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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박종규展 / 노이즈의 바다를 순항(巡航)하거나 순항(順航)하거나

김성호

노이즈의 바다를 순항(巡航)하거나 순항(順航)하거나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사전으로부터   
박종규의 이번 개인전의 부제는 ‘순항하다(~Kreuzen)’이다. 외래어 표기와 달리, 원음에 가깝게 표기할 때, ‘크호이츤[krɔ́ʏtsǝn]’으로 발음이 되는 이 단어에는 실상 ‘순항하다’란 뜻 외에도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먼저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타동사로 “(십자로) 엇걸다, 교차시키다, 서로 맞추어 끼다”며, “건너가다, 횡단하다, 넘어가다; 가로막다, 방해하다”의 의미와 함께 또 다른 뜻으로 “생물 교배하다, 잡종으로 만들다; 이화 수분(異花受粉) 시키다”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배 또는 항해와 관련된 용어로 “1. (주로 배가) 표류하다, 2. [해양] 바람에 가로막혀 지그재그로 항해하다. 3. 순항(巡航)하다”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박종규의 전시에 사용된 번역어 ‘순항하다’의 한자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즉 ‘순항(順航)하다’가 아니라 ‘순항(巡航)하다’가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말이다. 즉 전자는 “1. 순조롭게 항행하다, 2. 바람이나 조류 따위를 뒤로 받으면서 항행하다”는 뜻을 지니지만, 후자는 “배를 타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라는 뜻을 지닌다. 즉 크호이츤(Kreuzen)의 번역어인 ‘순항(巡航)하다’는 목적지에 곧 이르게 될 순탄한 항해가 아닌 무엇에 걸리거나 막히고, 느닷없이 개입하는 다수의 지점을 지나거나 들르게 되면서 목적지를 잃고 이리저리 떠도는 ‘표류’와 같은 의미의 항해를 가리킨다. 박종규의 이번 전시가 어디를 그리 돌아다니는 것일까? 그리고 왜? 


박종규전, 대구미술관


II. 노이즈의 바다
박종규의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모든 작품은 〈~Kreuzen〉이라는 명제를 달고 ‘노이즈의 바다’를 표류자처럼 순항한다. 노이즈의 바다? 사실 이번 전시의 ‘순항’이란 말은, 그의 작품이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어인 ‘노이즈(noise)’로부터 비롯되었다. 노이즈란 사운드(sound)처럼 ‘소리’라는 의미를 공유하면서도, 사전적 정의대로 “(듣기 싫은, 시끄러운) 소리” 즉 ‘소음’과 ‘잡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전자 공학, 기계 제어’ 분야에서는  “기계의 동작을 방해하는 전기 신호”이고, ‘무선 통신’ 분야에서는 불규칙한 파동으로 이루어져 통신, 라디오 등의 청취를 방해하는 소리이자 불쾌한 느낌을 주는 파장이다. 그것은 모든 분야에서 하등의 가치도 없는 불필요한 존재이자 방해꾼으로 내몰린다. 다음의 그림을 보자. 


<도판 1> 선형 모델 - 과정학파의 커뮤니케이션 1)



 위의 그림은 쉐논(C. Shannon)과 위버(W. Weaver)의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수학적 모델(The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 1949)’이다. 이 모델은 피스크(John Fiske)의 분석에 의하면, ‘메시지의 전달’을 강조하는 과정학파(process school)의 입장을 반영한다. 즉 이 학파의 입장은 커뮤니케이션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으로 정의하는 까닭에,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방해하는 모든 소음을 제거하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는다. 위의 도표에서, 왼쪽의 발신자와 오른쪽의 수신자 사이의 중앙 하단에 위치한 ‘소음의 원천(noise source)’은 그래서 과정학파에 있어서 효율성 차원에서 필히 제거해야만 될 ‘꼴 보기 싫은 놈’이자, 장애물이며 적(敵)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언제나 인간 커뮤니케이션(Human communication)을 실패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화, 설치, 영상의 방식으로 관객과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에 나서는 작가 박종규는 불필요와 불편의 존재, 불청객, 꼴 보기 싫은 놈, 방해꾼 심지어 적으로 간주되는 이 ‘노이즈’에 지독한 연민을 느낀다. 왜? ‘노이즈’에 대한 그의 강렬한 체험 때문이다. 그것은 이전 정권에서 주요하게 간주하던 이념이나 정책을 다음 정권에서 ‘노이즈’처럼 간주하고 내팽개쳐 왔던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목격하면서 성장하고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찰하게 된 것이었다. 주류와 중심이 비주류와 주변부를 ‘노이즈’로 간주하고 배제하고 소외시킴으로써 가속화되는 분열은 오늘날의 사회 현상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의 작품에서 노이즈란 한국 사회뿐 아니라 자본화된 현대 사회 일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의미심장한 ‘메타포’인 셈이다. 
작가 박종규에게, 주류와 중심으로부터 버려진 ‘노이즈’는 배제되고 폐기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다. 그는 노이즈를 미술 내부로 끌어들였다. 특히 그는 컴퓨터의 오류로 인해 디지털 이미지가 깨지는 현상에 주목하고, ‘디지털 이미지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픽셀(Pixel)’을 크게 확대하고 변주하는 방식‘으로 노이즈를 번안하여 제시한다. 그것은 사각형의 점들로, 원형의 점들로, 때로는 파선(破線)의 연속체로 등장하면서 캔버스를, 패널을 그리고 전시 공간 자체를  횡단하고 점유한다. 가히 ’노이즈의 바다‘라 칭할 만하다.    


전시 전경


III. 순항(順航) - 노이즈의 바다를 유영하는 회화 
보라! 그의 전시에서 회화, 영상, 설치 작업에 이르는 모든 작품에는 노이즈가 지천으로 펼쳐져 있다. 그것은 노이즈의 바다 위를 이번 전시 주제처럼 표류하며 순항(巡航)하거나, 때로는 여유롭게 순항(順航)한다. 어떻게? 
5전시장을 먼저 둘러보자. 드넓은 전시장의 벽을 채우고 있는 것은 그의 회화 작품들이다. 조용한 이 노이즈의 바다에는 잔잔한 풍랑이 일고 있다. 노이즈의 풍경은 때로는 무수한 픽셀의 집적으로, 때로는 픽셀이 이어지거나 끊어진 모습으로 회화의 표면 위에 출현한다. 마치 고장 난 티브이 화면에 나타나는 잔잔한 노이즈의 물결들처럼 보이는 이것들은 실상 개별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노이즈의 파장을 선보인다. 납작한 이차원의 화면 안에 크기를 달리한 채, 자리한 원형과 사각의 점들, 그리고 그것의 무수한 변주가 가득한 화면은 마치 단색화처럼 조용하지만, 그곳에는 꿈틀거리는 미묘한 차이와 불안이 함께 자리한다. 미묘한 차이와 불안? 그것은 노이즈의 일정한 파장이 만드는 질서의 세계 속에서 도드라지게 튀어 오른 정갈한 점들의 모습이거나, 반대로 정연한 듯 흘러가는 연속적 흐름을 이탈하는 자잘한 변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캔버스나 패널의 얇은 표면 위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그의 작품들은 있는 듯 없는 듯 ‘미묘한 차이와 불안’을 창출하면서, 정중동의 세계를 그려나간다. 그의 평면 회화가 창출하는 세계를 가히 ‘노이즈의 바다를 유영하는 회화’ 혹은 ‘노이즈의 바다를 순항(順航)하는 회화’라 할 만하다. 
우리가 유념할 것은, 박종규의 작업, 특히 회화 작업이 ‘노이즈’라는 것을 비주류와 변방으로부터 주류와 중심으로 장소 이동시키면서 중심 세력으로 복권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달리 말해, 노이즈를 개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노이즈 그 자체로 유의미의 덩어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노이즈는 로고스가 형성하는 상위 층위 속 의미론(sémantique)에는 무심한 채, 의미 작용(signification)의 생성에 관심을 기울일 따름이다. 노이즈란 데리다식으로 말해, 대리적 보충(supplément)이자, 마치 텍스트의 본문으로부터 밀려난 프롤로그, 각주와 인용처럼 배제된 것들이지만, 다시 본문으로 편입될 것을 기다리는 존재이기보다, 그 잔여물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존재들인 셈이다. 그래서 노이즈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덩어리라 할 수 있겠다. 
즉 노이즈란, 데리다(J. Derrida)나 잉가르덴(R. Ingarden)의 논의를 변조해 말한다면, 로고스의 상위 층위로부터 버려지고 배제된 채, 파토스의 하위 층위에서 의미의 파편과 찌꺼기들이 모이거나 흩어지면서 그저 새로운 변형을 기다리고 있는 ‘미결정성의 반점’일 따름이다. 
우리의 논의대로 말하면, 노이즈란 문자 언어에서 이탈하는 음성 언어의 주절거림이자, 음성 언어에서 또 한 번 미끄러지는 감탄사나 의성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이즈의 공간은 기의 없는 기표가 맞부딪히는 공허의 공간이자 무의미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그곳은 가장 근원적인 공간, 달리 말해,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는 어떤 것’, 즉 노에마(noema)라고 하는 순수한 본질로 향하는 ‘환원’의 공간이기도 하다. 


~Kreuzen, 2019, Painting series 




IV. 순항(巡航)과 순항(順航) 사이 - 노이즈의 바다를 접는 비선형 평면 
5전시장과 4전시장을 잇는 가운데 전시 공간에는 비대칭 평면이 벽에 걸려 있다. 비대칭 평면? 그것은 캔버스나 패널 위 ‘노이즈 회화’를 입체의 효과가 드러나도록 변형한 새로운 무엇이다. 이 작품들은 실제는 평면이지만, 소실점을 만드는 입체처럼 보이도록 2-3개의 회화 이미지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비대칭으로 만든 후 마치 화면을 ‘접은 것’처럼 서로 연결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노이즈 회화가 캔버스나 패널 위에 노이즈 파동을 '선형적으로(linearly)' 시각화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 비대칭 평면은 알루미늄 패널 위에 노이즈 파동의 '비선형적으로(non-linearly)' 시각화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소실점과 투시법을 적용한 ‘입체화된 평면 이미지’는 자동차 도색 기법으로 도장한 반짝이는 표면으로 인해 산업 디자인의 용도로 생산된 무엇처럼 보이도록 가장한다. 마치 오래전 평면 속에 입체를 담은 듯한 ‘눈속임(trompe-l'œil)’ 기법에 의해 생산되었던 회화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음의 그림을 보자.  



<도판 2> 비선형 모델 - 기호학파의 커뮤니케이션 2)
 

위의 그림은 박종규의 마친 ‘접힌 평면’과 같은 비선형 조형(non-linear works)을 이해하는데 있어 유효하다. 위의 그림은 피스크가 분석한 바 있는 ‘메시지와 의미(Messages and meanings)와 관련된 도판으로 소개된 기호학파의 삼각형 구조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이다. 이 그림은 우리의 일상적 소통 자체가 비선형 커뮤니케이션(non-linear communication)임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위의 모델을 보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선형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왼쪽 한 자리에 생산자(producer)와 독자(reader)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에서 메시지의 생산자와 수신자를 선형 위에 두었던 과정학파의 모델과는 다른 것이다. 이 모델은 발신자와 수신자를 선형으로 연결한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하고, 삼각형으로 ‘접혀진 채 연결된 비선형’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한다. 이 모델을 보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삼각형 왼쪽의 한 자리에 모여서 삼각형 오른쪽에 있는 무엇인가의 지시대상(referent)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서 삼각형 위쪽의 메시지(message)를 생산하는 것이다.  
특히 기호학파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에서는 노이즈의 유무나 그것으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실패와 성공을 논하지도 않는다. 즉 노이즈로 인해서 발신자가 의도한 것과 다른 결과를 수신자가 얻었다고 해서 그것을 ‘커뮤니케이션의 실패’로 간주하지 않는다. 발신자의 의도와 다른 수신자의 해독이란 노이즈와 상관없이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 또는 ‘수신자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에 기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기호학파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의도한 바의 결과를 성취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 모델에서는 의미의 공유(share), 즉 ‘의미의 생산과 교환(production and exchange of meaning)’만이 주요하게 간주된다.
달리 말해, 기호학파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노이즈 없는 명징한 메시지의 소통’이기보다 ‘기호의 교환’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노이즈를 제거할 대상으로 연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다이어그램 속에는 노이즈 자체가 제시되지 않는다. 박종규 작품에서의 ‘평면이 접힌 것처럼 연결된 비대칭 평면’을 보라! 마치 이 삼각형의 비선형의 커뮤니케이션 모델과 닮았지 않는가? 비유적으로 말해, ‘노이즈의 바다를 접는 비선형 평면’이라 할 만하다. 
여기에는 5전시장에 선보이는 ‘노이즈 회화’에서의 여유로운 순항(順航)과 표류와 같은 순항(巡航)이 교차한다. 평면 위의 여유로운 유영과 더불어 소실점을 잃고 극단의 심층으로 빠져드는 배회와 교차가 함께 실행되고 있는 대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에서 ‘비선형 평면’은 앞서의 5전시장의 회화의 세계와 곧 살펴볼 4전시장에서 영상 및 설치 작업의 ‘중간 지대’처럼 간주된다. 

. ~Kreuzen, 2019, 알루미늄 복합판넬 위에 UV 프린트, 가변크기
~Kreuzen, 2019, UV print on aluminium composite panel, variable size


V. 순항(巡航) - 노이즈의 바다를 가로지르고 표류하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4전시장에 자리한다. 노이즈가 지천으로 펼쳐져 있고, 표류의 순항(巡航)하기가 가로지르는 탓에, 이곳에는 온통 노이즈에 대한 중의(重義)가 점유한다. 왜? 
제 4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펼쳐지는 설치와 영상 작품을 보자. 이것은 검은 벽체를 타공하여 만든 무수한 구멍들 사이로 밝은 LED 조명을 투과시켜 점멸하는 빛의 픽셀로 가득한 풍경을 만들고 이것을 배경으로 삼아 좌우 두 대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인물의 영상과 천장에 매달린 수십 대의 모니터로부터 나오는 노이즈 영상 그리고 바닥에 설치된 반영체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노이즈가 도처에 있다. 먼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은 무엇인가?”, “미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은 작가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기록한 영상은 작가가 장치한 노이즈로 인해 처음부터 독해 불가이다. 왼쪽 스크린에 원본 영상을 투사하고, 오른쪽 스크린에는 원본 영상에 노이즈를 입혀 일그러진 영상과 소리를 투사함으로써 인터뷰의 내러티브는 와해되고 표류한다. 정상과 비정상이 서로 대화하듯이 마주하고 있는 이질적인 두 영상은 실재와 시뮬라크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관객에게 질문한다.  
그뿐인가? 그 사이 중앙의 천장에 위치한 멀티플로 집적된 다중의 LED 모니터에는 인터뷰의 영상과 사운드를 완전히 해체한 노이즈 영상이 번쩍이며 점멸을 거듭하고 그 아래 반영체는 벽면과 천장의 이미지를 연신 되새김질해냄으로써 실재를 가리고 시뮬라크르의 거칠지만, 생동력 있는 움직임을 전면에 내뿜는다. 정상적인 흐름의 해체와 그것으로부터 나온 노이즈 분출의 극대화! 그 속에서의 관람자의 감상이란 행위는 노이즈의 바다를 표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Kreuzen, 2019, 3채널비디오, LED 모니터, 2개의 프로젝터, 사운드, 4분 40초, 가변크기 
~Kreuzen, 2019 3-channel video, LED monitor, 2 projectors, sound, 4min 40sec, variable size


4전시장 우측 방에 마련된 또 다른 영상 작품에서도 이러한 표류는 이어진다. 일명 디지털 폭포로 회자되는 이 삼면 영상에서 관객은 어두운 공간을 삼킬 듯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노이즈의 무서운 폭압적 흐름과 기운을 체감한다. 픽셀의 변형인 검은 점과 선들이 어둠 속에서 굉음의 사운드와 함께 ‘무한 변주’하면서 질주하고 있는 장면은 가히 거대한 디지털 쓰나미(tsunami)라 할 만하다. 관객은 무엇인가를 계속 허물면서 거대한 힘으로 밀려드는 이 엄청난 노이즈의 파도 속에서 일종의 비장한 숭고미(the sublime)를 체험한다. 공포와 경외의 감정이 교차하는 숭고미! 달리 말해, 나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가운데 공포와 경외를 한꺼번에 맞이하는 숭고미 말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느끼면서 삶과 죽음 사이를 서성인다. 가히 ‘노이즈의 바다를 가로지르고 표류하는 순항(巡航)’이라고 할 만하다. 


~Kreuzen, 2019, 3채널 비디오 설치, 소리, 철제거울, 3분, 900x900cm
~Kreuzen, 2019, 3-channel video installation, sound, stainless mirror, 3min , 900x900cm


VI. 에필로그 - 순항(巡航)하거나 순항(順航)하거나 
박종규의 이번 개인전은, 2009년부터 시작된 ‘노이즈 작업’의 연장선에서 꿈틀거리는 2019년 신작으로 구성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노이즈를 화두로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 단위인 픽셀에서 추출한 ‘점’과 그것의 변주인 ‘선’을 주요한 시각 조형으로 삼아서 회화, 설치, 영상 등으로 확장해 온 10년에 이르는 작업들을 총체적으로 점검해 보는 전시인 셈이다.
‘암호화하다(Encoding)’(2015), ‘구경꾼의 미로(Maze of Onlookers)’(2016), ‘구현(Embodiment)’(2017-18)이라는 전시 부제를 잇는 올해의 개인전 부제인 ‘순항하다(~Kreuzen)’ 역시 그의 화두인 ‘노이즈’를 풀이하고 해석하는 또 다른 개념이다. 이것은 사전적 의미로는 ‘가로지르다, 가로막다, 방해하다’의 의미와 함께 ‘표류하다’와 같은 의미의 ‘순항(巡航)하다’로 풀이되지만, 필자는 여기서 그의 개인전을 ‘순조로운 항해인 순항(順航)’과 ‘표류하는 항해인 순항(巡航)’ 그리고 ‘순항(順航)과 순항(巡航) 사이를 오가는 항해’로 분석하고자 했다. 일견 작위적인 이러한 해석은 그의 화두인 ‘노이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려는 일련의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노이즈’라는 화두를 제시하는 박종규의 이번 개인전에는 여러 의미가 함의된 ‘중의’가 점유한다. 생각해 보라. 노이즈를 인식하는 방식은 주관적인 감각에 따른 것이다. 흔히 인간의 청각 구조의 특성상 “주파수가 1,000Hz 정도인 음을 가장 큰 소리로 느끼고 100Hz 정도인 저음을 가장 작은 소리로 인식”한다는 차원에서 “50dB(A) 정도를 전후로 해서 그 이상의 음”을 노이즈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론이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노이즈로 인식하는가의 문제는 인간 주체의 개인적 심리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이는 특정 데시벨(dB)의 소리를 노이즈로 인식하는 반면, 어떤 이는 자장가로 인식할 수도 있다. 
박종규의 작품이 제시하는 노이즈 역시 관자에 따라 달리 인식된다. 특히 그의 전시가 영상 설치와 평면 회화가 한데 어우러진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전시에서 노이즈란 시청각적 인식을 아우르는 유동의 개념으로 정초된다. 그는 이번 전시를 구상하면서 노이즈라는 화두 아래, 다음과 같은 키워드를 열거했다. “어지러움, 무공간, 심플함, 세련됨, 혼란함, 의심, 정제된.” 여기에는 노이즈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번 전시에 대한 다양한 고민이 여실히 감지된다.   
노이즈란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인식되어 기피하거나 버려진 것이지만, 박종규에게서 그것은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서 되살아나 꿈틀거리면서 오늘날 현대 사회에 대한 훌륭한 메타포로 기능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번 박종규의 개인전은 노이즈에 대한 전방위적인 조형 성찰을 통해서 ‘노이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지평’으로 우리의 인식과 개념적 성찰을 이끈다고 평가해 볼 수 있겠다. 그 속에서 순항(巡航)하거나 순항(順航)하거나 그의 작품을 대면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


~Kreuzen, 2019, 싱글채널비디오, LED 모니터, 소리,  7분 50초, 2100x57cm
~Kreuzen, 2019, single-channel video, LED monitor, sound, 7min50sec, 2100x57cm


미주)

1) Claude E Shannon, Warren Weaver, The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 Urbana,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8〔1949〕, p. 7.

2) John Fiske, Introduction to communication studies, 2nd edition.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0, p. 4. 



출전/
김성호, 「노이즈의 바다를 순항(巡航)하거나 순항(順航)하거나」, 『박종규 전』, 전시 카탈로그, 2019. (박종규~Kreuzen展, 2019. 6. 4~9. 15, 대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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