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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한홍수展 / ‘령'의 회화에 대한 암중모색

김성호

‘령()의 회화’에 대한 암중모색


김성호(미술평론가, Kim, Sung-Ho)


화가 한홍수(韓洪守), 그가 한여름 동안 땀을 쏟으며 매진했던 신작들로 개인전을 연다. 이번 개인전은 ‘령()’이라는 한자를 전시 부제로 내세웠다. 이 한자는 국내 ‘상용 한자’ 목록에 없는 것으로 실생활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글자이다. 이 한자는 ‘뫼 산(山)’ 자와 ‘영묘할 령(靈) 또는 신령 령’ 자가 조합된 것으로, ‘산 깊은 모양’이라는 사전적 의미 외에도 ‘영묘(靈妙)한 깊은 산’, ‘신령(神靈)한 깊은 산’, ‘영적 분위기를 지닌 깊은 산’과 같은 의미를 함유한다. 그는 왜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 한자를 내세워서 전시 부제로 삼았을까? 


전시 전경, 영은미술관, 2019


I. 영묘한 산 또는 영묘한 회화  
그는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미술이 개념, 커뮤니티, 설치, 미디어 등을 찾아 떠나면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고 내던져 버렸던 회화를 붙들고 오랫동안 씨름해 온 일군의 작가들 중 한 명이다. “할 줄 아는 것이 그리는 것밖에 없었다”고 농(弄)처럼 진술하던 그에게 있어, 미술의 최상은 언제나 회화였다. 그렇다고 오랜 역사를 지닌 회화의 문맥과 역사를 뒤바꿀 사명감을 품거나 만용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회화가 좋아 회화를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화가들이 한 번씩은 다 거쳤다는, ‘독창적 회화에 대한 일말의 고심’이 그에게 없었을 리 만무하다. 21세기 동시대에 범람하고 있는 다종다양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어디서 본 듯한 회화를 하지 말아야 겠다”는 강박은 그에게도 있었다. “한홍수만의 회화는 무엇일까?”라는 일단의 고민은 “오늘날에 독창적인 회화란 없다”는 언명 속에서 점차 “한홍수다운 회화는 무엇일까?”로 바뀌게 되는데, 이 즈음 그가 찾은 것이 바로 ‘그가 좋아하고 그가 잘할 수 있는 회화의 언어’였다. 그것의 ‘제재(題材)적 대상’은 처음에는 인물이었고, 나중에는 풍경으로 점차 바뀌어 갔으나,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나타난 ‘회화의 조형적 언어’는 희미한 바탕으로부터 수많은 붓질로 물감 층을 쌓아 올리면서 완성에 이르는 명상과 같은 제작 방식이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이 한홍수만의 조형 언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그에게 있어 ‘한홍수다운 회화’의 면모를 모색하게 된 출발점임에는 분명하다. 
그는, 회화의 제재를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으나 ‘무엇인가 특정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이미지’로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작품을 창작하기를 원했다. 형식적으로는 빈 듯하지만, 내용적으로 의미가 꽉 차 있고, 표피적으로 흐릿하지만 심층에선 명료한, 무엇인가 기이하고 신비롭고도 매혹적인 회화, 즉 글자 그대로 ‘신령스럽고 기묘하다’는 뜻의 ‘영묘한’ 회화를 염원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전시는 이러한 영묘함을 찾는 그간의 노정을 전반적으로 정리하고 소개하는 전시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는 왜 ‘영묘한 회화’란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산 깊은 모양’이라는 풀이를 지닌 한자 ‘령()’, 즉 ‘영묘한 산’을 대신 세웠을까? 이번 전시에 선보이고 있는 캔버스 회화는 많은 부분 ‘산을 그리지 않았으나 산이 된 작품’들이자, ‘인간을 그렸으나 령이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그의 〈landscape〉 연작에는 이러한 ‘영적 분위기를 지닌 산봉우리들’이 마치 산수화의 심원법(深遠法)처럼 널찍하게 펼쳐진다. 흥미로운 지점은, 자세히 보면, 개별의 산봉우리는  붉은 색의 인체가 만든 굴곡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짙은 검은빛 하늘 아래, 등에서 허리와 둔부로 이어지는 ‘엎드린 붉은 인체’의 형상은 저마다 기꺼이 산이 되고자 한다. 희미하게 드리운 운무(雲霧) 혹은 운해(雲海)를 껴안고, 밝아 오는 여명을 받고 있는 각자의 인체들은 서로를 옆에 둔 채 동거함으로써 산줄기를 이루면서 ‘령’이 되고자 한다. 
어쩌면 한홍수의 〈landscape〉 연작에서, 인체 형상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막에 불어 닥친 바람이 만들어 놓은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 언덕이거나 대지의 벌판 위에 형성된 기묘한 바위들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인체 형상들은 광활한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미지의 어떤 행성(planet)의 울퉁불퉁한 표면일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그의 전시가 부제로 삼은 ‘령’은 ‘영묘한 산’뿐만 아니라, ‘바다 위의 섬, 사막의 모래 언덕, 벌판의 기묘한 바위, 우주 행성의 표면’처럼 ‘영묘한 모든 것’의 세계로 확장한다. 이러한 지점은, 그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한자 ‘령’을 전시의 부제로 주저 없이 내세운 까닭을 십분 이해하게 만든다.   

   
한홍수,〈landscape〉연작, 2019



II. 령()의 회화 - ‘겹’과 ‘기원의 뒷면’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 ‘영묘한 모든 것’을 지향하는 그의 회화를 ‘령의 회화’라 부르기로 한다. 주목할 것은, 그의 ‘령의 회화’가 ‘겹’과 같은 복수의 세계와 더불어 ‘뒷면’과 같은 숨겨진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홍수는 〈landscape〉 연작에서 하나의 산이 아니라 산과 산봉우리가 서로 겹쳐진 채 산맥 혹은 산줄기를 이루고 있는 풍광을 선보인다. 이것은 한 인체와 또 다른 인체가 비슷한 포즈와 형상으로 겹쳐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작품 〈겹〉 연작에서는 인체들이, 산의 계곡이나 기암절벽과 같은 형상으로 뒤엉키고 겹쳐진 이미지를 선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인체들은 각각 상이한 포즈로 뭉친 것이다. 이처럼 그의 두 연작들은 때로는 인체의 상반신 때로는 하반신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양자가 공통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은 ‘겹’이라는 ‘복수의 세계’이다.     
‘겹’은 한 개체가 또 다른 개체를 만나 서로 포개진 연접의 공간을 이룸과 동시에 둘 이상의 복수의 세계를 창출한다. 실제의 ‘깊은 산’을 생각해 보라. 그곳에는 여러 산등성이와 산골짜기가 겹쳐 있는 ‘겹과 복수’의 세계가 자리한다. 연접과 집적 그리고 반복이 만드는 이 복수의 세계는 ‘산 깊은 모양’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령’을 조형적으로 훌륭히 실천한다. 
한홍수의 회화는 이러한 ‘령’의 세계, 즉 겹과 복수의 세계에 천착한다. 〈landscape〉 연작에서는  다수의 인체들이 화면에  유사한 포즈로 겹쳐지고 〈겹〉 연작에서는 상이한 포즈로 겹쳐진 채 겹과 복수의 세계를 구현한다. 하나와 또 하나가 겹쳐지는 이것은 더하기(+)를 이루는 포지티브의 공간이다. 인간과 인간뿐 아니라, 한국적 전통 정신의 천일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에 의한 우리나라의 천인지분(天人之分)의 관점처럼 하늘과 인간이 더하기의 세계를 구현한다. 이것은 세계와 나, 주체와 객체, 대상과 비대상이 하나로 숨 쉬는 자연, 인간, 신의 삼자일합(三者一合)적 일원론에 기초한 무엇을 창출한다.  
유념할 것은 한홍수의 더하기의 공간, 즉 겹과 복수의 세계에는 빼기의 공간인 비움의 세계가 역시 공존한다는 것이다. 산봉우리의 겹쳐짐은 골짜기와 같은 네거티브의 공간을 함께 잉태한다. 또한 개체들의 겹쳐짐 사이의 틈과 구멍과 같은 공간을 생성하기도 한다. 그것은 비움의세계이다. 생각해 보라. 불교에서 합장할 때 손바닥과 손바닥이 연접해서 비움의 공간을 만들어내듯이 한홍수의 서로가 겹쳐진 인체의 형상 사이에서 또 다른 비움의 공간은 생성된다. 그것은 두 개의 젓가락이 손 안에서 쌍으로 만나 투과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너와 내가 만나서 살포시 포옹을 하며 만들어내는 연접의 공간뿐 아니라 한 인간의 웅크린 형상 속에서도 이러한 빼기의 공간은 더하기와 함께 드러난다. 너와 나 사이, 혹은 다리와 다리 사이의 벌어진 공간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산맥에서 우리가 마루와 골의 연접을 발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체 군상의 연접 속에서 발견하는 더하기와 빼기의 공간인 것이다. 
실제로 한홍수의 회화의 제작 방식에서도 이러한 겹과 복수의 세계 속 ‘더하기와 빼기의 공간’이 수시로 교차한다.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을 엷게 펴 바르면서 만들어내는 복수의 ‘겹(layer)'이 그것이다. 그것은 화면 속 희미한 형상의 실루엣을 점차 드러내면서 더하기의 공간을 만드는 동시에, '결(grain)'이라는 균질의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칠해진 물감을 닦아내는 빼기의 공간을 형성한다. 즉 미세한 층의 겹들이 무수히 집적된 더하기의 공간과, 위의 물감 층이 붓질에 의해 닦이면서 형성된 빼기의 공간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 〈기원의 뒷면〉 연작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  
이 연작은 외형상으로는 발기한 남근처럼 보인다. 이 울퉁불퉁한 육질의 ‘무엇’은 실상 웅크리고 있는 한 인체의 상반신 뒷면을 그린 후 화면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이다. 엉덩이 부분이 상단에 위치한 이 상반신 뒷면은 관객에게 마치 남근을 보는 듯한 착각에 휩싸이게 만든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셈인데, 이 작품은 리얼리즘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1866)이란 작품에 대한 오마주의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쿠르베가 여성의 하반신을 클로즈업한 화면을 통해서 생명의 모태적 근원을 탐구하고 있다면, 역으로 한홍수는 남성의 상반신 뒷면을 그린 이미지를 뒤집어 놓음으로써 남근의 형상을 드러내고 또 다른 차원의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의 제목, ‘기원의 뒷면’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런데, 이 작품은 한편으로 남근처럼 인식되다가도 마치 자궁의 형상이 겹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과 뒤, 위와 아래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이분적 양상을 ‘겹’이라는 그의 특유의 조형 언어 속에서 합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히 ‘신령스럽고 기묘하다’는 의미를 지닌  ‘영묘한’ 회화, 즉 ‘령의 회화’라 할 만하다. 


한홍수,〈겹〉 연작, 2019


한홍수, 
〈기원의 뒷면〉연작, 2019



III. 육화된 정신  
화가 한홍수의 작업에 나타난 풍경은 모두 인간의 몸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landscape〉, 〈겹〉 그리고 〈기원의 뒷면〉에 이르기까지 기묘한 분위기와 판가름이 쉽지 않은 애매한 형상을 지닌 풍경은 ‘인간의 몸’에 대한 탐구로부터 태어난 것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따라서 전시장을 가득 채운 대부분의 캔버스 회화는 이러한 육질의 것들이 연금술적 전환을 꾀한 ‘육(肉)의 풍경’인 셈이다. 
한편, 회화만 고집하던 그가 누드모델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고 촬영하여 만든 영상 작품은 그가 천착하고 있는 ‘육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점으로부터 출발해서 서서히 인체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겹의 풍경’을 탐색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다시 점으로 소멸하는 내러티브로 구성되었다. 한 줌 흙으로부터 와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의 여정을 매우 상징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육의 풍경은 실상 화가 한홍수의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이자, 화가로서 살아갈 예술가적 자화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까닭일까? 그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자화상 시리즈를 전시장 한 편에서 선보인다. 그가 스케치북에 매일 다양한 재료로 한 점씩 그려낸 무수한 자화상들은 이러한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민낯으로 대면한 결과이다. 렘브란트나 고흐 등 미술사 속 거장들의 삶이 그랬듯이, 그 역시 자신의 얼굴을 대면하면서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매일처럼 확인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이번 전시에는 이러한 매일의 자화상 드로잉 원본을 전시장 한 편의 벽면에 촘촘히 붙여놓고 반대편에 이 무수한 원본 드로잉을 아카이브로 기록한 영상을 모니터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옆 벽면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캔버스 회화로 태어난 ‘검은 자화상’을 소개한다. 무수한 자화상 에스키스 혹은 드로잉들과 그것을 기록한 영상 그리고 심혈을 다한 자신의 검은 자화상은 이번 전시에서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 ‘령’이라는 타이틀 아래 선보이고 있는 캔버스 회화들의 기초적인 밑거름이다. 그것은 정신을 담고 있는 ‘육의 정신적 풍경’이며, 나아가 우리는 그것을 신령스러운 무엇인 ‘육화(肉化)된 정신’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그는 오늘도 유화 물감을 한 겹, 한 겹 얇게 층을 만들어 올리는 ‘겹의 풍경’을 그리면서, 보다 의미 있는 회화, 즉 ‘령의 회화’를 창출하기 위해 암중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으나, 궁극적으로는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한홍수의 자화상’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회화’일 것이라는 예견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


한홍수,〈자화상〉 드로잉, 2019


한홍수,〈자화상〉 연작, 2019


출전/

김성호, 「‘령'의 회화에 대한 암중모색」, 카탈로그 서문, (한홍수 개인전, 2019. 8. 24-9. 22, 영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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