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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김영미展 / ‘부조리의 인간’을 탐구하는 회화

김성호

‘부조리의 인간’을 탐구하는 회화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엄마와 화가 
누구에게나 엄마가 있다. 내게 자신의 자궁을 주고 분신(分身)을 허락한 모태로서의 엄마! 열 달간의 ‘태아의 시간’을 선사하고 전(全)신체적 소통을 통해 교감하면서 나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나는 결코 기억할 수 없는 엄마! 내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만났던 첫 타자(他者)이자, 내게 말을 건네고 자신의 수액과 살을 나누며 처음으로 사랑을 준 존재인 엄마! 자신의 모든 것을 주면서 현재의 나를 있게 만든 엄마! 그래서 누구에게나 엄마는 각별한 존재이다. 
작가 김영미에게도 그러한 엄마가 있다. 자신의 사랑을 자식들에게 다 주었던 엄마! 첫아들이자 외아들인 작가의 오빠를 소년으로 키우기도 전에 심장병으로 먼저 떠나보냈던 슬픔을 겪어야만 했던 엄마! 대를 잇겠다면서 남편이 집안에 들인 씨받이 여인과의 동거를 강요받으며 잔혹한 핍박의 세월을 견뎠어야만 했던 엄마! 가족의 정체성이 파괴되어 가던 시절 남편이 사망한 후로 가족의 생계를 홀로 감당하면서 모진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엄마!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늘 주기만 했지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했던 엄마! 
노년의 엄마는 병을 앓고 있다. 뇌종양에서 발생한 알츠하이머! 이 끔찍한 질환이 엄마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형벌과 같은 과거의 기억을 지우게끔 도와주고 있으니 차라리 고마운 일이라고 한다면 너무 가혹한가? 작가 김영미는 중증의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를 모시고 함께 살면서 지난했던 엄마의 삶을 매일 같이 반추하고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투사한다. 그것은 고통의 가족사로부터 엄마를 구출하는 일이며 비혼(非婚)인 자신이 엄마를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결단이기도 한 까닭이다. 
화가 김영미는 자신의 작업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DNA를 통해 나의 가족사를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 것, 가족사의 깊은 굴곡에서 흩어진 고통의 흔적들을 어머니를 통해 다시 내게 감정이입을 통하여 그리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김영미에게 있어, ‘천형과도 같은 고단한 화가로서의 삶’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그녀의 기억 속 가족사를 치유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녀의 회화 속에 자리한 앙상한 골격, 비틀린 몸, 왜곡된 인체 형상은 그녀의 엄마의 초상이자, 자신의 자화상이며, ‘엄마의 삶’을 투사하고 변주한 타자의 집단 초상이기도 하다. 작가 김영미에게 이러한 형상이 해체되고 왜곡된 육질의 초상은 ‘인간 본성’에 대한 자기반성과 통찰을 하나로 품어 안는다. 그녀는 오늘도 엄마와 자신에게 각인된 ‘고통의 가족사’를 화해시키고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이다. 날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화폭에서의 치열한 쟁투를 기꺼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II. 부조리한 인간 - 팝적 풍자와 표현주의  
작가 김영미는 ‘부조리한(Absurd) 인간’을 그린다. 자신의 욕망에 휩싸여 야수성에 몸을 맡기면서도 사회 제도의 관습에 굴복하거나 복종하는 이중적인 인간! 또는 이상과 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신의 물질적 행복을 위해 협잡과 권모술수를 도모하는 허위의 인간! 때로는 이러한 인간상의 이면에서 피억압과 굴종의 삶을 벗을 수 없는 이 시대의 피해자의 초상이 오버랩되어 어른거린다. 전자와 후자 모두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담는다. 
전자의 이중적이고도 부조리한 인간상을 표현한 연작은, 의인화된 동물들을 해학적인 모습으로 등장시켜 비판하는 한편의 우화(寓話)이자 ‘뼈 있는 농담’과 같은 희극(喜劇)으로 나타난다. 당나귀, 황소, 개, 부엉이, 원숭이 등은 작가 김영미가 그리는 의인화된 부조리극의 주인공들로, 인간과 그 삶의 양태를 더러는 기괴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모방하고 풍자한다. 김영미의 작품에서 주연처럼 자주 등장하는 ‘당나귀’를 보라. 그것은 마치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동물농장(Animal Farm)』(1945)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보이지 않는가? 소설 속에서, 다른 동물보다 지적이지만 혁명에 대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 당나귀는 오늘날 입으로 이상을 말하고 몸은 현실로 도피하는 이중적이고도 부조리한 현대인을 의인화한다. 때로는 김영미의 의인화된 동물들은 부조리한 인간과 대비되는 순수한 사회 주체로 등장하여 반대편에 있는 음험한 현대인의 이중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 연작은, 익살스러운 표정의 동물들이 펼치는 다정다감한 이야기들과 화려하고도 경쾌한 색감을 통해서 외형적 면에서는 다분히 ‘팝(Pop)적 풍자’와 같은 즐거움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팝과 같은 가벼움과 풍자적 내러티브만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그 심층에는 이 시대의 풍경을 비트는 블랙코미디와 같은 작가 김영미의 해학적인 풍자와 더불어 불평등과 불공정에 분노하고 시위하는 어둡고도 냉소적인 사회 비판이 함께 묵직하게 자리한다.
한편, 이 시대의 피해자의 초상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변주하는 ‘부조리한 인간’ 연작에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버겁게 껴안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무명인(無名人)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표현주의적인 비극(悲劇)이 자리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현대 무명인이란 대개 피억압된 무명인을 중심축으로 한 존재이다. 가족이란 집단에서의 권좌를 움켜쥔 한국의 근대적이고도 가부장적인 아버지상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작가 김영미의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 이 연작에는 많은 부분 여성 주체가 집단으로 등장하는데, 이 여성들은 뒤틀리고 왜곡된 형상으로 고통에 찬 처연한 모습을 드러내거나 마치 한풀이를 하듯이 신명나는 몸짓으로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화면은 전자의 연작보다 보색의 대비를 줄이고 푸르거나 갈색 빛이 감도는 단색조나 채도를 낮춘 중간색을 주조로 하는 까닭에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침잠하지만, 인물 형상 안팎으로 침투하고 표출되는 표현주의 붓질로 인해서 어둠 속을 비집고 올라오는 격한 감정이 분출하듯이 가시화된다. 이 연작에는 상처받은 영혼의 곤궁함과 처연함 그리고 생로병사의 삶을 사는 인간 현실계의 고단함과 더불어 이를 깨치려고 노력하면서 새로운 삶을 각오하는 무명인들의 비장함마저 느끼기에 족하다. 특히 인물을 그리되 재현(representation)의 언어가 아닌 표현(expression)의 언어를 취하면서 김영미가 그리는 인물들은 특정인의 모습을 벗고 타자 일반으로 확산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김영미, 개같은 나 Dog-like Me, 2012, oil on cardboard, 63×39.5cm



III. 부조리의 타자 - 붓질과 몸짓의 회화    
희비극(喜悲劇)이 맞물리는 김영미의 인간 군상이 경계 안팎을 오갈 수 있는 까닭은 많은 부분 표현주의 회화의 언어 때문이다. 특히 ‘재현이 아닌 표현’의 언어는 특정인의 경계 안팎을 오가면서 ‘누구의 이야기’에서 탈주하고 관객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함께 나누는 ‘모두의 이야기’가 비로소 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마치 김영미가 인용하고 있듯이, “누구라도 좋은 내가 아닌 타인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그려야만 한다”라는,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의 강령을 회화적으로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를 그렸지만, 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김영미의 인간 군상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또 다른 나‘라고 불리는 ’타아(他我, other self)’이다. 타아는 ‘타자가 지닌 자아’, 즉 나의 분신을 한 ‘타자의 자아’로 이해된다. 결국 너, 그, 그녀, 그들이라는 타자들은 나의 투영과 다를 바 없으며, 거꾸로 나는 타자들의 투영이다. 타자들의 시선으로 매개되는 나 말이다. 이러한 변환의 가능성은, 이미 언급했듯이, 경계 안팎을 붓질과 몸짓으로 넘나드는 표현주의 언어 때문에 가능해진다. 
옆으로 기다란 형식의 작품 연작 속 인간 군상을 보자. 김영미는 한 모델이 취하는 여러 포즈와 그 형상을 묘사하거나 객관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그 앞에서 붓과 손, 즉 붓질과 몸짓으로 행하는 즉흥적인 드로잉을 통해서 주관적인 감정의 표현 자체에 집중한다. 그래서 특정인을 그렸음에도 그 영역을 사뿐하게 탈주한다. 이러한 결과 기다란 화폭에 동일한 모델을 각기 상이한 포즈로 여러 번 그리기를 반복해도 그 인물들은 더 이상 동일인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인물들로 변주되어 마치 ‘여러 명으로 구성된 인간 군상’처럼 보이게 된다. 대상을 흐리고 인물의 경계 안팎을 넘어서는 붓질이 밀고 당기는 표현주의 조형 방식이 각기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른’ 인간 군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 김영미는 “본래의 형상을 해체시키기 위해 그린 후 지우고, 다시 그리는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인물을 표현주의의 언어로 해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특정 모델을 표현한 형상은 더 이상 그 모델이 아니다. 그 인물은 곧 작가 자신이고 타자가 된다. 자화상도 그렇다. 그것은 어머니고 또 다른 타자이기도 하다. 시각예술에서 명료한 이미지를 거부하고 주체와 타자를 뒤섞는 탈경계와 혼성의 방식은 ‘탈이성’과 ‘본능’ 그리고 ‘부조리의 인간’을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더욱이 붓질과 몸짓의 혼용, 표현주의 회화의 덧칠과 지우기의 혼성, 회화와 오브제의 병합은 물론이고 연필, 콘테, 물감, 드로잉, 유화 등이 횡단하는 그녀의 재료학은 그래서 부조리 인간에 대한 가능한 모든 표현을 끌어낸다.
흥미로운 것은, 김영미의 작업 태도에는 아폴론적 질서보다 디오니소스적 혼돈에 집중했던 니체(F. W. Nietzsche)나 종교적 신앙보다 불안한 실존에 대해 천착했던 키르케고르(S. A. Kierkegaard)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이 탐구했던 ‘부조리(Absurdity)의 인간상’이 여실히 담겨있다. 그것은 카뮈(A. Camus)의 작품 『이방인(L'Étranger)』(1942)에서 주인공 뫼르소(Meursault)가 신부가 제시하는 희망을 거부하고 삶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다. 현실이 아무리 참혹하고 무의미로 가득한 세상이고, 이 현실계의 사는 인간이 처절하게 부조리하다고 할지라도 인간 실존의 무의미적 존재를 기꺼이 택하겠다는 결단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작품 속에서. 부조리의 인간에 대한 개별체적 정체성과 특수성보다 타자라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흐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그것은 때론 정열적이고 때론 냉소적이다. 부조리하면 부조리한 대로, 무의미하면 무의미한 대로 그저 여기서 ‘굳건하게 실존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소중할 따름이다. 김영미는 오늘도 이 땅 위에 두 발로 직립하고 서서 붓질과 몸짓으로 자신의 회화를 일구어 나간다. 그런 면에서 회화라는 이름을 통해서 자신과 타자를 그리고 부조리하고 불완전한 인간을 함께 끌어안고 보듬는 작업은, 작가 김영미가 앞으로도 지속할 ‘예술로 탐구하는 인간학’이라 할 것이다. 다음 그녀의 작가 노트에 기록된 진술처럼 말이다. 


김영미, 삶, 랩소디 Rhapsody in Life, 2018, Oil on Felt, 340x100cm

“완벽한 인간을 그리는 작업은 그래서 내게는 불완전한 이상이다. 따라서 완전한 상상은 그림 위에 뭉개지고 덧칠되어 켜켜이 쌓인 부조리한 인체들이다. 어차피 완전한 기쁜 가족사가 내게 없었으니까? 부친의 죽음으로 질긴 가족사는 용서하듯 애환은 끊어졌다. 작품으로 용서하고 다시 관용을 베푸는 이 인체는 그리고 지우고,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며 부조리한 이중성을 넓혀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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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김성호,  「‘부조리의 인간’을 탐구하는 회화」, 전시 카탈로그, 2019
(김영미展, 2019. 10. 12~11. 30, 蘚州畵院美術館,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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