아크릴 페인팅을 통해서 물질을 만지고 다듬으면서 그녀가 탐구하는 비물질의 에너지란 다름 아닌 ‘향기 나는 삶의 에너지’이다. 그녀에게서 선의 미학은 ‘향기의 에너지’로, ‘삶의 에너지’로 펼쳐진다. 그 에너지는 물리적 파동으로 수렴되는 에너지이기보다 삶을 추동하는 생명력의 기(氣)와 같은 에너지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선(샘)의 미학’을 가히 ‘기선(氣腺)’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 탓일까? 화면 속 형상은 피상적으로 단순한 추상의 연습처럼 보이지만, ‘기’와 더불어 실제 작가의 현실적 ‘삶’의 모습이 투영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생명력 가득한 풍경과 같은 형상들과 오버랩되면서 다가온다. 보라! 그것은 화면 속에서 노끈들이 서로의 몸을 겹치면서 소곤거리는 ‘꽃’처럼 나타나거나 노끈들이 나란히 몸을 눕혀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등고선’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때로는 노끈들이 커다란 곡선으로 구획된 경계면을 사이에 두고 굽이치는 강처럼 등장하거나 끊어진 노끈들이 그림을 그리듯 작열하는 불꽃이 되거나 이어진 노끈들이 아치형의 그림을 그리며 분출하는 샘물 혹은 폭포수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한편, 이러한 의도와는 다르게 ‘흐트러짐을 보이고 싶지 않은 작가의 고집스러운 면모’로 인하여 ‘생명력 가득한 삶의 에너지’가 단조롭고 조용하게 표현된 작품도 있다. 어쩌면 이러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작가의 언급대로, 융(Carl G. Jung)이 언급하는 무의식의 ‘보상적 기능(compensatory function)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융에게 있어 꿈의 존재 의미는 의식적 태도의 잘못되거나 미흡한 점을 알려서 이를 보완해 주는 ‘보상적 기능’이었듯이 말이다. 
작가 변선영은  자신의 창작 의도와 원래의 계획 너머에서 건너 온 이러한 우연한 결과를 하나의 ‘보상’으로 받아들인다. 마치 이러한 그녀의 작업 태도는 대조적인 것들 중 하나가 비대해지거나 방만해져서 균형을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다른 쪽의 하나가 보완과 보상의 길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는 우리의 실제적 ‘삶의 사회학’과 닮아 있지 않은가? 
이처럼 그녀는 우연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작업 속에 흔쾌히 수용하고 다음 횡보를 위한 밑거름으로 삼는다. 다양한 조형 실험과 예술적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녀의 향후 작업이 기대되는 까닭이다. ●

출전/
김성호, 「선(線)으로부터 모색하는 선(腺)의 미학- 향기 나는 삶의 에너지 」, 서문, 『변선영』, 2019. (변선형 展, 2019. 5. 17-22,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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