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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채지영 / 공동체 속 ‘이름 없는 장면들’

김성호

채지영 - 공동체 속 ‘이름 없는 장면들’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채지영, 어둠 속에 그림자가 묻힌 거리를 걸었다. 3, 장지에 먹,목탄 112.1x145.5cm


실상 이름 없는 것들은 없다. 창조의 신화 이래 모든 것은 이름을 부여받았다. 사물들과 생물체 심지어 선과 악, 행복과 불행 등 정확하게 규명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마저 인간에 의해서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론(命名論)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것들에 의미를 취하도록 강요한다. 기표(signifiant) 위에 기의(signifié)를 덧씌우는 이러한 일은 일견 폭력처럼 보인다. 생각해 보라! ‘미술가, 대학원생, 딸, 조카’ 등, 하나의 이름으로 족한 인간 주체 위에 덧씌우는 무수한 이름들은 한쪽의 패러다임을 강요하고 다른 쪽을 말살시키려고 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무의미한 것들로부터 의미를 구출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명명론은 하찮은 것들로부터 썩 괜찮은 것들에 이르기까지 ‘의미 있음’의 문제는 물론이고 ‘가치 있음’의 문제로 담론을 확장한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시인 김춘수가 ‘꽃’이라는 시에서 잡풀 속 들꽃과 같은 하찮은 것들로부터 아름다운 꽃으로 구출해 내는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다음 시구는 곱씹어 볼 만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러나 작가 채지영은 자신의 작품에서 이러한 명명론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신이 창작하는 작품이 하나의 의미와 가치로 재단되는 것에 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원하는 것은 ‘의미의 지속하는 미끄러짐’ 또는 ‘특정 가치의 유보’와 같은 것이다. 특히 인간관계로 점철된 가족이나 마을과 같은 ‘사회 공동체’를 ‘특정하게 명명할 수 없는 상태’로 시각화함으로써 무한한 해석의 지평을 열어두고자 한다. 노루지나 천 위에 목탄과 먹으로 그려진 회색톤의 도시 풍경은 어떤 마을과 아파트로 보일 뿐 사건이 될 만한 특정한 상황을 배제한 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드러낸다. 특히 자동차가 달리는 고속도로와 인도를 거니는 행인들을 투시가 어긋난 부감법으로 포착한 풍경은 그저 정적 속에 휩싸인 ‘이름 없는 장면’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업은 무의미와 무가치를 지향하는가? 그렇지 않다. 작가 채지영은 의미와 가치가 특정한 하나의 패러다임 속에 함몰하는 것을 경계할 따름이다. 마치 롤랑 바르트가 『글쓰기 영도(零度)』에서 밝히고 있는 ‘중립의 미학’을 실천하려는 듯 그녀는 ‘이름 없는 장면들’을 무심히 제시한다. 바르트에게서 ‘0도’란 글쓰기에서 ‘의미의 폐쇄, 후퇴, 보류’를 가리키고, ‘중립’이란 대립하는 A와 B 중 어느 하나가 아닌 C라는 영역을 갖는 것을 가리키듯이, 채지영은 ‘이름 없는 장면들’을 통해서 ‘특정 A와 그것과 대립하는 특정 B의 편에서 의미를 지시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을 선보인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가 있다면 자신의 시각 언어가 전하는 풍부한 다의미와 열린 가치일 것이다. 따라서 유념할 것이 있다. 작가가 그린 이미지가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다가온 일들을 이미지로 포착하여 무심하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관객은 작가의 작업에서 어떠한 특정한 의미의 메시지로 독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가 아무리 ‘이름 없는 장면들’이라고 강조해도 관객은 그녀의 작품을 대면하면서 ‘이름 짓는 일’을 지속할 것이며, 그 속에서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떠올릴 것이다. 작가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면, 미술 소통에 따라오는 미적 경험, 미적 가치 판별의 문제와 같은 것이리라. ●


채지영, 어둠 속에 그림자가 묻힌 거리를 걸었다. 1 장지에 먹,목탄, 53.0X65.1cm

출전/

김성호, 채지영 - 공동체 속 이름 없는 장면들, 성신여대 대학원 동양화과 비평 매칭, 카탈로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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