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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2019 올해의 중견 작가展 - 서옥순 / 눈물을 위한 상념

김성호

눈물을 위한 상념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1. 눈물 풍경 
울컥한다. 이유는 모른다. 왜일까? 천장과 바닥을 잇는 커다란 흰색의 캔버스천이 늘어뜨려진 그곳에서 작가 서옥순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일까? 캔버스 천 안에서 자리하고 있는 그녀의 커다란 얼굴이 왠지 처연해 보였던 까닭은 어쩌면 그녀의 감고 있는 두 눈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바닥에 버려진 듯 누워 있는 페브릭 조각으로 꿰매어 만든 커다란 얼굴 조각 혹은 널찍한 벽면에 듬성듬성 걸려 있는 펠트 천을 둥그렇게 말아 만든 커다란 눈동자 조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나를 울컥하게 만든 그것이 내 안의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의 깊은 골짜기를 건너와 그녀의 작품 속에 감정 이입하게 만든 ‘무엇’이었다는 사실이다. 두 눈을 감고 있는 커다란 얼굴 드로잉 그리고 벽면에 펠트 천으로 만들어 걸어놓은 커다란 네 개의 눈동자 작품에서 각각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 그뿐만 아니라 천 조각으로 만들어진 얼굴 환조에 감정 이입하게 했던 무엇! 그 ‘무엇’이란 나의 참담했던 슬픈 과거를 ‘지금, 여기’에 소환했던 비애의 감정이거나 아우라(aura) 가득한 그녀의 전시로부터 받은 깊은 감화이기도 감응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눈물(tears)'이라는 테마의 서옥순의 이번 개인전 풍경이 나를 울컥하게 만든 주요한 동인(動因)인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서옥순의 개인전에 이름을 붙인다. ‘눈물 풍경’이라고 말이다. 

 


2. 얼굴과 눈물 : ‘눈물을 담는 그릇’과 ‘눈동자에 표정을 만드는 상징’    
작가 서옥순은 작가 노트에서, “얼굴은 나 자신이 경험하는 수많은 감정의 변화를 담는 그릇”이라고 토로한다. 그녀는 독일 유학 당시의 일상의 번잡함과 씨름했던 2001년 초여름의 어느 날, 세면대 거울에서 발견한 자신의 초췌한 얼굴에 드러나는 ‘어떤 감정의 상태’를 강렬하게 경험한다. 그 시점부터 하얀 캔버스 위에 바늘과 검은색 실로 자신의 얼굴을 수놓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자화상!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내비치고 싶지 않았던 낙망과 실의 또는 번뇌와 불안의 감정을 가감 없이 얼굴에 전한다. 얼굴은 희로애락의 감정뿐 아니라 현재에 처한 안온과 불안. 희망과 절망 등 희비(喜悲)의 신변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얼굴이란 인간 주체가 처한 ‘사건들에 대한 실존적 대응 감정’을 거짓 없이 담는 그릇이라 하겠다. 더러 타자에게 발각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의 차원에서의 순간의 위장 정도는 가능하겠으나, 아는 사람은 안다.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 그렇다면 서옥순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두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커다란 자화상은 무념무상의 표정을 하고 있다. 그만큼,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어떠한 감정의 상태인지를 판별하기 어려운 무표정(無表情)한 얼굴이거나 특정한 감정 상태를 탈주하는 초연(超然)한 얼굴인 것이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성성(neutralité) 혹은 중립성의 상황 안에 자리한다. 이 중성성은, ‘슬픔과 기쁨 그리고 고통과 쾌락’의 쌍처럼 대조적인 양자가 뒤섞여 이룬 혼종의 상태, 즉 ‘황홀경(ecstasy)’의 상황과 달리, 대조적인 양자의 입장 자체를 탈주하는 무표정과 무관심의 상태, 즉 ‘초연(standoff)’의 상황과 연동된다. 이러한 상황은 얼굴이 실로 수놓인 캔버스 천 아래 천으로 만들어져 놓인 조각 두상에도 엿보인다. 인물은 작가의 얼굴로 특정할 수 없는 익명의 상태를 드러냄으로써 평면 작품이 함유한 중성성의 모습을 더욱 극대화하는 것이다.  
작가 서옥순은 ‘눈물’이라는 주제 아래, 어찌하여 이러한 초연한 상황에 있는 얼굴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얼굴을 슬픈 얼굴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울컥할 것 같은 감정이 고양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초연의 상황은 작가가 의도하는 바이다. 그러니까 고의로 어떠한 감정의 표정도 읽을 수 없는 중성성의 얼굴로 드러내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장치를 통해서 미세한 슬픔 혹은 기쁨의 감정이 더 잘 드러나도록 고려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미세한 감정의 상황이란 마치 회색과도 같은 중성성의 표정 안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회색의 바탕 위에 아주 작은 붉은 점 하나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붉은 점은 작지만, 주목도를 높이면서 회색의 그림을 온통 ‘붉은 감정’의 무엇으로 규정하기에 용이해진다.  
회색 위에 붉은 점 하나가 유독 강하게 특징으로 부각되듯이, 작가 서옥순의 중성성의 얼굴 안에 상징적인 의미에서 ‘붉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커다란 자화상 작품에서는 ‘살포시 감은 두 눈’이거나, 페브릭 천을 말아 만든 네 개의 커다란 눈동자 작품에서는 눈동자로부터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눈물 줄기’이다. 특히 후자의 작품에 나타나는 눈물 줄기는 ‘슬픔이라는 감정의 상태뿐 아니라 분노와 억울함과 같은 격한 감정 그리고 기쁨과 희락으로 눈물을 짓게 만드는 일련의 복합적 감정의 상태’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이에게 이 눈물 줄기는 슬픈 눈동자로, 어떤 이에게 그것은 눈물마저 짓게 만드는 고양된 기쁨의 감정에 가득 찬 눈동자로 혹은 동요되고 있는 어떠한 감정 상태의 눈동자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다. 눈물 줄기는 마치 ‘회색 바탕 속 붉은 점’처럼 중성성의 눈동자부터 슬픔(혹은 눈물을 흘리게끔 만든 기쁨)의 차원으로 변화를 이끄는 주역이다. 달리 말해 벽에 걸린 네 점의 눈동자 조각으로부터 각기 한줄기씩 내려오는 눈물 줄기는 중성성의 눈동자를 ‘눈물이 야기하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전환하는 대표적 상징이다. ‘중성성, 무관심, 초연의 상태에 있는 눈동자에 표정을 주는 상징’으로서 말이다. 
흔히 ‘얼굴은 표정을 담는 그릇’으로 간주되지만 서옥순의 커다란 자화상에서 얼굴은 무표정과 무관심의 상태, 즉 ‘초연’의 상황과 연동됨으로써 ‘무표정을 담는 그릇’으로 간주된다. 또한 페브릭 천으로 만든 눈동자들이 지니고 있는 눈물 줄기는 무표정으로부터 표정으로 이끄는 것이 된다. 이 커다란 크기의 얼굴은 살포시 눈을 감고 있는 중성성의 바탕 위에서 슬픔과 억울함 그리고 감동이 밀쳐 내는 고양된 감정을 담는 어떠한 바탕이 된다. 즉 서옥순의 작업에서 ‘얼굴은 고양된 감정 혹은 보이지 않는 눈물을 담는 그릇’이 되고, ‘눈동자는 보이는 눈물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커다란 자화상 속의 ‘감은 눈’과 눈동자 조각 속의 ‘눈물 줄기’는 중성성의 얼굴과 눈동자에 표정을 입히는 상징이 된다.  




3. 눈동자: 눈물을 여는 샘 
“육상에 사는 척추동물의 눈알 바깥면의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는 분비액”이라는 눈물에 대한 백과사전의 정의는 건조하다. 게다가 눈물의 정체성은 “눈물길의 협착으로 인한 배출 부전이나 안구 자극 등에 의한 눈물 분비 과다로 인해 고여 있는 눈물의 양이 증가하여 야기되는 증상”이라는 의학 사전의 정의로도 수렴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눈알 바깥면의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오는 분비물로 늘 조금씩 나와서 눈을 축이거나 이물질을 씻어 내는데, 자극이나 감동을 받으면 더 많이 나온다”는 어학 사전의 정의에 심정적으로 다 가까이 들어와 앉는다. “자극이나 감동을 받으면 더 많이 나온다”는 눈물 양에 관한 문제의식은 감정의 골짜기로부터 오는 근원적인 슬픔(혹은 기쁨)의 강도를 전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죽음이 몰고 온 참회의 눈물과 내 육신이 외상을 입어 흘리는 고통의 눈물이 함유하는 두 양상과 깊이는 너무 다르다. 고난 속에서 작업했던 결과물이 값진 결과를 이루었을 때의 뜨겁게 흘렸던 기쁨의 눈물과 대비하여 극도의 공포 속에서 두려움에 치를 떨며 흘렸던 눈물의 양상과 깊이는 비교조차 어렵다.   
생각해 보라! 눈물은 금욕의 위반이 만드는 순수의 배설물이다. 통제와 억압을 뚫고 마음의 심연(深淵)으로부터 나오는 솔직하고 순수한 정수(淨水)! 이러한 눈물의 양상과 깊이는 ‘결’에 따라 다르다. ‘눈물의 결’이 무엇인가? ‘결’은 겉으로는 평정 상태로 보이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대립적 요소들이 끊임없이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운동성의 존재이다. 마치 ‘물결’이 골과 마루가 만들어내는 무수한 파동(波動)의 형식으로 운동하고, 우리의 ‘마음결’이 희로애락의 상반된 감정들이 끊임없이 생채기 내며 싸우는 운동의 과정에서 평정의 상태를 찾는 것이듯이 말이다. 물론 평정 상태에 이른 그것은 결에 따라 서로 다르다. 눈물은 우리의 감정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때로는 잔잔한 결로 때로는 거친 결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물의 의미’를 성찰하는 작가 서옥순이 드러내는 ‘눈물의 결’은 잔잔한 평정 상태와 더불어 ‘정중동(靜中動)’이라는 운동성의 미학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벽면에 듬성듬성 놓인 ‘펠트 천을 둥그렇게 말아 만든 커다란 눈동자’를 보자! 기다랗게 절단한 천 조각을 롤휴지처럼 수천, 수만 번 감아 만든 이것은 수많은 레이어로 뭉쳐진 눈동자가 된다. 어두운색들로 뭉쳐지거나 노란색을 주조로 한 밝은 천들로 층을 이룬 이 ‘커다란 눈동자’는 엄밀히 말하면 ‘눈꺼풀 없는 눈’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눈동자의 중심에서 시작된 실로 만들어진 눈물이 한줄기씩 흘러내리고 그 끝에 작은 방울이 달려 있다. 이 방울은 눈물 줄기의 끝부분인 눈물방울을 표현한 것이자, 실제로 얇은 한줄기의 실을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는 추의 역할을 하기 위해 사용된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 서옥순이 이 방울에 시각성으로부터 청각성의 장치로 전환하는 일련의 메시지를 숨겨 놓고 있음을 말이다. 물론 우리가 앞서 언급했던 ‘보이는 눈물을 담는 그릇’이라는 의미 외에 어떠한 메시지가 더 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철제로 된 쉬이 움직이지 않는 이 눈물방울은 무엇인지 단언하기 어려운 묵언의 메시지를 품는다. 침묵은 굴종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방어이자 저항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울리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쉬이 울리지 않는 방울’이 전하는 눈물의 메시지는 관객에 따라 다른 ‘결’로 인식될 것이다. 
이 글에서 관건은 작가가 왜 ‘눈꺼풀 없는 눈알(더 정확히는 눈동자)’을 크게 형상화하였는가에 관한 분석이다. 눈물이 “눈알 바깥 면의 위에 있는 (주)눈물샘에서 나는 분비액”이라는 것을 유념할 때, 눈알은 눈물의 입장에서 그저 자신을 머금다가 배출하는 중간 기착지 정도로 간주될 수 있다. 즉 눈알은 ‘눈물 생산의 본류’가 아닌 셈이다. 하물며 눈알의 일부분인 ‘눈동자’는 더더욱 눈물의 생산에 있어서 주역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옥순이 연작으로 형상화한 이 눈동자를 ‘눈물을 여는 샘’으로 정의한다. 한낱 ‘분비물의 일종일 뿐인 눈물’을 머금고 있는 눈동자’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카타르시스(catharsis)와 같은 정신적 정화와 함께 심리적 치유를 도모하는 마음의 창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옥순의 작품에서 눈동자 조각이란 ‘보이는 눈물을 담는 그릇’임과 동시에 ‘눈물을 여는 샘’이다. 





4. 눈물을 위한 상념 
작가 서옥순의 거대한 캔버스 천 위의 자화상과 그것을 익명화한 바닥 위에 설치한 인물 두상 그리고 네 점의 커다란 눈동자 작품들은 모두 눈물이 직접적으로 보이든 보이지 않았든 간에 ‘눈물’을 화두로 삼은, 천과 실로 만들어진 회화와 조각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만들어준 복주머니를 가지고 놀던 경험과 할머니의 바느질을 지켜보던 경험이 자신의 조형 언어로 자리 잡기까지 작가 서옥순은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두루 거쳤다. 
실과 바느질을 통해서 ‘규방(閨房) 공예’의 특성을 자신의 독창적인 현대적 조형 언어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서옥순은 ‘자신에게 솔직하게 자문자답하는 자화상의 변주와 변용’으로 자신의 작품을 진척시켜 왔다. 그것이 그간 '존재(Existenz)'라는 무거운 화두를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이미지와 질료’의 문제를 탐구하고 ‘눈물’을 의미를 모색하는 것으로 점차 전개해 왔음에도 여전히 그것은 작가 서옥순의 자화상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올해의 개인전에서 작가는 ‘눈물에 대한 상념’ 나아가 ‘눈물을 위한 상념’을 전개한다. 그것은 특별한 계획 없이 눈물에 대해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생각”을 늘어놓는 것이다. 눈물에 대한 상념은 슬픔으로부터 참회와 분노, 말할 수 없는 희열의 기쁨 등 자신과 타자의 관계 속 경험이 낳은 ‘눈물의 에피소드’로부터 추출된 것이다. 가족사에서의 애잔한 번민과 갈등, 예술을 향한 청년기의 좌절과 방황, 결혼과 유학 생활을 병행하면서 포기할 수 없었던 작가의 길, 그리고 어느덧 중견을 넘어 중진에 접어든 작가의 작업 세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모색의 삶, 작가 서옥순은 이 모든 것을 ‘눈물의 에피소드’와 함께 해 왔다. 유학 시절 이방인으로 느꼈던 냉대와 홀대에 몸을 떨며 분노하면서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끌어올렸던 서글픈 눈물, 훌륭한 작가로 데뷔할 수 있도록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지도 교수가 베푼 은혜에 감사해서 남몰래 흘린 감격의 눈물, 돌아가신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흘렸던 통한과 애증의 눈물, 첫 아이를 낳고 흘렸던 기쁨의 눈물,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예술 창작의 새로운 실험에 눈을 뜨게 된 환희로 가득 찼던 눈물! 
이 모든 눈물을 하나로 만든 것은 ‘중성성을 가시화하는 눈물의 결’이었다. 이것은 희로애락의 감정과 세월이 하나로 그릇 안에 담긴 눈물이다. 이러한 중성성의 맥락은 작가 서옥순의 눈물에 대한 상념으로부터 모든 타자의 눈물로 전이한다. 커다란 캔버스 천 위에 새겨진 작가의 눈을 감은 커다란 자화상이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가볍게 흔들리면서, 또한 벽에 걸린 채 똬리를 물고 동심원을 만든 응축된 커다란 눈동자 조각이 가느다란 눈물 줄기를 통해 관객과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그 ‘눈물’은 전이된다. 이제 작가 서옥순의 ‘눈물에 대한 상념’은 전시장에서 맞닥뜨리는 관객과 함께 ‘눈물을 위한 상념’으로 전이된다. 눈물! 그것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으니 내가 이제 그것을 기억할 일이기 때문이다. ●




출전/
김성호,  「서옥순 / 눈물을 위한 상념」, 전시 카탈로그, 2019
(2019 올해의 중견 작가展- 이기성, 변미영, 김종언, 남학호, 서옥순, 2019. 10. 10~ 11. 10/ 6-10 전시실, 대구문화예술회관) 

이미지 출처/
현대미술연구소/아트스페이스펄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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